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지금은 말 안 할래요. 사건 끝나면요.”
“…….”
“아, 스승님. 제발 미인계를 멈춰 주세요. 제 심장 멈추기 전에.”
도진이 크흡, 하며 가슴을 쥐었다. 이리는 엄살 부리는 제자가 귀여워 시선을 거뒀다. 그럼에도 심장 떨린다며 툴툴대던 도진이 슬금슬금 이리의 허리께로 손을 올렸다. 이리가 내버려 두자 도진은 금세 또 헤벌쭉 웃었다. 옆구리에 와닿는 커다란 손은 따뜻하고, 조심스러웠다.
올라가면서 이리도 나름대로 어떤 배신일지 생각해 봤다.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한 키스가… 배신인 게 아닐까?’
이리는 실제로 그 일로 인해 도진에게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으므로 자신의 추측이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그때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다시 떠올린 이리가 입술을 오므렸다. 한숨을 내쉬지 않기 위해서였다.
둘은 곧 두승산 산신령과 만났다.
“이리 선인!”
“대필가, 오랜만이야.”
“하아. 내가 진짜 미칠 지경이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산신령은 인사를 끝내자마자 냅다 한탄했다.
“12월 말, 이 추운 날씨에도 인간들이 끊임없이 강령술 모임을 하고 있소. 강령술이라니! 여기 혼령들이 깔리고 깔렸는데 대체 뭔 놈의 귀신을 소환하겠다는 거요? 인간들이 떼로 몰려와 쓰레기를 버리고 가고, 그걸 우리 산의 잔챙이들이 먹으려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오? 한번은 담배꽁초 때문에 산불이 일어날 뻔한 걸 겨우 막았소!”
“고생 많았네.”
“이뿐이 아니오, 이리 선인. 안 그래도 이곳엔 원혼이 많아서 항상 산에 결계를 쳐 놓는데, 강령술 모임에 어설픈 무당이 끼어 있기라도 하면 결계가 흔들려서 시시때때로 손보아야 하오. 소진되는 덕은 아깝지 않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서 매우 허탈하오!”
“저런.”
이리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두승산과 산 아랫마을 전체에 강한 결계가 만들어졌다. 용마와 끼웅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더욱 신나서 뛰어놀았다.
“일단 내가 보강했어. 그리고 내일부터는 내장산, 모악산, 장안산 산신령도 도우러 올 거야. 이미 연락해 놨어.”
“고맙소, 이리 선인. 숨통이 트이겠구려. 강령술 열풍은 얼마나 더 가야 시들 것 같소?”
“한달은 걸리지 않을까.”
“이번엔 더 걸릴 거예요. 마침 또 방학이라 애들이 흉가 체험한다고 많이 드나들 거라. 대필가 님은 각오해 두세요.”
도진의 말에 산신령은 울상이 되었다.
힘없는 산신령에게 금광초 찻잎을 건네고 헤어졌다.
둘은 곧장 전북 폐가로 향했다.
폐가로 향하는 길은 사람들이 얼마나 드나들었던 건지 산책로처럼 매끄럽게 길이 나 있었다.
“얼마 전에 요하 때문에 이 산 왔을 때보다 길이 더 깔끔해졌네요. 눈도 누가 다 쓸었나 봅니다. 이러다 나중엔 폐가 앞에서 쥐포랑 솜사탕 파는 거 아니에요?”
“진짜 그럴까 무섭구나. 퇴마 영상의 여파가 이렇게 클 줄 알았다면 염라대왕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텐데.”
“저는 솔직히 그때 재미있었어요.”
“재밌었다니?”
“스승님 그때 저 어리다고 위아들이랑 최대한 안 얽히게 했었잖아요. 저로서는 처음 겪는 대여점 일이었으니까 완전 신이 났었죠. 스트리밍 아이디어도 제 아이디어였는데, 단번에 채택해 주시고. 뭔가 드디어 나도 선인님한테 도움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들떴었어요.”
실제로 그때 도진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얼마나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느냐 하면, 흥미를 끌기 위해 놔둔 치킨을 집어먹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다. 이러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고, 그럼 시청자 수가 더 많아질 거라고.
“너라도 즐거웠다면 다행이야.”
“근데 당시에 불길한 직감 같은 거 못 느끼셨어요? 스승님 특유의 그 길운을 감지하는 능력으로.”
“불안하긴 했어. 그래서 처음엔 거절했었고.”
“하지만 끝까지 거절할 만큼의 불안함은 아니었던 거네요?”
“응.”
“…….”
도진이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좁아진 미간을 보며 이리의 미간 또한 좁아졌다.
“왜 그래?”
“스승님, 지금은 불안하지 않으세요?”
“…안 불안했는데 지금 네 말 때문에 불안해지려고 하네.”
“스승님의 직감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제가 저지를 ‘배신’이 스승님한테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이리는 네 키스가 ‘배신’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얘기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나 도진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안 하기로 했다.
“배신할 생각이 아주 만만하구나. 자세히 말해 주면 좋겠는데.”
“곧 말씀드린다니까요. 이 일 끝나고.”
