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끼우웅, 끼웅!
“어, 그래. 가져가라.”
끼웅이가 도진에게서 돌려받은 초대장을 몸속에 잘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봄날의 오후 같은 정자와 하얀 눈이 내리는 바깥의 경계선에 몸을 반씩 걸치고 폴짝폴짝 뛰었다.
도진은 챙겨 온 짐들을 정자 한쪽에 올려 두었다. 그러곤 이리의 옆에 앉을지, 맞은편에 앉을지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
제자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자 이리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했다.
“도진아, 뭐 하는 거야?”
“체벌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무릎 꿇고 손들고 있을게요.”
“…여기 앉아.”
이리가 가리킨 ‘여기’는 자신의 옆자리였다. 도진이 냉큼 앉았다. 거리를 조금 벌리려다가 이럴 때는 오히려 이 완벽한 육체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에 꼭 붙어 앉았다.
단단한 허벅지가 달라붙자 이리의 어이없다는 눈빛은 한결 더 짙어졌다. 그리고 도진 또한 한술 더 떴다.
“허리도 끌어안아도 돼요?”
“안 돼.”
“네….”
도진이 시무룩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이리는 양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 두고 있었는데, 도진의 손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 와중에도 손을 붙잡겠다고. 손가락이 닿을 때쯤 이리가 입을 열었다.
“도진아, 내가 화난 걸로 보여?”
“네…. 막, 하루전쟁 때나 제가 다쳤을 때 정도로 화나시지는 않았는데, 저한테 배신감과 서운함을 분명히 느끼고 계시잖아요.”
“…….”
“아니에요?”
“맞는 것 같아.”
이리는 대답하고 바로 정정했다.
“사실 나도 모르겠어.”
“…….”
“너한테 화가 나서 며칠간 멀리했던 게 아니야.”
이리의 맑은 눈이 도진을 직시했다. 도진의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또한 이리의 심장도 두근두근… 열심히 뛰고 있었다. 결코 잔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심장 박동이었다.
“이 감정이 어색해서 그랬어. 머리는 네게 배신당했으니 화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네 얼굴을 보면 서운함이고 배신감이고 전부 사라지거든. 그리고 심장이 뛰면서 가슴이 뜨거워져. 그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런 적 없었는데.”
이리의 말뜻은 이랬다. 팔찌를 해제하기 전에도 이리는 도진을 사랑했고, 분명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을 마주쳤다고 가슴이 콩닥콩닥거리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굳건한 댐 하나가 감정의 홍수를 막고 있었다. 그 댐 덕분에 이리의 감정은 언제나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러나 댐이 사라진 지금, 거의 일만 년만에 느끼는 감정의 홍수에 이리는 당황하고 어색했던 것이다.
며칠간 이리가 도진을 멀리했던 이유는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이러한 어색한 감정과 화해하는 과정이었다.
“너를 오해하게 했어. 미안해.”
“안 돼요, 스승님!”
도진이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사색이 되었다.
“사죄해야 하는 사람은 저예요. 스승님이 사과하시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못돼먹은 개잡놈이 되어 버려요. 저는 스승님의 동의를 얻지 않고 팔찌를 파괴했잖아요. 차라리 절 때리고 욕하세요.”
“화가 났다면 그리했겠지.”
“저는… 스승님이 화내시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는데. 스승님의 삶에 서운함과 배신감이라는 감정이 생겨서. 비록 원망받더라도 결핍되었던 감정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 버리시면….”
도진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지자 이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리는 손을 들어 도진의 좁아진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도진은 서러운 와중에도 조금 놀랐다. 이리가 이렇게 파격적인 스킨십을 하다니. 어릴 때 이후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도진아. 나는 팔찌 이전에도 감정 동요가 없는 편이었어.”
“예전부터 화를 내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응.”
“하지만 그때는 스승님을 화나게 하는 일 자체가 적었겠죠. 감히 이리 선인을 배신하는 놈이 존재했겠어요?”
“하긴 존재하지 않았으니 비교하기는 어렵겠네. 아무튼 중요한 건 너는 이미 내게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을 알려 줬다는 사실이야.”
“서운하지도,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는다면서요!”
이리의 웃음이 좀 더 진해졌다.
제자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어여쁘게 웃으실까.
“도진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네…?”
“나는 너라서 화가 나지 않은 거야.”
“…….”
“정말 신기한 감정이야. 이런 감정을 모르고 살아온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이리는 도진의 눈가와 뺨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거뒀다. 그 손은 가슴으로 향했다. 이리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 손바닥 아래의 박동을 느꼈다.
“이 감정이 사랑이겠지? 너도 이런 감정을 느꼈어?”
이리의 물음은 감정이란 걸 막 깨달은 소년이 건네듯 순진무구했다.
도진은 이제야 이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깨달았다.
이것은 이리 선인 나름대로의 사랑 고백이었다.
도진이 이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벅차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길고 긴 짝사랑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이미 예언을 통해 이뤄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하늘 높은 자신감으로 반드시 쟁취하리라 확신했다 하더라도, 이 순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듯 기뻤다.
이리 선인을 쟁취했다, 이리 선인이 나의 것이 되었다, 이리 선인과 연인이 되었다…. 이런 류의 문장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이리 선인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건 머리건 혼백이건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
“도진아, 숨 막히려고 해.”
“스승님, 정말 사랑해요. 저 좋은 연인이 될게요.”
