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97화 (197/203)

197화.

“…….”

잠깐 도진과 이리의 눈이 마주쳤다. 도진의 붉은 눈은 여느 때와 같았다. 이리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하다는 뜻이었다. 빤히 보자 얼굴을 붉히며 이건 혹시 어떠한 신체 접촉을 하자는 신호냐고 묻는 모습도 평소와 같았다.

뭘 향한 비아냥이었지?

의문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김재민 일을 해결할 때였다.

이리가 부채를 소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에서 힌트를 얻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한 김재민이 도망치려고 했으나 도진이 팔을 붙잡는 것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시, 싫어요.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요! 제발요.”

“저기 선인님! 자, 잠시만요. 애가 이렇게 거부하는데… 잠시만요!”

수호령이 다급히 이리와 김재민 사이를 막아섰다.

“저한테 재민이를 달랠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잠깐만 재민이의 영안을 열어 주시면 제가 잘 달래겠습니다.”

고민하던 이리가 도진에게 눈짓했다. 도진이 엉엉 울고 있는 김재민의 영안을 열었다.

“혀엉!”

“재민아….”

김재민이 형에게 와락 안겼다. 열여덟 살과 스물여덟 살이 아니라 여덟 살과 열여덟 살 같은 모습이었다.

“혀엉, 내 기억을 지울 거야? 싫어. 내 곁에 형이 있었다는 걸 계속 기억하고 싶어. 이런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도,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재민아, 네가 뭔가 착각하나 본데 기억을 잃는 쪽이 더 특별해.”

“으응?”

“으응, 이라니. 생각해 봐라. 봉인된 기억을 지닌 22세 청년이라니 이 세상에 너 말고 또 있겠냐? 존나 특별하지, 인마.”

김재민의 눈이 깜빡거렸다. 귀는 쫑긋 서고 입술은 조금 벌어졌다.

“너는 네 입으로 ‘나는 특별한 힘이 있노라. 단지 봉인되어 있어서 펼칠 수 없을 뿐.’ 이딴 말 하면서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현실은 상상과 다르다는걸. 하지만 이리 선인님이 네 기억을 봉인하면 그때는 네 상상이 진짜로 현실이 되는 거야! 너는 정말로 왼팔에 봉인된 기억을 지닌 특별한 인간이 되는 거라고.”

“왼팔… 봉인….”

“그래. 앞으로 당당하게 왼팔에 봉인된 기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 왜냐하면 진실이니까. 정말 멋지지 않냐?”

“머… 멋있어. 그래도… 자랑하고 싶은데.”

“물론 엄청 자랑하고 싶겠지. 나도 이해해. 하지만 전혀 멋있지 않아. 만약 기억을 잃지 않으면 네가 사람들에게 할 말이라 봤자 그저 ‘귀신을 봤다’, ‘퇴마 영상의 출연자들을 실제로 봤었다’. 이 정도잖아. 하지만 기억을 잃으면 ‘나에겐 봉인된 기억이 있지… 크큭’이라고 말할 수 있어. 이게 백 배는 더 멋있어! 인정하지?”

“…으응.”

“선택해, 재민아. 힘을 숨긴 찐따가 될 수 있는 이 희귀한 경험을 저버릴 것인지. 나는 내 동생을 믿는다.”

김재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고민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결단을 내린 눈빛이었다.

그렇게… 김재민은 순순히 기억의 실을 제거당했다.

‘전북 폐가에 와서 형과 함께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다가 경찰이 온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내려왔다.’ 정도의 기억만 남겨 뒀다. 덧붙여, ‘동호회 사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까지.

김재민의 집 앞에서 수호령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인님. 수호령은 수호 대상의 곁을 떠날 수 없으니 아쉽군요. 언젠가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괜찮아. 마지막까지 동생 잘 챙기기다가 떠나렴.”

“예, 감사합니다.”

퇴마 영상 사칭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도진은 용마에 오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딴 식으로도 해결이 되네요. 역시 인간은 재밌어. 늘 새로워….”

도진이 이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두 사람도 곧 대여점에 돌아왔다.

“스승님, 저는 좀 씻으려고요. 같이 씻으실래요?”

“청결 유지 술법을 알려 줬는데도 왜 굳이 물을 끼얹는 거야?”

