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80화 (180/203)

180화.

넷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운 남자에게 향했다. 도진이 허공에서 멋진 손동작으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신명초 약이다. 차처럼 달여 마시면 되고. 매일 한 잔씩만 먹여.”

“고마워.”

아진이 가벼운 주머니를 슬쩍 열자 찻잎 같은 것들이 있었다. 티 포트에 적당량을 붓고 돌아오니, 도진이 곤히 자는 이석진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몸 안에 남은 음기를 측정하는 과정이었다.

“도, 도진 씨. 어, 어, 어떤가요?”

“이석진은 음기 소굴에서 너무 오래 지냈어. 너조차 나흘 머무른 것만으로도 손가락 끝이 썩어 들어가서 고생했는데, 이석진은 열흘 넘게 그곳이 있었으니….”

“흐읍.”

“아니, 씨. 남자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말은 끝까지 듣고 울어! 이제 음기가 20% 남았으니까 다음 주에는 정신 차릴 거야. 너넨 그때까지 곧 저승사자 만날 것 같은 몰골이나 수습할 생각해.”

“흐읍.”

“이번엔 왜 또 울어?”

“아… 안도해서, 요. 흡.”

도진이 치를 떨었다. 도진과 한수는 정말이지  상극이었다.

“선인님…. 만약, 다음 주에도 오빠가 일어나지 않으면요?”

아진이 질문은 도진이 미덥지 않다기보다는 마음속의 불안감 때문에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마 아진이 듣고 싶은 말은 ‘만약은 없어. 이석진은 반드시 눈을 뜰 거야’ 겠지만…. 이리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최대한 돌려 말했다.

“약사가 손수 달인 산명초 차를 열심히 먹인다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눈을 뜰 거야.”

“…예외적인 경우요?”

“예, 예외적인 경우…?”

“스승님, 예외적인 경우라뇨?”

세 명이 동시에 물었다. 이리가 대답했다.

“배리모스가 일부러 이석진의 의식을 억누르고 있는 경우라든가.”

“하, 정말 끈질긴 놈이군요.”

도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경에서 배리모스 또한 약해졌다. 평소에는 이석진의 의식을 억누르고 자신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고작 억누르는 것에서 멈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끈질기게 이석진의 몸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원하는 바가 그만큼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 그, 그럼, 어떡해요? 배, 배리모스가, 서, 석진이를 놓, 아주지, 아, 않으면.”

“그 경우도 걱정하지 마. 다음 주에도 일어나지 않으면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깨우면 되니까.”

“누가 들어가는데요? 스승님이?”

“당연히 내가 들어가야지.”

“…위험한 건 아니죠?”

이리가 위험해질 일 없겠지만 도진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리가 가볍게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구구단 7단 가능한가요? 라는 질문이라도 받은 수학자처럼, 정말 터무니없는 질문을 받은 듯한 목소리여서 도진을 포함한 모두가 안심했다.

* * *

이석진 건과는 별개로 대여점의 일과는 계속되었다.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이아진

오늘도 변함이 없어요 의사 선생님은 이제 건강은 거의 회복했대요

한수

(사진) 찻잎 이 정도 양이면 되나요?

등의 연락이 오면 답장도 빼놓지 않았다. 답장하는 이가 도진이다 보니까

이런 식의 단문이었지만.

“스승님, 내일 마지막 상담이 6시네요. 끝나고 병원 가 볼까요?”

“그러자. 우리가 얼굴 보여야 둘도 안심할 테니까.”

그렇게 내일의 스케줄을 미리 정하고 다음 고객을 받았다.

고객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복배바리였는데, 맛 좋기로 소문난 대여점의 차도 마다할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했다. 그 때문에 열심히 차를 따르려던 끼웅이가 시무룩해졌다.

이름: 상쥬

종족: 복배바리

서식지: 송도 ○○ 아파트

연락처: 010-0000-0000

내용: 우리 집주인 아기가 울지 않노라

뭐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길래 이러나 싶어 상담실에 함께 앉은 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객님, 안타깝지만 대여점은 인간의 생로병사에는 관여하지 않거든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이리 선인이 관여해야만 하는 일이다.”

“아, 하여튼 인간이랑 가깝게 사는 것들은.”

“도진아, 일단 한번 들어보자. 상쥬, 얘기해.”

“고맙다, 이리 선인.”

상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주인 부부는 성실한 사람이다. 5년 전에 신혼부부 전형으로 아파트에 들어왔는데, 옆집과 위층, 아래층에 떡을 돌렸다. 무려 백설기였노라! 요즘엔 떡 돌리는 사람이 흔하지 않아서 온 아파트에 소문이 다 났다.”

물론 그 소문은 복배바리들한테 났을 터였다.

“그리고 우리 집주인 부부는 고양이한테 먹이를 주고, 새한테는 물을 주는 사람이다. 인도를 헤매는 지렁이가 보이면 화단에 옮겨다 주기도 하노라.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그 강아지도 우리를 잘 따른다. 이름은 초코다. 엄청 보고 싶을 테니 사진 보여 주겠다!”

