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86화 (186/203)

186화.

“이해자 님도, 학문가 님도 스승님이 위험한 도술을 펼쳤다는 걸 나중에야 알면 서운하실 거라고요. 그러니까 미리 말씀드려요. 저는 사실 그 사람들이 서운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만약 배리모스와 결전을 벌이게 되면 쪽수는 많은 게 좋을 테니까요.”

“……알았어.”

결국 이리가 항복을 선언했다. 단챗방에 얘기하니 이해자와 학문가는 대번에 전화를 해 왔다.

“제가 설명할게요.”

이리의 핸드폰을 당연한 듯 가져간 도진이 약사와 눈빛을 나눴다. 둘은 병실을 나가 복도에서 통화했다. 이리가 살짝 청력을 높여서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무방비가 될 육신을 지켜야 한다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진과 한수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저기… 선인님…. 정말 위험한 일 같은데 저희 때문에…. 감사합니다.”

“애들이 나를 좀 과보호하네…. 너희는 신경 쓰지 마. 몸은 좀 괜찮아졌어?”

“예. 약사 신령님께서 이마에 손을 잠시 갖다 대시니까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신령님은 모두 그런 능력을 갖고 있나요?”

“아주 드물어. 특히 약사처럼 강한 치유 능력은….”

“저희가 수련한다면 비슷한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한수는 무리지만 너는 가능할 거야. 꽤 오래 수련해야 하겠지만.”

“얼마나 오래요?”

“천 년 정도.”

“…….”

아진이 눈을 깜빡였다. 이 선인님이 내게 농담을 건네신 건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끼우웅.

그때 이석진을 관찰하고 있던 끼웅이가 한수에게 도도도 달려와 소맷자락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뭐 때문인가 했더니 소매를 평탄하게 펼친 후 그 위에 엎드려 누워서 낮잠을 청했다.

“아… 아, 끼, 끼웅아…. 부, 불편한데.”

끼웅.

엉거주춤 어정쩡한 자세로 한수가 쩔쩔맸지만 끼웅이는 오히려 뒹구르르 등을 돌려 버렸다. 아진이 풋, 짧게 웃었다. 이리도 미소를 걸쳤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내일모레 있을 의식제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들 당연한 듯 입을 모아 한목소리로 ‘선인님 위험해요!’를 외치는 상황.

이리는 이런 상황에서 ‘다들 왜 이러지. 나는 안 위험한데 답답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네 명이나 같은 주장을 한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도진과 신령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낄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방비를 해 놓아야겠지.’

이리는 아진과 한수를 바라봤다. 그 방비는 당연히 이 둘만 할 수 있으므로.

* * *

이틀 후 수요일, 해 질 무렵.

이해자와 약사, 학문가 그리고 한수와 아진까지. 모두 모인 가운데 이리가 잠든 의식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도술, 의식제인의 준비를 마쳤다.

이리는 도진에게서 하얀 빛깔의 향낭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검은 팔찌는 도진에게 맡겼다.

“도진아, 내 팔찌는 네가 맡고 있어. 잘 지켜 줘. 하나밖에 없는 이물이니까.”

“스승님이나 제 스승님 잘 지켜 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스승님이니까요….”

이리는 도진을 안심시키듯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줬다.

이리 선인쯤 되면 허황한 손동작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단지 팔을 뻗는 것만으로도 이석진의 의식이 열리고, 안개처럼 흐릿한 빛깔의 자그마한 구슬이 떠올랐다.

이리가 그 구슬을 건드리자 복잡한 선으로 이루어진 구조가 순식간에 뻗어 나와 병실을 가득 메웠다. 뉴런 구조나 우주 필라멘트 구조처럼 보이는 이것이 바로 이석진의 의식이었다.

이리는 결계를 만들어 그 안으로 의식을 압축해 집어넣고 허공에 띄웠다.

“그럼, 다녀올게.”

인사를 남긴 이리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기다리고 있던 도진이 가볍게 안았다. 동시에 이석진의 회색 구슬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작됐군.”

약사가 중얼거렸다. 저 안에서 이리가 어떤 광경을 마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약사가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았다. 학문가는 노트북을 펼쳤고, 이해자는 배우자와 메시지를 보냈다. 끼웅이는 불안한 듯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는데 그 심정을 이해하는지라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야, 김도진. 너 지금 뭐하냐?”

그때 문득 이해자가 세상에서 가장 싸늘한 목소리로 도진을 불렀다. 끼웅이가 깜짝 놀라며 긴장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이리 선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싸움?

“좋은 말 할 때 선인님 어깨랑 팔뚝이랑 허리 그만 주물럭거리고 앉혀 드려라. 우리 셋이 함께 덤비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걸.”

“무사할걸요.”

“주무를 손 하나 정도는 절단 낼 수 있거든?”

“쳇.”

