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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201화 (201/203)

201화.

“불로불사의 삶에는 감정이 필수입니다. 한 번씩은 격정적인 감정이 일어나야 긴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생기는 법이에요.”

“동의하지 않는다. 긴 삶에는 오히려 감정이 잔잔하고 평온한 쪽이 좋지.”

그렇다. 요새 서윤 덕분에 나아졌다고는 해도 그 또한 무기력증을 느끼고 있는 신수였다.

“야, 현서윤. 네 생각은 어때?”

“네?”

“네 현무 님이 사랑도 미움도 느끼지 않는 무감정한 상태가 이상적이라는데. 그럼 크게 화내지도 않겠지만, 크게 웃지도 않으시겠지. 너를 좋아하셔도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일은 끝까지 없을 거다. 그럼 넌 어떨 것 같아?”

“…….”

서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현무를 올려다봤다. 작은 손이 현무의 도포를 꼬옥 붙잡았다. 조금 당황한 듯한 현무가 얼른 서윤을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취소한다. 감정이란 살아감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

그러나 하늘다람쥐는 이미 뿌에엥… 울음을 터뜨렸다. 현무가 도진을 얼음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서윤과 함께 떠났다. 끼우웅. 친구가 가 버리자 끼웅이가 서운해하며 이리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약과를 쪼개고 있던 이해자가 타박했다.

“야, 김도진. 우리도 현무 님에게 동의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왜 애를 괴롭히냐?”

“현무 님이 계속 저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차피 서윤이는 괴로워질 겁니다. 초기에 바로잡는 게 낫죠.”

도진이 자리에 앉았다. 이해자의 타박이 이어졌다.

“야, 네 의견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마. 아니, 생각이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지는 마. 세상엔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이 있는 법이야.”

“감정 문제에 타협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 고집불통이라고 욕한다.”

“어쩔 수 없어요. 욕먹더라도, 사람에겐 절대로 굽힐 수 없는 문제가 있는 법이에요.”

이리는 도진을 변명해 주고 싶었다. 도진이 고집불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게 맞다고 주장하다가도, 저쪽의 논리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면 곧장 의견을 바꾸는 아이가 도진이었다. 사람들이 도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했던 이리가 막 “도진이는…” 하고 입을 열었다.

신령들과 도진, 끼웅이마저 이리를 집중했다.

“…….”

이리는 입술을 오므렸다.

갑자기 제 생각이 이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도진을 편애하고… 사랑해서… 좋은 쪽으로 해석해 버린 게 아닐까.

“스승님, 제가 왜요?”

“…….”

“사랑스러워요?”

“으응….”

신령들의 표정이 제각기 변했다. 이해자는 웃었고, 약사는 혀를 찼고, 학문가는 떨떠름해했다. 이리도 제 대답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도진만 여유로웠다.

“스승님. 시시때때로 제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무척 당연한 일이니, 당황하실 필요 없어요.”

“…응. 그런데 사랑스러움과는 별개로 앞으로는 감정 문제에 의견이 달라도 그냥 내버려 둬. 굳이 설득하려 하지 마….”

“네, 그렇게 할게요.”

고민도 하지 않고 끄덕이는 도진에 신령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이리는 만족스러웠다. 내 말은 잘 듣는 김도진. 흐뭇하다가도 금방 또 이런 일로 흐뭇해하는 자신을 자각하고 씁쓸해졌다.

“이리 선인.”

용 머리를 한 선인이 다가왔다. 손에는 부채를 접어 들고 있었다. 신령들과 도진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뭉용 선인, 안녕하십니까.”

“다들 오랜만이군.”

“예.”

“여기 앉으세요, 뭉용 님.”

자리가 5인석이라 맨 바깥에 앉은 이해자가 일어났다. 뭉용은 짧게 대화만 하고 갈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끼우웅.

용 머리를 보고 용마가 생각났는지 끼웅이가 낯설어하지 않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나왔다. 뭉용은 끼웅이를 쓰다듬어 주고는 작은 용 여러 마리를 만들어 냈다. 작은 용들이 탁상 위로 뿔뿔이 흩어졌다.

끼웅끼웅!

끼웅이가 용 잡기 놀이에 빠졌다.

“뭉용, 여전히 용에 빠져 있구나.”

“예. 용은 완벽한 생명입니다. 주둥이가 좀 길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요.”

“주둥이 짧은 용 모습을 하면 되잖아.”

후후, 웃으며 뭉용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주둥이가 짧으면 그게 용이겠습니까. 아무리 편한 대로 모습을 바꾼다 해도 원형은 유지해야지요. 하나, 제자가 이 모습을 탐탁지 않아 하여 근시일내로 다른 동물을 찾고자 합니다.”

