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백이십이 번째 놈이 아니라 새보르미야.”
“똑같은 놈만 백이십이 개인데 이름 붙여서 뭐합니까? 그냥 다 ‘보름’이죠.”
“이 애는 달라. 얘는 다른 보름이들이랑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어. 아무튼 단지 안에 넣어 주고 나는 방에 들어갈 테니까 형만 아저씨도 얼른 나가서 아빠랑 사람들 도와줘.”
“알겠습니다. 꼭 다른 데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가셔야 해요!”
사실 아이와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는지라 남자가 급히 떠났다. 아이는 안도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다른 곳은 커다란 광 안이었다. 철문을 끼익 열고 들어가자 음산한 기운이 온몸을 서늘하게 건드려 왔다. 그러나 아이의 몸에 흐르는 가문의 핏줄에 음산한 기운은 금방 흩어졌다.
아이는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속을 익숙하다는 듯 돌아다녔다. 넓은 광의 대부분을 방울, 부채, 거울 등의 다양한 무구와 창과 검, 곤봉 같은 무기들이 차지했다.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으나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이가 찾는 항아리 단지는 광의 구석에 놓여 있었다.
어린애도 들어갈 법한 커다란 단지 근처에는 한뼘 길이의 그림자 잡귀들이 모여 있었다. 친구와 앞구르기 대결을 하거나, 다른 단지를 오르락내리락하거나, 엎어져 자거나….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잡귀들이 아이를 발견했다.
비우웅!
삐웅?
이우웅.
미웅웅.
“나한테 오지 마. 지금은 못 놀아 줘. 다들 단지에 들어가.”아이는 감싸 쥐고 있던 잡귀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다른 보름이들이랑 같이 놀고 있어. 공기랑 구슬도 넣어 줄게.”
히우웅….
“하루가 지나면 싸움이 끝날 거야. 그때 어른들 몰래 와서 뚜껑을 열어 줄게. 자, 다들 안에 들어가. 얼른!”
몇몇은 순순히 들어갔고, 몇몇은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갔다.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매에서 부채를 꺼냈다. 넝쿨 식물이 그려진 부채를 펼치고 주술을 외우자 부채에서부터 넝쿨 줄기가 뻗어 나와 도망치는 잡귀들을 옭아맸다.
삐웅삐웅! 끼웅! 미우웅!
“미안. 너희를 위해서야.”
아이가 싫다고 도리질 치는 잡귀들을 하나하나 단지에 넣었다. 마지막에는 아이에게 달라붙어 있던 백이십이 번째 잡귀만 남았다.
“너도 들어가야지.”
…….
“내가 강제로 넣어?”
…히웅.
잡귀는 타박타박 힘없이 걷더니 단지 앞에서 폴짝 뛰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단지 안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잡귀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공기와 구슬 같은 것들을 넣어 주고는 뚜껑을 닫았다.
배리모스의 시야이므로 뚜껑이 닫히자 어둠이 찾아왔다. 잡귀들은 익숙한 어둠 속에서 각자의 일을 했다. 어떤 잡귀는 자고, 어떤 잡귀는 공기놀이를 하고, 어떤 잡귀는 구슬을 갖고 놀고.
잡귀들이 같이 놀자고 다가왔지만 배리모스는 거절했다. 그저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뚜껑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리는 이 잡귀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오랜 옛날, 퇴마사 가문은 사역마를 대량 생산했다.
사역마는 만들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재료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퇴마사의 선천적인 재능까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월쯤 되는 가문에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이 사역마들은 만월 가문이 다른 가문과 전투 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지금은 끼웅이처럼 귀여운 그림자 잡귀 암인들이지만, 추후에 퇴마사가 정식으로 종속 절차를 밟으면 지금 같은 자유 의지를 잃어버리고 가문의 핏줄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
그전까지는 주술의 재료로 쓰거나, 주술을 시험할 때 사용한다. 지금은 2/3가량이지만 아마 처음에는 이 단지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소멸할 때까지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는 게 사역마의 삶이었다.
유달리 총명하게 태어난 백이십이 번째 암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삐이웅.
키웅.
찌이잉.
시간이 흘러도 뚜껑이 열리지 않자 잡귀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서로를 밟고 올라가 낑낑거리며 뚜껑을 열려고 해도 안쪽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었다. 배리모스도 그 사실을 알기에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뚜껑이 열리고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지쳐 쓰러져 있던 잡귀들이 허겁지겁 일어나 밖으로 기어 나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어.”
항아리 뚜껑을 열어 준 이는 아연이라는 여자아이였다. 머리칼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찢어진 옷 군데군데 튄 핏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배리모스가 아연의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있잖아…. 큰오빠가 많이 다쳤어. 그래서… 정신이 없었어.”
히웅.
“의원 말로는 며칠 내로 죽을 거래. 그러면 우리 가문은 이제 끝이야. 나는 퇴마사가 아니니까… 나는 무당이라서 저들에게 맞설 힘이 없으니까….”