“날 너무 놀라게 하지는 말아 줘….”
“…….”
“왜 대답이 없어?”
“알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돼서요.”
“…….”
그렇게 서로 침묵을 주고받으며 걷는 사이 폐가가 가까워졌다. 앞쪽에서 사람들 기척이 느껴졌는데 족히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잔치라도 여는 듯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푸릉.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자 용마가 이리의 팔을 주둥이로 툭, 쳤다.
끼웅!
끼웅이가 용마의 머리 위에 우뚝 서서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데려가 달라는 뜻이다. 이리가 끼웅이를 어깨 위로 올리자 용마는 타박타박 길 옆으로 빠져나갔다. 알아서 인간들을 피하는 것이다.
“스승님, 은신술 펼칠까요?”
“사람들이 네 얼굴을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너는 둔갑하거나 은신하는 게 좋겠어.”
“맞다. 그렇죠. 제 얼굴은 알아보죠….”
도진이 불현듯 눈을 빛냈다.
“저 좋은 생각났어요. 만약 사람들이 저 알아보면 대지구 우주진리교를 설파하는 거예요. 영금서 내놓으라고 하면, 아아, 퇴마 영상의 출연자도 어쩔 수 없는 사이비였구나… 하고 실망해서 돌아갈 게 분명해요.”
“내 생각에 이들은 가진 돈을 전부 털어서라도 우주진리교에 가입하려고 할 거야. 사이비라고 생각 안 할 테니까.”
“아하….”
납득한 도진이 은신술을 펼쳤다. 도진은 이리 앞에서 둔갑술 펼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 눈부신 겉모습으로 이리의 심미안이 드높아졌으니까. 이리에게 조금이라도 흠결 있는 외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끼웅?
몸도 커다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자 끼웅이가 펄쩍 뛰며 놀랐다. 이리에게는 도진의 은신술이 통하지 않았지만, 끼웅이에게는 너무 잘 통했다.
“조심해야지.”
어깨에서 떨어질 뻔한 끼웅이를 이리가 받아서 패딩의 주머니 안으로 넣어 줬다. 끼웅이는 주머니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계속 끼웅, 끼웅? 하며 두리번거렸다. 이리와 도진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아, 이때 딱콩 먹이면서 놀려야 되는데. 은신술은 신체 접촉하면 풀리니까 아쉽네요.”
“안 풀리는 은신술도 있긴 한데.”
“네? 진짜요? 알려 주세요! 왜 지금까지 안 알려 주셨어요!”
“네가 끼웅이 놀리는 데에 쓸까 봐.”
“안 놀릴게요. 꼭 알려 주세요. 약속이에요.”
“알았어.”
끼웅…?
급기야 혼잣말하는 이리 선인에 끼웅이의 갸웃거림은 더욱 각도가 커졌다. 이리는 끼웅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길을 나갔다.
폐가 앞은 진짜 잔치라도 여는 모양새였다.
텐트만 세 개에 한 곳에는 주홍빛 전구도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방금 전까지 먹은 듯한 컵라면과 소주, 과자 같은 게 보였다. 이곳은 취식 금지 구역인데.
‘○○ 왔다 감’ 낙서로 빼곡한 벽돌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담배꽁초들, 대문 앞에는 버려진 테이크아웃 컵들….
대문에 걸려 있는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출입 금지’라는 현수막이 무색했다.
모인 인원은 총 열다섯 명이었다. 10대부터 50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였는데, 촬영용 카메라를 든 외국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 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느라 이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작고 살집 있는 젊은 소년이었는데, 바로 게시글 작성자인 ‘광룡’이었다. 누군가 광룡을 손가락질했다.
“이봐. 네가 정말로 퇴마 영상의 출연자라면 증거를 보여! 말로만 지껄이지 말고 증명하란 말이야.”
“그래요. 언제까지 시간 끌 셈이야?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간다.”
“크크큭…….”
소년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더니 크큭, 크크큭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안 그래도 증명하기 위해 여러분을 불러 모았답니다.”
그러고는 품에서 부적을 꺼냈는데… 그 부적은 당연히 아무 힘도 없는 가짜 부적이었다.
소년이 부적에 두 손가락을 대고 흐아압! 기합을 줬다. 그 자세도 매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보는 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러나 표정은 한결같이 진지했다. “옴 급급 여율령 사바하”를 마지막으로 외친 소년이 부적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불길이 일더니 화르륵 타올랐다.
“아니?”
“저절로 불이!”
“세상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소년은 한껏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자아, 이제 증명이 좀 되었을지?”
“아, 아직이다. 종이를 불태우는 것쯤은 마술사들도 할 수 있다고. 우리 눈에 귀신을 직접 보여 주지 않는 한은 못 믿어!”
“맞아. 귀신을 보여 줘!”
“우리는 묘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귀신을 원한다!”
소년이 또다시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크큭 거리며 웃었다.
“피곤하게 만드는군요. 귀신은 이미 이 장소에 있습니다. 방금 그 부적은 묘기가 아니라 바로 강령술이었다는 사실… 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