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사실 대모님께서 진현계 임금님의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거든요. 저번 주에 연락이 와서 며칠간 급히 일 마무리하고 진현계로 가셨습니다. 정식 일정은 내일부터라 아직 연락 못 받으셨을 겁니다.”
“으음….”
“역시, 예상하셨군요. 진현계 임금님께서 대모님을 콕 찍으셨다고 들었어요. 본래 친구 사이이기도 했으니….”
“아주 친한 사이였지.”
“대모님도 웬만하면 거절하셨을 텐데 망설이지 않고 수락하시더라고요. 그 덕분에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던데. 아, 걱정하진 마세요. 우리 대모님께선 왕 자리에 저어어언혀 관심 없으십니다. 임시라서 가신 겁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해.”
도진이 음료를 가지고 왔다. 바리공주와 이리에게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자기는 핫초코, 그리고 끼웅이용으로 따뜻한 고구마라떼였다.
끼우웅, 끼웅!
“알았어, 이놈아.”
도진이 늘 가지고 다니는 끼웅이용 찻잔에 고구마라떼를 따르며 물었다.
“대화 나누시는 거 들었는데, 마고할미 님이 대리청정 중이시면 하늘꽃밭이 엄청 바쁘긴 하겠네요. 거긴 고위 관리자가 극도로 적은 곳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그런데 ‘마고할미 님’이라니. 정말 재미있는 호칭이구나.”
바리공주의 반응에 어리둥절하던 도진은 곧 깨달았다.
“대모님! 아, 맞다. 보통 위아들은 그분을 대모님이라고 부른다고 했죠.”
“알고 있구나.”
“스승님한테 들었습니다. 어른에게는 냉철하고 매섭게 대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따스해진다고. 그래서 애들이나 어른이나 대모님이라고 부른다고요.”
“그래, 맞다. 하늘꽃밭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지.”
“그리고 또 스승님 말씀으로는 위아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분이라던데.”
“내 스승님이시니 당장 그렇다고 허세를 부리고 싶지만, 사실 위아들이 가장 신뢰하는 분은 네 스승님이다.”
“네? 그건 당연합니다. 너무 당연해서 카운트 안 한 거였는데요. 0순위 같은 느낌으로.”
“…….”
바리공주의 ‘역시 쥐어박을까?’ 하는 듯한 눈빛에 이리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제 아기의 혼은 어떻게 할 거야?”
“아, 하늘꽃밭에 가서 직접 가져와야 합니다. 선인님, 죄송하지만 내일까지 아기를 지켜 주시겠습니까? 당장 출발해도 왕복 스무 시간이라….”
도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두 어른이 저를 쳐다보자 도진이 질문을 던졌다.
“왜 왕복 스무 시간이나 걸려요? 바리공주 님도 우리 스승님처럼 칠계 전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우선 칠계가 아니라 육계다. 하계는 금지 구역이지. 또한 자유롭게 통행한다고는 해도 이리 선인님처럼 ‘통로’라는 신묘한 능력이 없거든. 하늘꽃밭은 출입국장을 통해서 이동해야 한다.”
“그럼 보부상 형은요? 그 형은 ‘통로’도 없으면서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던데.”
보부상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는 바리공주가 그 역시 궁금한지 이리를 바라봤다.
“보부상은 특정 위치 좌표를 설정해 놓으면 그 위치로 이동시켜 주는 이물을 사용하고 있어. 좌표는 세 군데 설정할 수 있는데 아마 임금님의 궁궐과 극락의 도자기숍, 그리고 출입국장을 해 놓았을 거야.”
“게임에 나오는 워프 포인트 같은 거군요. 역시 세상은 아이템이 중요해요. 물론 가장 최고는 아이템 없이도 세계원탑인 스승님이지만.”
“바리, 아기의 혼이 하루나 비어 있으면 나중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니 괜찮다면 내가 가서 혼을 가져올게.”
“선인님이 직접 말입니까?”
“응, 괜찮다면.”
“당연히 괜찮지요! 오히려 저희 쪽에서 감사한 일인걸요!”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스무 시간을 허비할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던 바리공주는 이리의 제안을 굉장히 반가워했다.
“일단 이거 받으세요.”
당장 배낭의 옆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자 도진이 받았다. 옛날 암행어사의 마패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조각된 것은 말이 아니라 꽃이었다.
“이게 뭐예요?”
“나는 선인님께 드렸다만.”
“스승님과 저는 한 몸입니다. 제가 받으면 스승님이 받은 거나 다름이 없어요.”
바리공주가 이리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봤다.
“선인님도 제자 때문에 고생이겠군요. 저와는 다른 의미로….”
“하하…. 이게 11층 출입증이야?”
“예, 정확히는 9층부터 11층 카드키입니다. 혼탑은 계단도 없고, 각 층마다 결계가 있어서 날아가지도 못하고,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야만 하거든요. 엘리베이터에 이 카드키를 대면 9층부터 11층까지 버튼이 활성화될 거예요.”
“하늘꽃밭에 엘리베이터가 있었구나.”
“…선인님, 혼탑에 마지막으로 방문하신 게 언제세요?”
“삼천 년 전인가….”
“아이고야.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군요. 지금은 기억하시는 것과 상당히 다를 겁니다. 약도를 그려 드릴게요.”
바리공주는 아무래도 디지털과는 덜 친한 편인지 종이와 펜을 꺼냈다.
끼우웅!