도진이 미리 방석과 쿠션을 깔아 둔 소파에 이리를 조심스레 앉혔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계속 이리의 머리칼이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정도로는 신령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끼웅이는 이리의 손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고 다들 조금씩 자세가 방만해졌을 때 도진이 작은 손짓으로 허공에서 팔찌를 꺼냈다. 이리의 까만 실 팔찌를 이렇게 자세히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얇은 끈을 여러 겹의 검은색 실이 감싸고 있는 단순한 형태였다.

‘선인님의 팔찌는 매우 특별한 이물이야. 잘 생각해 보렴. 봉인이라는 특성을.’

팔찌를 언제, 어떤 핑계로 들여다보나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겼다. 이게 바로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운명인 걸까. 도진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 * *

퇴마사는 몰락하고 있다.

아니, 몰락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진현계와 하계의 전쟁… 사실상 이리 선인의 일방적인 학살로 마무리되었던 ‘하루전쟁’ 이후 하계의 족속들은 대거 중간계를 떠났다. 현재 남은 하계 존재들은 선인들이 무서워 인간은 괴롭히지 않는 겁쟁이들뿐이다. 그들은 짐승과 초목 혹은 같은 위아들만 사소하게 괴롭히며 살아가고 있다.

악마가 사라진 시대에 악마를 붙잡으며 살아갔던 사람들은 뭘 해야 할까?

만약 퇴마사 가문이 어느 곳 하나라도 평소에 인간들에게 친절했다면….

‘제발 도와주시오. 우리 딸이 구렁이에게 잡혀갔소!’

절박한 외침에 금품을 먼저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할 일을 제쳐 두고 뛰어나갔다면.

‘당신네들이 세운 요괴 덫 때문에 산에 오를 수가 없소. 치워 주시오.’

나무꾼들의 부탁에 저주로 대응하는 게 아니라 덫을 수거했다면.

‘우리 아버님이 귀신이 되신 건 한을 품었기 때문이오. 퇴치가 아니라 넋을 달래 주고 싶소.’

눈물 어린 청을 무시하지 않고 한 맺힌 혼령을 잘 달래 주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정 많은 사람들은 분명 퇴마사의 몰락을 안쓰럽게 여기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퇴마사의 주술은 악신 퇴치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도움되는 종류가 많으니까.

논밭에 비를 뿌려 줄 수도 있고, 물길을 새로 낼 수도 있고, 강을 건너게 할 수도 있고, 산을 날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퇴마사의 행패에 당해 온 인간들은 그런 유익한 도움을 거절했다. 하계 족속들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당신들에게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치가 떨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퇴마사는 빠르게 몰락했다.

가장 많을 때는 백 곳이 넘었던 퇴마사 가문은 이제 단 세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이 평소에 백성을 잘 도와줘서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말처럼 과거에 이룩한 부 덕분에 간신히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살아남은, 그리고 죽어 가는 세 가문은 그들끼리도 힘을 합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두 가문을 멸문시키고 이 땅의 모든 위아 관련 일을 독점하겠다는 어두운 탐욕만 품을 뿐이었다.

서로 영역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민가의 피해를 다수 발생시켰다. 퇴마사에 대한 악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중 한 가문이 바로 만월 가문이었다.

인간이고 위아고 할 것 없이 악명이 자자한 만월 가문은 아직 살아남아 퇴마의 독점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시절이 있었지….’

이리는 만월 가문의 뒷마당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이 시야는 ‘배리모스’의 시야임을 알았다.

배리모스는 돌바닥에 주저앉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시선보다 아주 낮은 높이였다.

아이의 시선보다도, 동물의 시선보다도….

한뼘 남짓한 그림자 잡귀의 시야 높이와 비슷했다.

“보름아, 새보름…!”

바쁘게 움직이는 가솔들 사이에서 어떤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잡귀가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갔다.

곧 갈색 곱슬머리를 어깨선 아래까지 기른 소녀가 나타났다. 열 살 남짓으로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새보르미.”

아이는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고 잡귀가 그 위에 영차영차 올라탔다. 아이가 잡귀를 소중히 감싸 쥐었고, 잡귀는 아이의 손가락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친애를 표현했다.

“지금 연주 가문이 우리를 공격 중이래. 결계는 튼튼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피해 있자.”

히웅.

“들어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그곳이 제일 안전해.”

아이는 잡귀를 감싼 채 총총총 뛰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가솔 중 하나가 아이를 발견했다.

“아연 아씨, 어디 가세요? 안에 들어가 계시라니까.”

“새보르미만 데려다주고 들어갈게.”

“잡귀 녀석들 또 단지를 나와서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었단 말입니까?”

“애들도 안에만 있기 답답했겠지. 혼내지 마.”

“손 안에 그 녀석이에요? 봐 봐요.”

거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다가왔다. 아연이라고 불린 아이는 손을 뒤로 숨겼지만, 이미 남자는 손가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그림자를 본 후였다.

“이 녀석, 백이십이 번째 놈이죠? 가장 마지막에 만든 놈이 계속 단지 탈출해서 집안 빨빨빨 기어 다닌다고 하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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