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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83화 (183/203)

183화.

“그쪽이 발산하는 열 때문에 폭포수가 따뜻해졌습니다. 주변의 풀이 시들고 있다고요.”

“내가 살아감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살면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가?”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은 하죠. 따뜻해진 폭포수 때문에 폭포수를 연료로 사용하는 혼탑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습니다. 혼탑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면 층 이동이 불가능한 곳이라 오전부터 혼탑의 업무가 마비되었고요.”

“안타까운 일이군. 한데 지금 이 폭포수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다.”

“제가 도술로 임시 조치 취했습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조치를 정식으로 취하면 되겠군. 나는 다시 자러 갈 테니 그대는 더는 날 괴롭히지 말라. 선인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도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떠는 게 당장이라도 불구렁이의 꼬리를 붙잡아 리본을 묶어 버릴 것 같았다. 이리가 얼른 불구렁이를 붙잡았다.

“왜 살던 곳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어? 기존에 살던 곳이 더 네게 안성맞춤이었을 텐데.”

불구렁이가 노란 동공을 좁혔다. 도진과 대화할 때는 당장이라도 돌아갈 것처럼 굴더니 이리 선인의 온화한 질문에는 순순히 답했다.

“나도 터전을 옮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워낙 시끄러워져서 더는 그곳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불구렁이는 청각이 아주 예민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왜 요즘 들어 시끄러워졌는데?”

불구렁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러운 녀석들이 와서….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으니 제가 나왔죠. 가 보시면 압니다.”

불구렁이는 원래 살던 곳의 위치를 알려 주고 다시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하. 뭔가 뺑뺑이 도는 기분인데… 일단 가요.”

“그래.”

도진과 이리는 이번에는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넓은 낙엽에 올라 바람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끼우웅…….

불구렁이와 대화하는 내내 주머니 속에 쏙 숨어 있던 끼웅이가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만끽했다. 이목구비가 없어도 평온한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만약 끼웅이가 용마였다면 [(❁´◡`❁)] 이런 표정을 내비게이션에 띄웠을 것 같았다.

“스승님, 이번에도 예상하는 바가 있으세요? 항상 아주 조금의 단서로도 사연을 짐작하시잖아요.”

“으음. 너는 짐작하는 게 있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마고 대모님 관련이라는 느낌은 와요.”

이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헤헤, 저 대견하죠? 칭찬으로 뽀뽀해 주세요.”

살짝 커졌던 눈이 삽시간에 줄어들어 가늘어졌다.

“등을 토닥여 달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면 나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해 줄 텐데 자꾸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칭찬을 요구하는구나….”

“언제까지 그런 어린애 같은 귀여운 접촉에 만족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어른입니다. 성인 남자라고요. 완전 불끈불끈한…. 욕망 덩어리. 욕망의 화신. 욕망장사. 욕망제자. 욕망도진. 그게 바로 접니다.”

“…왜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거야.”

“신체가 건강하다는 뜻이니 자랑스럽죠! 스승님, 우린 언제 연인이 될까요? 저는 언제 이 욕망을 해소할까요?”

도진이 이리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어찌나 붙었는지 이리의 저고리 앞주머니에 있던 끼웅이가 납작해질 정도였다. 이리가 끼웅이를 꺼내 어깨에 올려 주며 대답했다.

“글쎄. 나는 모르겠네.”

“스승님, 제 얼굴 좀 보세요.”

이리가 시선을 들어 도진과 눈을 마주쳤다. 붉은 기가 도는 눈에는 본인이 말한 대로 욕망이 가득했다.

“제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보세요.”

“…네가 못 참는다고 해도 어쩔 건데. 나는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널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 수 있단다.”

“헉, 너무 야해요….”

“이게 대체 어떤 점에서 야해?”

“정말 궁금하세요? 어떤 부분이 야한지, 무엇이 연상돼서 야한지 다 말씀드려요? 스승님, 자꾸 화제를 이런 쪽으로 몰고 가실래요?”

“애초에 먼저 얘기 꺼낸 건 너잖아.”

“그 정도 수위는 아니었는데. 수위를 높인 사람은 스승님이에요.”

“아니야. 비슷한 수위였어….”

“노노. 저는 애들 수준. 스승님은 완전 성인용.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니. 얼마나 절 애태우실지 너무 기대됩니다.”

이리는 지금이라도 끼웅이 귀를 막을까 고민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일단 15세용 스킨십이라도 해요. 이 정도는 괜찮죠?”

도진이 이리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 정성 들여 손깍지를 끼는 동안 이리는 가만히 있었다. 도진도, 이리도 상대의 손이 따끈따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불구렁이가 살던 곳은 하늘꽃밭 최동단에 있는 동굴이었다.

하늘꽃밭은 말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곳이다. 이 하늘은 하늘꽃밭에서는 오색하늘이라 부르고, 율도국에서는 오색바다라고 부른다. 하늘인 동시에 바다이기 때문에 허공에서 오색 빛깔의 물을 콸콸 쏟아 내는 것이다.