펜 끝에 달린 포도송이 장식에 끼웅이가 관심을 보이자 주저 없이 포도를 뚝 떼어 내 가지고 놀라고 주고는 그림을 빠르게 그려갔다.
“혼탑은 지하, 지상 각각 13층으로 이루어진 탑입니다. 사무 공간은 지상 4층부터 6층까지고 나머지는 다 혼과 씨앗이 저장되어 있어요. 예전에는 씨앗은 지하, 혼은 지상으로 구분해서 나눴는데 요즘에는 심어질 개체의 종에 따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간 혼은 11층에 있으니 11층의 혼 중에서 3442번째 화분에 맺힌 혼을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씨앗과 혼이 한 층에 같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한 칸에 같이 있는 경우도 많으니 헷갈리는 심마니들이 종종 있더군.”
“아예 같은 보관함에 들어 있어도 안 헷갈릴 것 같은데. 씨앗이랑 혼은 생긴 게 완전 다르잖아요.”
“네가 말하는 씨앗과 완전히 다르게 생긴 혼은 빛덩어리를 말하는 거겠지? 그건 ‘헌 혼’이다. 이미 한 번 이상 윤회를 겪은 혼. 그러나 하늘꽃밭의 혼은 모두 ‘새 혼’이지.”
바리공주가 가소롭다는 듯 웃고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손톱만 한 작은 크기, 표면에는 굴곡이 있고 주름이 진 형태. 아몬드와 비슷하게 생긴 게 두 개가 나타났다.
“이 중에서 하나는 씨앗이고, 하나는 혼이다.”
“둘 다 씨앗이 아니라고요…?”
“잘 보면 왼쪽 씨앗에는 눈금이 있다. 오른쪽에는 눈금 대신 조그맣게 틈이 있고. 잘못 보고 혼이 아니라 씨앗을 가져오면 헛고생이야. 그러니 잘 구분하도록 해라. 옆에 선인님이 계시니 걱정은 없지만….”
바리의 말대로 자세히 보니 차이점이 있었다. 10초 정도 두 개를 자세히 들여다본 도진이 말했다.
“장사의 눈대중 무시하지 마세요. 차이점 완벽하게 파악했으니까.”
“호오, 그래?”
바리가 이번엔 허공에 아몬드를 수십 개 띄었다.
“구분해 보겠나?”
“하, 장사 무시하지 말라니까요.”
도진이 파바밧 빠르게 씨앗과 혼을 양쪽으로 나누었다. 10초도 안 돼서 모두 양분한 도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바리공주를 쳐다봤다. 바리공주의 눈은 커질대로 커졌고, 옆에서 이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바리공주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심마니들도 1년을 교육해야 겨우 구분하는데. 이렇게 빠르게 수십 개를 구분하다니….”
“후후. 저는 다르다니까요.”
겸손을 모르는 도진이 가슴을 새처럼 부풀렸다.
정말 대단한 일이라 바리공주는 뭔가 더 칭찬하려 했으나, 도진의 벌름벌름거리는 콧구멍을 보고 나니 칭찬이 쏙 들어갔다.
바쁜 바리공주는 설명을 마치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이리는 복배바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앗, 그럼 나도 하늘꽃밭에 가는 거냐? 신난다! 하늘꽃밭 경치가 그렇게 좋다는데 돗자리 깔고 도시락 먹으면 너무 기분 좋겠노라!”
“아니… 그.”
당연히 놓고 가려고 했던 이리가 당황하자 도진이 나섰다.
“너는 여기서 아기를 지켜야죠.”
“선인의 도술이 걸려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가족도 지켜야 하고. 아기의 이상을 감지한 부부가 어떤 슬픔에 빠질지 모르잖습니까?”
“평범한 인간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던데.”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부모잖아요. 부모는 가끔 초능력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우웅, 네 말이 맞다. 나는 여기서 아기와 부부를 지키겠노라. 선인과 김도진은 아기의 혼을 잘 데리고 오너라!”
도진 덕분에 위기를 무사히 넘긴 이리가 눈인사를 해 왔다. 도진은 바리공주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보다 더 가슴과 어깨를 부풀렸다. 터질 것 같았다.
이리가 곧장 통로를 열고, 도진은 드디어 하늘꽃밭에 발을 들였다.
“우와아아아.”
끼우우우웅!
“우와아아!”
끼우우웅!
하늘꽃밭에는 처음 와 보는 도진과 끼웅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감탄만 내뱉었다.
푸르른 하늘 아래 펼쳐진 넓은 꽃밭은 선명한 오색 빛깔이라기보다는 파스텔톤의 따뜻한 빛깔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아주 멀리에는 높은 산들이 산봉우리에 구름을 매달고 있었는데 마치 이 꽃밭을 지켜 주는 것 같았다.
꽃밭의 중앙에는 바리공주가 말한 탑이 있었다. 한 층이 5m는 될 법한 높이 솟은 탑은 석탑이기도 했고, 목탑이기도 했고, 또 현대식 빌딩이기도 했다. 어느 층은 탁 트인 발코니가 있는 목조 양식이고, 어느 층은 전면이 유리로 된 현대 양식이었다.
끼우웅, 끼우웅.
끼웅이가 도진의 정수리 위에 올라가 미어캣처럼 우뚝 서서 구경했다. 도진은 손가락으로 튕겨 버릴까 하다가 또 언제 여길 구경하겠나 싶어 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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