히우웅.
“위로해 주는 거야? 고마워.”
퇴마사와 무당은 언뜻 비슷해 보이나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퇴마사가 추구하는 것은 말살. 무당이 추구하는 것은 화합.
만월 가문은 화합 따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멸절과 말살만을 바라본다.
이러한 가문에서 퇴마사 자질이 없는 아연은 바로 위의 오빠와 함께 버려진 아이처럼 지냈다. 삼 남매 중 퇴마사 자질을 물려받은 장남만이 직계 후손으로서 대우받으며 지냈다. 지금 와서는 아연과 작은 오빠를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둘 중 하나라도 퇴마사의 피를 물려받았다면 상황은 이것보단 나았으리라고.
“나랑 오빠 잘못이 아니야. 어른들은 그동안 너무나 오만했어. 퇴마사가 필요 없어진 지금 그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고 있어….”
…….
“광리 가문에서 곧 공격해 올 거라고 어른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어. 광리 가문이랑 연주 가문이 손을 잡았대. 우리를 말살시키려고….”
…….
“우린 아마 멸문하겠지. 멸문해야 해. 보름아, 나는 이런 곳은 멸문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연이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고 있는 아이들을 끌어모았다.
“다들 항아리 안에 들어가.”
키웅! 이우웅! 미웅!
당연히 반발이 심했다. 아연은 어린 사역마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가두려는 게 아니야. 이제 이사 갈 거야. 너희는 집안의 결계를 빠져나가지 못하니까 내가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단 말이야.”
히우웅?
“그래, 이사. 뚜껑을 이만큼 열어 놓을게. 걱정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지금 몰래 나와서 한시가 급해.”
배리모스가 가장 먼저 일어나 단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자 다른 잡귀들도 하나둘 따라 들어갔다. 아연은 주술로 항아리의 무게를 줄인 후 약속한 대로 뚜껑을 반만 닫은 채 끌어안았다. 무게를 줄였다고 해도 어린아이에게 부담되는 무게였다. 그러나 아연은 연약한 팔로 힘겹게 안아 든 채 광을 나왔다.
바깥은 어두운 밤이었고, 유난히 달이 밝았다. 옛날 같았으면 뱃놀이를 즐겼을 날이지만 지금 어른들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아연은 사역마들이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소비되기 전에 대피시켜야만 했다.
궁궐 같은 기와집에서 사람들을 피해 가며 이동하던 중 오른쪽에서 돌아 나오던 사람과 딱 마주쳤다.
“아연 아씨?”
“혀, 형만 아저씨….”
아연이 항아리를 든 채 뒤로 물러나다가 남자의 뒤쪽에서 움직임을 발견했다.
형만 아저씨의 아내와 두 아이였다. 이제 보니 형만 아저씨는 등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었다.
“아씨….”
“…….”
“미안…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지켜야 할 가족이….”
한형만은 만월 가문에 종속된 외부 퇴마사로, 부모의 부모 때부터 만월 가문과 함께 일해 왔기 때문에 일종의 방계로 대우받고 있었다. 두 아이 중 이제 다섯 살이 된 큰 아이는 퇴마사 재능이 무척 뛰어났다. 원래대로였다면 순조롭게 아버지의 역할을 물려받았을 터였다.
현재 만월 가문은 일생일대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
만월 가문의 가주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가 전멸하더라도, 저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아연은 아까 잡귀들에게 보인 그 미소를 그대로 한형만의 가족에게 보였다.
“알았어. 얼른 가, 아저씨. 우리 집 사람들이 쫓아오기 전에 빨리.”
“아씨….”
“빨리 가라니까.”
“차라리, 지금 우리와 함께 가죠.”
“그래요, 아연 아씨. 이제 여기 남아서 뭐합니까? 이런 말 미안하지만, 아씨의 부모님은 아씨가 다치든 죽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와 함께 가서 평범한 나무꾼 가족으로 살아요. 우리 아이들이 아씨를 잘 따르고, 아씨도 우리 아이들을 아꼈잖아요.”
한형만의 부인이 간절하게 말했다. 아연은 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연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 일이 있어. 이러다가 들키겠어. 얼른 가.”
실제로 사람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한형만 일가족은 아연을 더 설득하지 못하고 떠났다.
아연은 아랫입술을 질끈 문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반쯤 열린 공간으로 배리모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히우웅. 히웅.
저자들을 따라갔어야 했다는 말이었다.
“한형만 아저씨도 결국은 퇴마사야. 나무꾼으로 살다가도 결국 언젠가는 위아를 해치는 일을 하게 되겠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야.”
무거운 항아리를 든 팔이 저릿저릿했다. 계속 주술을 사용 중이라 점점 기운도 없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목표한 곳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은 만월 가문의 결계 바깥,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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