“스승님한테 눈 호강 되어 드릴 겸… 덕 아끼려고요.”

“그렇구나…. 나는 먼저 잘게.”

“결국 언젠간 제 가슴을 주무르게 되실 텐데. 알겠어요. 부디 할 수 있는 데까지 외면해 보세요.”

도진의 표독스러운 목소리를 이리는 좋은 꿈 꾸라는 인사로 해석하고 자러 들어갔다.

이리가 용맹한 맹수 인형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는 동안 끼웅이는 베개 위를 뒹굴거렸다.

끼우웅. 끼웅. 끼우웅.

“그래. 오늘 하루가 유독 길었지.”

끼웅.

“피곤해? 어서 자자.”

이리는 끼웅이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그때서야 이리는 제 손목에 팔찌가 없음을 알아챘다.

아까 도진에게 맡기고 돌려받지 않은 것이다.

끼우웅?

끼웅이가 얼른 자자고 보챘지만 이리는 도진이 씻고 나올 때까지 잘 수 없었다.

“먼저 자. 불 끌게.”

끼웅.

끼웅이는 일어나려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늘어지고 말았다. 이리는 귀여운 끼웅이에게 이불을 잘 덮어 준 후 방 불을 끄고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 작업대의 노란 조명을 켜고 정원을 바라보며 앉았다. 하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도진에게 눈을 쓸라고 시키지 않고 그냥 도술로 치워야겠다.

한 시가 지난 시각이라 하품이 나왔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다시금 생각이 났다.

무엇이 생각났냐면 당연히… 도진의 따듯하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이리는 무의식중에 손목의 팔찌를 만지려다 맨살만 만져지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2층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가 잠시 기다리자 도진이 2층 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왔다. 도진은 의외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스승님, 안 주무셨네요.”

어째서인지 웃음기가 사라진 모습을 보자 이리는… 오늘 아직 끝나지 않은 용건이 있음을 기억했다.

‘배신’에 대한 것.

“주무시라고 했잖아요. 깨어 계시면 어떡해요. 피곤해 보이셔서 내일 하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내일 배신하려고 했다’라는 말이었다.

“매도 얼른 맞는 게 낫지. 자, 얼른 배신해 봐.”

도진이 웃으며 옆에 앉았다.

“스승님, 매 맞아 보신 적 없잖아요.”

“‘배신’이라고 할 만큼의 배신은 당한 적 없긴 해. 긴장되는구나.”

도진은 이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란 조명 아래에서 제자의 표정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리는 도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팔찌부터 줄래?”

도진이 남색 잠옷 바지를 뒤적거렸다. 실 팔찌를 손에 든 도진은 이리에게 건네는 게 아니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스승님, 다음 주가 개천일이에요.”

“…….”

“저 왕이 되지 않으려고요.”

이리가 눈을 내리감았다.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예상했음에도…….

권력을 지닌 부잣집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이었다. 특이한 케이스답게 도진은 장사로서도, 도사로서도 다재다능했다. 그래서 이리는 김도진이야말로 자연이 추후를 위해 빚어낸 왕의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도진은 진현계의 왕과는 다른 의미의 특별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요 근래… 자연히 알게 되었다.

“충격받으셨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것 같았어.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너는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 돼.”

이리는 늘 그렇듯 다정한 미소로 제자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리의 반응을 본 제자는 오히려 그 말에 걱정이 가중된 듯 보였다.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혹시 제가 왕을 포기해서… 배신감 느끼세요?”

“아니….”

“저는 스승님께서 제가 왕을 포기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길 바랐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예언에서 말한 배신은 다른 부분일 테니까.”

“…….”

도진의 눈빛에 괴로움이 비쳤다. 약간의 후회도 담겼는데,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앞으로 할 일에 대한 후회였다.

이리는 의아해졌다.

대체 어떤 배신을 하려고?

제자는 스승에게 절대로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가 칼을 휘둘러도 도진은 이리를 끌어안고 칼에 맞을 것이다.

이리는 도진에게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았다. 스승은 제자를 믿었다.

“스승님.”

“응.”

“제가 왕을 포기하려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유가 뭐야?”

“단순해요. 지금껏 모은 덕이 단숨에 날아갈 예정이라 당장 개천일에도 진현계에 못 들어가게 생겼거든요.”

