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박씨부인과 헤어지고, 산후조리원으로 돌아와 바리공주에게 연락했다. 마침 씨앗을 심는 중이라 시간이 걸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둘은 은신술을 사용한 채 산후조리원의 옥외정원을 산책했다.
“스승님.”
“응.”
“저는… 왕이 될 준비를 너무 안 하고 있는 걸까요?”
이리가 걸음을 멈췄다.
“홍연이 신경 쓰여?”
“홍연도 홍연이지만… 그냥 제가 왕이 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들어요. 너무 천하태평이랄까. 제가 생각해도 좀 진지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이리가 어린애의 귀여운 고민이라도 들은 듯 웃었다.
“너는 워낙 자기애가 넘쳐서 이런 고민 안 할 줄 알았는데.”
“스승님, 저는 몸도 마음도 성장 중이에요. 자기 발전을 이룰 줄 안다고요.”
“그거 정말 놀랍구나.”
“아, 진짜.”
도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리는 제자가 삐지기 전에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한 번도 왕이 되어 본 적 없기 때문에 왕이 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몰라. 하지만 이건 확실해. 네 그런 고민이 너를 옳은 길로 이끌 거야. 왕이 되든, 되지 않든 옳은 길로.”
“옳은 길…….”
도진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스승님은 제가 왕이 되기를 원하시잖아요. 그건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죠?”
“응, 네 재능은 정말 뛰어나니까. 앞으로 수백 년만 있으면 세상에 널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리 선인이 생각하는 진현계 왕의 자질은 ‘무력’이란 뜻이었다.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진현계는 하계와의 대척점에 있으니까.
그리고 이리는 싸움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누군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이가 왕위에 올라야 싸움이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네 성장은 내 예상을 뛰어넘어. 아마 나도 언젠간 너와 대련할 때면 팔찌를 벗어야 할걸.”
도진이 눈을 끔뻑이다가 푸스스 웃었다.
“에이, 설마요. 저 기분 좋게 만드시려고 과장하시는 거죠.”
“너도 알겠지만 나는 거짓말을 못 한단다.”
“…….”
“혹시 모르지. 언젠간 네가 날 제압해서 무릎 꿇릴지도….”
“스승님.”
도진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끼웅이가 분위기를 살피다 주머니 안에 숨었다.
도진은 이리의 동그란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스승님을 영원히 못 이겨요. 제자는 스승에게 절대로 위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스승님이 제게 칼을 휘둘러도 저는 스승님을 끌어안고 칼에 맞을 거라고요. 무릎을 꿇린다니 절대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아요.”
이를 빠드득 갈며 내뱉는 말은 사무칠 만큼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절절한 감정에 이리는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심했다. 아무리 감정에 문제가 있다고 한들 도진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알면서….
“네 말이 맞아. 너는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겠지. 미안….”
“…미안하시면 끌어안아 주세요.”
“…….”
“얼른요. 저 삐지기 일보 직전. 완전 긴급 상황.”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제자에 이리는 옅게 웃고는, 크고 튼튼한 몸을 끌어안았다.
잠시 후 바리공주가 잠수복 차림으로 훨훨 날아 옥외정원에 착지함으로써 산책이 끝났다.
바리공주가 아기에게 혼을 집어넣고, 복배바리가 감사 인사를 하고, 대여점에 돌아와 일을 마무리하고….
“안녕히 주무세요, 스승님.”
“응. 잘자.”
“굿나잇 키스.”
쿵.
이리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도진은 배시시 웃으며 침대로 풀썩 뛰어들었다. 스승님과 손깍지도 하고 포옹도 한 뜻깊은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새벽부터 밤까지의 이리의 모습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헤벌레하던 도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너는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겠지.’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어느 문장이 떠오른 탓이었다.
너는 언젠가 네 스승을 배신한다.
그럼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두 번째 줄 때문에 잊고 있었던 ‘백지’의 첫 번째 줄.
너는 언젠가 네 스승을 배신한다.
세상에.
어떻게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지?
이놈의 대책 없는 성격 때문에 두 번째 줄의 결론만 보고 가장 중요한 걸 까먹고 말았다.
으아아아.
도진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머리를 감쌌다.
‘왕의 자격’ 따위 민들레 홀씨처럼 날려 버릴 거대한 고민의 풍랑이 도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31. 배리모스
이석진이 입원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는 열흘 동안 눈을 뜬 적도, 손가락 한번 움직인 적도 없었다. 원장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기에 의료진은 아예 특실에 방문하지 않았고, 대신 이석진의 건강을 진료하는 이는 바로 약사 신령이었다. 가끔 의료인들이 이 수술이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그 대상이 직접 이석진의 진맥을 짚었다.
“확실히 육신 문제는 아니네요. 멀쩡해요. 육신만 따지면 입원하기 전보다 더 건강해졌을 겁니다. 역시 배리모스가 의식을 붙잡고 있나 봅니다.”