하늘꽃밭은 전체 면적의 80%가 꽃밭이고, 이 꽃밭은 혼꽃들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거주가 불가능하다. 하늘꽃밭 거주민들은 나머지 20%에 모여 살고 있는데, 바로 이 오색하늘과 맞닿은 천변(天邊)이다.

도진과 이리는 불구렁이 동굴로 향하면서 아기자기한 마을을 지나쳤다.

같은 오색바다를 공유하는 율도국은 위아가 거의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인간과 위아, 짐승과 혼령 등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 불고양이와 꼬리잡기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 잔챙이들한테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따다 주는 어른들, 힘을 합쳐 오색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위아와 인간들.

정신없이 구경하는 도진을 보며 이리가 웃었다.

“왜 하늘꽃밭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는지 이유를 알겠지?”

“네…….”

진현계와 천지천해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승과 극락은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고. 중간계에서는 인간이 위아의 존재를 알지 못하므로 더불어 산다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하늘꽃밭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리 선인님이야!”

“이리 선인님!”

“옆에는 바로 그 김도진이구나.”

이리를 알아본 하늘꽃밭인들이 몰려들었다. 하나하나 인사를 해 주는 동안 끼웅이는 주머니에서 꽤 상체를 높이 내밀고 있었다. 하늘꽃밭인들은 불구렁이와 마주했을 때만큼 무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이 근처에 사는 불구렁이에 대해 알고 있어?”

“네, 압니다.”

주민들은 ‘불구렁이’ 단어를 듣자마자 아아, 하며 다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불지 말씀이시군요. 저쪽 동굴에 사는데 요즘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그렇게 투덜투덜하더니 결국 나간 모양이더라고요.”

“근데 뭐, 세간살이가 다 여기 있으니 다시 돌아오겠죠. 가출도 아니고 외출이에요.”

그 외출 때문에 혼탑에 큰일이 날 뻔했다, 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시끄럽다는 건지. 나는 파도 소리가 더 시끄럽더만.”

“그래? 나는 하도 시끄러워서 귀마개까지 샀는데.”

“솔직히 안쓰러움과는 별개로 시끄럽긴 해. 뭐라 말을 못 하겠으니 더 답답하지. 나는 불지 녀석 이해된다.”

“나도.”

“나도.”

“나는 모르겠어. 그 정도는 어른으로서 참아 줘야지.”

도진이 여기까지 듣고 이리를 바라보니 이리는 과연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도진으로서는 아직 연유가 짐작도 안 됐다. 대체 무슨 소리가 그렇게 시끄럽다는 건지, 어른은 왜 참아야 하는지….

“그나저나 선인님과 제자님, 식사 좀 하고 가시겠습니까? 맛있는 대게찜 해 드릴게요.”

“하늘꽃밭 대게찜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알지만 바빠서 가 봐야겠어. 불구렁이가 살던 동굴 위치만 알려 줘.”

주민들은 몹시 아쉬워하며 동굴까지 직접 안내했다.

동굴 근처에는 조류 형태의 잔챙이들이 많았다. 이리를 보고 뀨우뀨우, 삐이삐이 반갑다고 달려드는 잔챙이들을 마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손수 품에 안고 내려갔다.

“시끄러운 소리 같은 건 안 들리는데요.”

“일단 들어가자.”

끼우웅…….

동굴 안쪽에 진입하니 불구렁이의 열기가 남아 있어서 끼웅이가 다시 헥헥거렸다.

“피곤하게 만드네.”

도진이가 혀를 차며 얼음 조각들을 주머니 안으로 떨어뜨렸다.

구렁이가 비늘이 간지러울 때 긁는 스크래쳐, 허물을 건조해 주는 건조기, 주위 환경을 축축하게 만들어 주는 가습기 등 세간살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터를 둘러볼 때였다.

끄흐흐흐….

흐흐흐흐흐….

괴상한 소리가 동굴 벽을 진동시키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불구렁이와 마을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었다는 그 소리가 분명했다.

“동굴 밖인 것 같은데…. 스승님, 제가 찾을게요. 저만 따라오세요.”

“응.”

도진이 사뭇 진지한 자세로 앞에 나섰다. 불구렁이의 동굴이 있는 벼랑은 여러 동굴살이 위아들이 함께 사는 집터인지라 크고 작은 동굴이 많았다.

“어후, 진짜 못 살겠어. 귀신이야, 뭐야.”

“하루 이틀이어야 참지. 소음 보상금이라도 주든가. 어휴.”

쾅, 과앙! 쾅!

동굴에 사는 위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동굴 문을 쾅, 쾅 닫았다.

흐으으으으.

어으으으.

“저기군요!”

괴이한 소리는 절벽의 구석에 있는 동굴에서 나오고 있었다. 도진이 훌쩍 먼저 내려선 후 바로 뒤따라오는 이리에게 에스코트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는 도진이 귀여워서 손을 살포시 얹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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