이리가 가늠해 보니 도진에게는 현재 이백 년 분의 덕이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려기에… 이 많은 덕을 단숨에 소진한다는 걸까.

이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도진아, 팔찌 줘.”

도진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그 떨림은 곧 손목으로, 어깨와 상체를 넘어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도진은 꿋꿋이 팔찌를 움켜쥐었다.

이리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선인의 도술에 저항해낸 도진이 입을 열었다.

“이리 선인.”

“…….”

“당신을 배신해야겠습니다.”

투둑, 툭.

도진이 팔찌를 뜯었다. 검은 실들이 나풀거리며 공중에 날렸다.

이리의 눈이 커졌다. 벌떡 일어난 이리가 도력이 담긴 손짓으로 실들을 끌어모으려 했다.

그 순간 검은 실들이 이리에게 빨려 들어갔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봉인 이물인 가죽 팔찌를 겹겹이 감싸고 있던 까만 실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이리의 기억이었으니까.

“……!”

이리가 비틀거리자 도진이 허리를 잡아 왔다. 이리는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진의 팔뚝과 가슴에 얹힌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이리는 도진에게 온몸을 기댄 채 고개를 떨궜다.

끊어진 팔찌의 기억이 몰아쳤다.

기억이란 곧 감정.

‘이리. 이게 너한테 필요할 거야.’

단단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팔찌. 처음엔 가죽끈에 불과했다. 이리는 친구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팔찌를 차고 다녔다. 친구들의 선물이기도 했고, 인간의 신체를 유지하기에 용이한 이물이기도 했으니까. 단순히 그 두 가지가 이유였다.

어느 날 새벽, 만물상점의 문을 여는 이리의 시야에 제 손목이 들어왔다.

‘앞으로 긴 시간을 인간계에서 보내려면 반드시 필요할 거야.’

팔찌를 보는 순간 이리는 친구들이 어째서 그렇게 얘기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친구들의 말이 옳다는 것도.

이리는 그날 자신의 기억을 꺼냈다.

친구들과 관련된 기억의 실은 모두 새카만 색이었다. 오색빛깔의 실이 새카매질 정도의 깊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들을 다시는 볼 수 없어.

영원히 만나지 못해.

그들은 영원히 사라졌어. 모두 내 곁을 떠났어. 나는 혼자야.

왜 그들을 따라서 죽지 않았지? 왜 친구들은 나를 좀 더 설득하지 않았지? 왜 나만이 남겨진 거지?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되뇔 때마다 까맣게, 까맣게 물들었다.

이리는 새까만 기억들을 한데 모았다.

세상에는 태고의 선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태고의 선인이 존재해야만 만물이 이물을 탄생시키므로.

하나 남은 태고의 선인은 이토록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죽고 싶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이리는 새까만 실들을 팔찌에 봉인했다.

기억이란 결국 감정.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데에 필요하지 않은 온갖 감정을 스스로 제거했다.

감정의 결여는, 그가 일만 년이 넘도록 중간계에서 대여점을 운영하면서도 미치지 않게 해 주었다.

결핍만이 이리에게 안정을 찾아 줬다.

아아…….

이리가 울컥, 울컥 치솟는 뜨거운 감정에 목과 가슴을 긁었다. 그러나 단단한 손이 살갗에 상처 내는 것을 막아 왔다.

이리는 이 손의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왜 내게 기억을 찾게 했어?

왜 감정을 되찾게 했어?

너무 힘들어서, 떠오를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봉인한 기억이었다.

이렇게 거센 풍랑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뜨거운 불길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는데.

“스승님.”

도진이 저를 불렀다. 이리는 이 와중에도 도진이 밉지 않았다. 원망스러운데 이 아이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이 우스웠다.

감정이 돌아오고 나니 절절히 느껴지는 감각.

이리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진이 이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불길이 있었다. 그 불길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리는 전율이 일었다. 어느 때보다 도진이 품은 사랑이 절실히 느껴졌다. 저 열렬한, 섬뜩하기까지 한 눈빛을 마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원망받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스승을 배신해야만 했던 이유.

도진이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해 와도 가벼이 넘겼었는데.

이제 이리는 영원히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제자가 품은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았으니까. 이리의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휩싸이는 감정의 폭풍이 마침내 이리에게도 다가왔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