“넌 이미 좋은 연인이야.”
“지금보다 더. 저도 이제 철들게요. 이리 선인의 정인으로서 걸맞은 사람으로… 그래서 스승님이 절대로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정말 노력할게요.”
이리가 도진의 넓은 등을 토닥였다.
이리는 정말 이러다 숨이 막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제자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고,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만큼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매우 기꺼워 이대로 두었다.
끼우웅… 끼웅!
어느새 정자의 나무 의자 위로 올라온 끼웅이가 폴짝폴짝 뛰었다. 푸르릉.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용마도 타박타박 다가왔다.
이리는 도진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도진이 알아들었다는 듯 거리를 조금 벌리고 이리를 바라봤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은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망울망하고 있었다.
이리가 도진과 눈을 마주치고 주위를 훑었다. 도진도 이리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제는 꽃잎이 아니라 흰 눈이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도진은 작은 손동작으로 한편에 치워 둔 담요부터 가져와 이리의 어깨에 걸쳤다.
“스승님, 큰일 났어요. 꽃잎을 봐도 흰 눈을 봐도 오늘 일이 떠오르겠어요. 이렇게 된 김에 여름에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가을에 붉은 낙엽 속에서도 또 이렇게 사랑 고백 시간을 가져요, 우리.”
“그래. 그러자…. 그런데 도진아.”
“네.”
“계속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를 거야?”
“당연하죠! 스승님은 영원히 스승님이에요. 왜요? 이… 라고, 이름 불리고 싶으세요?”
이리는 담요를 여미며 도진을 쳐다봤다.
“한번 불러 봐.”
“이, 이, 이.”
“…….”
“리.”
“사이에 간격을 너무 뒀잖아. 다시.”
“이이이이이리.”
“내 이름 그렇게 안 길어.”
“이이이이이… 못해요! 제자가 어떻게 스승의 이름을 입에 담습니까? 스승님은 스승님이에요! 연인 간에는 애칭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고, 세상에는 다양한 애칭이 존재한다고요. 저만의 애칭은 바로 스승님이에요!”
도진이 목까지 새빨개져서 도리질 쳤다. 이리의 눈매가 휘어졌다.
“왜, 팔찌의 봉인을 해방할 때는 ‘이리 선인’이라고 똑똑히 말하는 걸 분명 들었는데.”
“……!”
“스승님이 아니라 이리 선인이라고. 이름 불렀어.”
도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자가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모습은 아주 흔치 않은 풍경이라 이리는 즐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놀리는 건 즐겁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항상 이리가 도진의 돌직구에 난감해하고 당황해했지만, 앞으로는 양상이 조금 달라질 것 같았다.
* * *
개천일이 되었다. 도진과 이리는 단정한 예복을 입고 즉위식에 참석했다.
오천 년 만에 왕이 바뀌는 날이니만큼 아주 성대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천지신명은 물론 율도국의 홍길동 왕, 나림국의 월백 장군, 용궁의 용천신과 미궁의 천마 또한 직접 자리했다. 올림푸스 십이 신령과 엔네아드 아홉 신수도 축하 사절단을 보냈고, 하계의 찰마 공주까지도 축하 서신을 보내왔다.
위력자들은 전부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와중에 진현계의 3대 왕만은 불참했다. 저번 달부터 이미 두문불출했던 선왕은 하야 의식도 생략하고 어딘가에 숨어 버린 것이다.
“이런 행사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다니 상태가 더 심각해진 걸까요?”
도진이 묻자 이리의 반대편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보부상이 대답했다.
“상태는 많이 나아졌어. 오히려 나아졌기 때문에 오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 거야. 취임식을 보다가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가 떠오르면 기껏 나아진 게 말짱 도루묵이 될지도 모르니까. 철 의관의 조언이었지.”
“그렇군요….”
“왕이 이리, 너랑 대화해 보고 싶어 해. 네 감정 해방 소식을 듣고 엄청 흥미진진해하더라. 네 얘기할 때는 죽은 눈깔에 생기가 돌더라니까. 거의 오백 년만에 처음이었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네.”
“재미있는 일이지. 아마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도 너랑 대화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걸. 솔직히 지금 가장 큰 화젯거리는 새로운 임금님이 아니라 바로 너거든.”
그 이리 선인이 제자를 정인으로 삼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감정이 봉인되어 있었고 최근에 풀렸단다. 그 봉인을 푼 자 역시 제자라 하니, 흥미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였다.
실제로 지금도 이리의 뒤통수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다 꽂히고 있었다. 목덜미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그나마 둘의 바로 뒷줄에 자리한 이해자, 학문가, 약사가 시선을 막아 줘서 이 정도였다.
“기분 나쁘네. 내 스승님은 화젯거리로 삼아도 되는 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연인이 된 모습을 대중에 보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죠. 스승님, 연회에서 조금만 놀다가 가요.”
“…그래.”
도진이 이리의 손을 붙잡았다. 이리가 살풋 미소 지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어여쁜지 보부상이 혀를 찼다.
“적응 안 된다, 적응 안 돼….”
이리는 본래도 잘 웃는 편이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웃음은 잔잔한 미소… 비유하자면 들꽃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꼭 물기에 젖은 장미꽃처럼 생기 있고 자극적인 웃음을 뿌리고 있다.
하긴 첫 연애인데 오죽 좋겠지 싶으면서도 수천 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에 적응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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