“으음…. 저쪽 두 명도 진찰 부탁해.”
이리가 가리킨 방향에는 누가 봐도 위중한 상태인 아진과 한수가 있었다.
“저, 저는 괘, 괜찮…. 아진이만, 봐, 봐 주세요.”
“오빠. 그냥 얌전히 진찰받자. 부탁드립니다, 신령님.”
“내 진찰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선인님께 감사 인사드리거라.”
약사가 둘의 건강을 봐 주기 위해 일어나자 도진이 냉큼 빈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끼웅이가 가까워지자마자 이석진의 침대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끼우웅.
새액새액 죽은 듯 잠든 이석진을 소매를 흔들었지만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배리모스도 저 안에서 많이 약해졌을 텐데 거참 끈질기네요.”
“그 반대야. 약해진 게 아니라 더 강해졌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깊숙한 의식 저편에서 태고의 힘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아, 그런 겁니까? 그럼 열심히 방해할 걸 그랬네요. 귀에 대고 꽹과리도 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도진의 비아냥에 이리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눈매가 매서웠고 눈빛도 차가웠다. 이리는 그 이유를 알았다.
열흘이 지나도 이석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의식제인’을 실행하기로 했다. 의식제인이란 상대의 의식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도술을 말한다.
더 강해진 배리모스가 붙잡고 있는 의식. 그건 즉 이석진의 의식이 아니라 배리모스의 의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리가 웬만해서는 위험한 상황에 놓일 일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도진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적군 한가운데에 쳐들어간다고 하니 걱정되는 것이다.
“스승님, 어떻게 저도 함께 들어갈 방법 없어요? 민폐 안 끼칠게요. 말 잘 들으면서 열심히 보조할게요.”
“나 혼자 들어가서 이석진을 꺼내 오는 게 훨씬 빨라. 너와 같이 가면 속도만 늦어질 뿐이야.”
“하지만… 걱정됩니다. 이 새끼가 태고의 선인의 힘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데. 스승님은 태고의 선인과 싸워 본 적이 없다면서요.”
정확히는 ‘싸운 기억은 없다’였다.
“만약 스승님보다 강하면…. 그 무덤의 주인이 스승님보다 강했으면 어떡해요? 스승님은 정말 강한 분이지만, 태고의 선인 중에서는 막내였잖아요.”
“무덤에 남긴 기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그리고 막내였다는 게 제일 약했다는 뜻은 아니야.”
선인의 능력을 단순히 강하다/약하다로 나누는 건 상당한 왜곡이었으나 도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돌려 말했다. 이런 노력에도 도진은 여전히 불퉁하고도 매서운 표정이었다.
“왜 스승님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위험하지 않다니까….”
“이번은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겠죠.”
도진이 주먹을 힘주어 쥐며 말했다.
“제가 더 강해져야 해요. 그래야 스승님 혼자 위험에 처하는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위험하지 않다고….”
이리로서는 산책 가는 기분인데 도진이 심각해지니 퍽 민망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소 장군과 대결을 한다든가, 지리산 산신령의 과업을 한다든가, 마경에 다녀온다든가 등 위험한 일을 해 온 건 오히려 도진이었다. 자기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위험하다는 자각도 없더니 이리에게는 한없이 예민해졌다.
“너무 불안해요, 스승님. 제자를 꼭 끌어안아서 토닥여 주세요.”
“…….”
다 연기였나…? 제자의 계략이 갈수록 교묘해져서 이제는 이리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한수와 아진의 진찰을 끝낸 약사가 물었다.
“선인님, 의식제인은 언제 하실 겁니까? 오늘은 아니죠?”
“내일모레, 수요일에 할 생각이야. 그때 되면 또 와 줘야겠어.”
“선인님의 부름이라면 언제든지 오겠습니다만, 모레는 이해자랑 학문가도 부르죠.”
“굳이 왜?”
“굳이, 왜? 굳이 왜라고요? 태고의 힘을 손에 넣은 악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면서 굳이 왜라고요?”
“약사 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스승님한테 큰소리치지 마세요.”
도진은 여전히 걱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말했다.
“스승님, 만약 이해자 신령님이 저승의 불지옥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안 되지. 너무 위험해. 지옥의 염화는 선인도 빠져나가기 어려워.”
“제 말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스승님은 나중에 한참 후에야 알게 되는 거죠. ‘그때 이해자가 불지옥에 갔다가 빠져나왔었죠.’하고 누군가 얘기하고 나서야 말입니다. 그럼 서운하겠죠?”
“솔직히 서운하지는 않고 조금 화는 날 것 같아.”
“그게 서운함이에요, 스승님.”
도진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감정을 깨우쳐 가는 어린애를 대하듯이 흐뭇해 보였다. 이리는 더더욱 민망해졌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