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끼웅, 끼웅!
이리 어깨 위의 끼웅이가 앞을 가리켰다.
어좌에 앉아 있던 마고할미가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편전에는 홍연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례복을 갖춰 입은 홍연 옆에는 예복을 입은 일호도 보였다. 언뜻 보면 홍연의 반려자인가 싶지만, 후견인으로서 함께 자리한 것이다. 둘은 아직도 연애를 인정하지 않았다. 곧 죽어도 친구 사이라고 우기는 두 사람이었다.
마고가 홍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홍의동자들이 하늘의 도와 예를 제창하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마고할미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가피하게 내가 면류관을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어진 임금이 되세요, 홍연.”
“네, 그리하겠습니다.”
홍연의 대답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마고가 면류관을 벗어 홍연의 머리에 씌웠다. 면류관은 저절로 홍연의 머리 크기에 맞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형태 또한 새롭게 변했다.
3대 왕의 면류관은 앞은 12류, 뒤는 6류에 흑색의 구슬을 단 어두운 면류관이었다. 처음엔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나 차츰 얼굴을 가리는 형태로 변한 것이다.
4대 왕의 머리에 얹어진 순간 안면을 가릴 정도로 길게 늘어뜨려진 면류는 손가락만 한 길이로 짧아졌다. 흑색의 구슬은 신묘한 능력을 상징하는 청색으로 변했고, 관의 형태는 뒤가 이어지지 않은 반원 형태가 되었다.
햇살 아래에서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반원 형태의 왕관은 홍연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매우 잘 어울렸다.
마고의 옆에 있던 홍의동자가 홍연에게 족자를 전했다. 진현계의 결계를 유지하는 술법이 적힌 족자로, 오직 왕만이 읽을 수 있었다. 족자를 손에 쥔 순간 홍연은 완벽하게 진현계의 4대 왕이 되었다.
태어난 지 고작 75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혼령을 모두가 주목했다.
홍연은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가장 앞에 모인 진현계의 주민들 특히 선인들이 있는 자리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현계는 발을 한번 굴러서 땅을 뒤엎고, 손을 한번 휘저어서 하늘을 무너뜨리는 존재들이 수백 명 모인 곳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을 경계하여 이 고립된 곳에 모였고, 진현계 왕 아래에 서기를 자처했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깨우친 자들만 할 수 있는 선택에 경의를 표하며. 저 또한 진현계를 다스리기에 걸맞은 왕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목소리도, 눈빛도 확신이 넘쳤다. 실로 현양한 자태에 선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화답했다.
도진도 박수를 치기 위해 손을 모으다가 문득 옆자리가 아주 조용함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가만히 홍연을 바라보고 있는 이리를 살폈다.
이리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도진은 순간 ‘내가 왕이 되지 못해서 실망스러우신가…?’ 생각했다. 지금 씁쓸해한다면 그 이유 말고는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
“임금님의 뜻에 충실한 심복이 함께하기를.”
마고는 마지막으로 붉은 구슬, 홍옥을 허공에 소환했다.
홍연이 홍옥을 건네받자 마고할미의 양옆에 있던 홍의동자 두 명이 한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는데, 총 열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처음 참관하는 즉위식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보부상이 움찔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리, 지금 홍의동자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옆에서 이리가 담담히 설명했다.
“진현계 임금님만을 섬기는 홍의동자들의 기원이 바로 저 홍옥이야. 홍의동자는 청의동자와는 달리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홍옥이라는 이물이 만들어 낸 존재로, 오직 이물의 소유자만을 따르는 충실한 심복들이지.”
“그럼… 지금 왕, 그러니까, 선왕의 옆을 지키고 있었을 홍의동자들도.”
“사라졌을 거야.”
“…….”
보부상의 낯빛이 흑색이 되었다.
이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눈빛도 조금 흔들렸다. 이리는 곧 입을 열었다.
“가 봐. 네가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나무랄 사람 없어.”
“…고마워, 이리.”
보부상이 급히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졌을 선왕에게 가는 것이다. 가장 앞줄이었던지라 눈에 띄었지만, 다들 흘깃거리기만 할 뿐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보부상과 선왕이 둘도 없는 친구라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스승님… 보부상 형한테 하려던 말, 중간에 바꾸셨죠?”
도진이 속삭였다. 이리가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알았어?”
“저는 항상 스승님을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맞아. 본래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어. 선왕과 홍의동자들은 작별 인사를 충분히 했을 테니까.”
“…왜 바꾸셨어요?”
“그냥…….”
“…….”
“그에게 보부상이 필요할 것 같았어.”
“…….”