“전우치?”

“예. ‘스승님,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됩니다. 겉모습을 좀 더 스승님다운 예쁘장한 동물로 바꾸시지요.’ 하면서 토끼나 고양이를 추천하더군요.”

“어울리는구나. 너는 뭐라고 대답했어?”

“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요새야 기도식에 악신 사건, 취임식으로 자주 만나긴 했으나 네 녀석도 아주 바쁘고, 나는 진현계에 있으니 앞으로 뭐 얼마나 자주 얼굴을 보겠느냐. 네가 참거라.’”

하긴 본래 진현계 주민은 쉽게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연락은 매일같이 주고받아도, 진현계란 일단 오르기도, 내려가기도 쉬운 곳이 아니니까.

이제 기도식이나 취임식 같은 굵직한 행사가 모두 끝났으니 뭉용과 전우치는 한동안 만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 한동안이 수년이 될지, 수십 년이 될지 혹은 수백 년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탐탁지 않아 하기에 그냥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토끼와 고양이는 아니고 표잔이나 금저 정도를 생각 중입니다.”

“표잔 좋네. 너와 어울리진 않지만.”

“과연 이리 선인의 취향을 알 것 같군요.”

“내 취향?”

“표잔은 성질이 사납지만 길들이면 주인에게만은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위아니까요.”

“…….”

뭉용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 뭉용의 속뜻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끼웅?

끼웅이 말고는 없었다.

특히 도진은 저게 칭찬으로 들렸는지 가슴을 활짝 펼치고 크흠크흠 거렸다.

이리가 마치 부끄러운 과거를 실토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어.”

“후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장사가 던지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어떻습니까. 사랑이란 감정은 선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두렵지는 않지요?”

이리는 그때와 같은 대답으로 답변을 피할까 했다.

날 난처하게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이러지?

도진이 옆에 없었다면 그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사랑이란 감정을 체감하기 전이었다면… 사랑을 가볍게 생각하던 감정 봉인 때였다면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 두렵기만 하지는 않네.”

하우웅.

이상한 소리를 낸 도진에게 시선이 꽂혔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든 웃음을 꾸욱 참고 있다가 새어 버린 소리였다. 실수한 사람은 도진인데 도진은 이리만 쳐다보며 뻔뻔하게 히죽거렸고, 오히려 이리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뭉용 선인이 하하하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선인님께 감정이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귀여우신 모습을 보게 되니 감개무량하군요. 이보게, 김도진.”

“예.”

“고맙네. 앞으로 선인님을 잘 부탁하네.”

“…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저도 감사합니다.”

도진 또한 기도식 전 뭉용이 이리에게 감정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리의 잔잔한 호수에 가장 먼저 파문을 일으킨 사람은 뭉용일지도 모른다. 감사해야 마땅한 부분이었다.

뭉용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저승 일행이 다가왔다. 염라대왕과 강림도령이었다.

이리는 둘을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현무와 서윤, 뭉용은 키스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던 이들이라 괜찮았는데… 염라와 강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사람들이었다. 신령들이라 워낙 가까운 이들이니 민망한 마음도 금방 사라졌지만 둘은 아니었다.

“이리 선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동안 선인님과 몇 번 마주하였으나 감정을 봉인한 상태라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저 감정 기복이 적은 분이구나 했지요.”

“나도 몰랐어. 다들 비슷했을 거야.”

다행히 강림이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아서 이리의 민망함도 조금 가셨다.

“그런데 선인님은 감정이 해방된 지금도 그대로군요.”

“그런가?”

“에이, 그대로긴 뭘요. 10분만 더 대화하면 이 선인이 그 선인이 맞나 하실 겁니다.”

이해자의 툴툴거림에 강림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었다.

염라대왕이 헛기침했다.

“이리, 축하하네. 그리고 고맙네.”

“뭐가 고마워?”

“김도진이 후보 사퇴한 덕분에 홍연이 왕이 되었으니.”

“그건 도진이의 결정이야. 나는 아무 언질도 하지 않았어.”

“네, 제 결정입니다. 하지만 스승님께 고맙다고 인사하셔도 괜찮습니다. 스승님과 저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후훗.”

“…….”

하나밖에 없는 연인이 이리를 계속 민망하게 만들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염라는 떠났는데, 강림은 머뭇거리더니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이리 선인, 혹시 감정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승에는 효과 좋은 봉인 도구가 많습니다.”

이리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투였다. 당연히 도진이 발끈했지만, 이리가 아까 타이른 바가 있었기에 꾹 눌러 참았다.

염라와 강림이 떠나고 마고할미와 바리공주 등 몇몇과 더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리는 몇 번이나 ‘그렇게 됐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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