갈색 푸들 사진을 보여준 상쥬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부부에게는 10개월 전 새 생명이 찾아왔다. 나는 그때 자고 있었는데 묘한 빛이 느껴지길래 깨어났더니 어떤 여자 사람이 부부에게 씨앗을 심고 있었노라. 나한테는 비밀이라며 눈을 찡긋하고 갔다.”

“바리공주네.”

“나도 알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바리공주라고 말해 줬노라. 그 아기가 바로 그저께 태어났는데, 숨도 쉬고 몸도 꼬물꼬물 움직이는데 울지를 않는다!”

“세상에는 울지 않는 아기도 있어. 그리고 병이라고 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의 병은 인간 의사에게 맡겨야 하거든. 스승님, 우리 마음만 찜찜해질 것 같은데 그만 듣죠.”

“좀 더 들어 봐라! 나도 병인가 싶어서 집을 지키고 있다가 부랴부랴 병원에 가 봤다. 동영상 찍었는데 좀 봐라. 육체는 아무 이상이 없다! 뺨이 토실토실하고 머리털도 이만큼이나 난 귀여운 아기다. 발가락도, 손가락도 접촉하면 잘 움직이지 않느냐. 부부도 제 아이에게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20년이나 살아온 나는 아기를 본 순간 알았노라! 이 아기는 ‘그것’이 없노라!”

“…….”

상쥬가 보여 준 동영상을 본 도진 또한 바로 알아챘다.

아기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바로…….

“‘혼’이 없잖아?”

도진이 잘못 봤나 싶어 동영상을 다시 재생하고, 다시 재생하고, 클로즈업도 했다. 그러나 역시나, 혼이 없었다. 오직 육신, 껍데기만 있을 뿐이었다. 놀란 도진이 이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태아의 혼을 잡아먹는 도깨비나 악신 짓일까요?”

“아니…. 이번 건은 하늘꽃밭의 실수야.”

이리가 사뭇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보통 인간의 탄생에는 두 번의 방문이 필요해. 씨앗을 심을 때와 혼을 넣을 때.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두 번째로 방문해서 혼을 넣고 가는데 심마니가 이 아기를 빼먹은 모양이구나.”

심마니라면 하늘꽃밭의 혼을 심고 다니는 직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엄청 큰일이잖아요! 심마니들 이 새끼들 정신 안 차리나.”

“역시 내 예상이 맞았노라! 어떡하냐, 이리 선인? 하늘꽃밭에서 왜 일을 대충 하는 거냐? 빨리 와서 우리 집주인 부부의 아기한테 혼을 심어 주라고 해라! 이러다가 혼령이나 잡귀나 원혼이나 하여튼 그것들이 몸을 차지하면 어떡하냐?”

복배바리가 호들갑 떨며 채근할 때 이리는 이미 핸드폰을 꺼내 바리공주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에? 혼이 안 심어진 아기가 있다고요오?

바리공주의 경우에는 도진과 이리, 상쥬보다 열 배는 더 깜짝 놀랐다. 이리가 통로로 바리공주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바리공주와 함께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고, 정말로 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1분도 지나지 않았다.

급한 사안이니 만큼 심마니들에게 긴급 점검 공지를 내려 또 다른 케이스가 있는지 알아봤다. 다행히 그 아기가 유일했다. 일단 이리가 아기의 육신에 어떤 잡귀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처치하고 일행은 산후조리원 내 카페로 이동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선인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네요….”

핫핑크 등산복 차림에 도진보다 머리카락이 짧은 바리공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대단히 잘생기고 어여쁜 두 남자와 등산복 차림의 예쁜 여성. 사람들이 이상한 조합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복배바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하는 가족 옆에서 함께 행복해하는 중이었다.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따뜻한 차 사 올까요?”

“아, 나는 아메라키라노로…. 네가 김도진이지? 인사도 못 했구나.”

“예, 안녕하세요. 바리공주 님.”

“그냥 바리라고 불러. 내 제자들이 네 칭찬을 쏟아붓더구나. 나로서는 앞으로 매년 선물을 일곱 개씩 받으려니 벌써 머리가 다 아프지만.”

“사람은 머리가 두 개만 돼도 의견이 달라 싸움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칠성신은 일곱 명이나 되니 그동안 얼마나 머리가 아팠겠습니까?”

“그래, 이제 스승도 좀 아파 봐야 한다는 것이냐?”

“꼭 그런 의미는 아닌데 뭐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어쩔 수 없고요.”

“도진아. 가서 음료 좀 사 와. 끼웅이가 운다.”

“넵, 스승님!”

도진이 후다닥 달려갔다. 바리공주가 피식 웃었다.

“한 대 막 쥐어박으려고 하는데 피신시키는군요.”

“네 손가락을 보호한 거야. 그나저나 요즘 심마니들이 바쁜가 보네. 이런 실수를 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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