도진은 이제 이리가 언뜻 비쳤던 ‘씁쓸함’이 ‘제자가 왕이 되지 못한 데에 대한 씁쓸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하늘 같은 새까만 눈에 담긴 건, 보는 사람의 가슴마저도 시리게 할 만큼 깊은 외로움이었다.
이리는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과거에 3대 왕도 홍연 같았을 것이다. 총명한 눈빛, 의지로 가득 찬 목소리로 담대하고도 자신감 넘치게 제 뜻을 모두에게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변했다. 12줄의 류를 늘어뜨린 면류관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울함에 잠식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막 오천 년간 옆을 지켰던 심복들을 잃었다.
아주 오래 살았고… 아주 오래 일했고.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쉬고 싶은 왕.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이들을 잃고 혼자가 된 왕….
도진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누구보다 이리가 가장 절실하게 그 처지를 알고 있지 않은가?
왕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이리일 것이다.
도진의 귓가에 일전에 선왕이 했던 얘기가 들려왔다.
‘그가 중간계에서 이물을 책임진 지 일만 년이 넘었지. 한데 이리는 어째서 나와 같은 당연한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냐?’
‘이리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 결여와 결핍이… 그와 나의 차이를 만들었지.’
이제 이리는 기억과 감정을 돌려받았다. 결여와 결핍이 사라지고, 선왕과의 차이 또한 없어졌다.
이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선왕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도진은 모든 걸 각오하고 팔찌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각오는 도진의 각오이지, 이리의 각오가 아니었다.
이리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감정이 해방되었다.
“스승님.”
도진이 이리의 손을 붙잡았다. 이리의 손은 옅게 떨리고 있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고운 미간은 쓴 약을 삼킨 듯 찌푸려져 있었다.
도진은 당황스러웠다.
“스, 스승님….”
끼우웅….
끼웅이가 이상을 감지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둘의 뒷줄에 앉아 있던 신령들이 안 좋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선인님?”
“무슨 일 있어요?”
경건한 의식 중이고 뭐고 간에 이리 선인이 가장 중요한 그들은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리가 조용히 속닥였다.
“나는 괜찮아. 제발 여기서 소란을 피워서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 줘….”
선인은 거짓말을 못 하니 지금 이 말은 진심이었다.
신령들은 다시 침착해졌고, 끼웅이도 다시 무릎 위를 뒹굴거렸다.
“…….”
도진은 이리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을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 이리는 ‘도진아, 괜찮아?’라고 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스승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그는 이 와중에도 제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리는 공허함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동요하는 쪽은 오히려 도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정하고… 강할 수 있을까?
이렇게 가까이서 손을 붙잡고 있는데도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경건한 의식이 끝난 후 연회가 시작되었다. 진현계 위아들은 연회를 좋아한다. 진현계 구성원의 주축인 선인들이 연회를 즐기기 때문이다. 특히 즉위식 같은 거룩하고 거창한 행사의 연회이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리와 도진은 신령들과 함께 앉았다. 아무도 못 앉게 하기 위해 가장 구석 자리 5인석을 선택했는데, 노력이 무색할 만큼 둘을 보기 위한 이들로 붐볐다.
“선인님! 도진이 형!”
“서윤아.”
“선인님, 정말 오랜만… 으앗!”
현무의 하늘다람쥐가 도도도 뛰어오다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걸려 삐끗했다. 넘어지려는 서윤을 현무가 가볍게 붙들었다. 바로 세워 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양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달랑 들어 올렸다. 현무가 성큼성큼 걸어와 얌전히 들려 있던 서윤을 이리 앞에 놓았다.
“서윤아, 오랜만이야.”
“선인님, 보고 싶었어요. 도진이 형도….”
“현서윤, 만나자마자 또 넘어질 뻔했냐.”
도진이 새빨개진 서윤의 머리를 헝클였다. 끼웅이도 서윤의 뺨에 달라붙어서 반가움을 표현했다.
“이리 선인.”
“현무, 여전하구나.”
“…이쪽은 늘 똑같다만, 선인 쪽은 아주 달라졌더군.”
“…….”
“연인이 되었다고 들었소.”
“그렇게 되었어….”
오늘만 이런 인사가 몇 번째인지….
“축하하오.”
“고마워.”
“그리고 감정이 봉인되어 있다가 풀렸다, 이런 소리도 들리던데.”
“사실이야. 나도 내 감정이 봉인되어 있었는지는 몰랐어.”
“이것은 축하할 일인지 모르겠소.”
“아직은 애매하지.”
“축하할 일이죠!”
서윤에게 장난치는 와중에도 귀는 쫑긋 세우고 있던 도진이 얼른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