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도진이 지체 없이 슬라임에서 빨간 주머니를 꺼냈다. 가벼운 무게의 주머니를 몸부림치고 있는 역천에게 던졌다. 빨간 주머니의 입구가 벌어지면서 그 안에 있던 것이 흘러나왔다. 새하얀 얼음 대지 위에서 반짝이는 그것은 고운 모래 입자들이었다.
쿠구구…….
굉음이 점점 멎었다.
“…….”
역천의 악신이 멍하니 모래를 바라봤다. 몸체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거대한 바위 거인이 둥둥 떠다니는 황금빛 입자들에 손을 가져가 댔다.
고운 모래를 움켜쥔 채 눈을 내리까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진과 한수에게는 들리지 않는 어떤 목소리를.
역천은 자살 행위를 멈췄다.
떠다니는 모래를 빤히 바라보며 점점 몸체를 줄이더니 비교적 자그마한 바윗덩이로 변했다. 그는 도진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 뒤돌아 앉았다. 몸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따로 인사는 필요 없었다. 가끔은 인사가 없는 쪽이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도, 도진 씨…. 이, 이게 대체 무슨….”
어안이 벙벙한 한수가 묻자 도진은 하얀 주머니를 꺼내며 대답했다.
“저 자에게도 사연이 있었던 거겠지. 누구나 그렇듯이. 이제 돌아갈 테니 준비해.”
“아… 네, 네!”
역천은 태고부터 존재해 온 악신이다. 저자의 사연은 또 얼마나 길고 사무칠까. 악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고행 끝에 신령이 되었다가 또다시 역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연들은.
이리 선인은 그런 사연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걸까.
얼마나 많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걸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고서….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과 태고의 선인에 대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말이야…….’
지금은 우선 스승님에게 돌아가야 한다.
도진이 하얀 주머니를 열었다.
30. 대모
이석진은 도진의 어머니 집안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다. 워낙 유명한 연예인이다 보니 평범한 병원에 입원하면 바로 기자들한테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기분 전환을 위한 휴가 중이라고 보도를 냈다. 건강에도 전혀 이상이 없다는 말로 팬들을 안심시켰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막 꺼냈을 당시 그는 생사의 고비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일주일간 음기 가득한 곳에서, 물도 음식도 섭취하지 못한 채 벽 안에 갇혀 있었으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병원에서 온갖 정성을 쏟고, 대여점에서도 특별한 약재를 지원한 덕분에 건강은 빠르게 회복했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는 이석진을 보면서 한수는 눈가가 다 헤질 만큼 울었고, 아진은 입술이 헤질 만큼 분노했다.
이석진이 입원하고 사흘 후 대여점 일을 일찍 마친 이리와 도진이 병원에 방문했다. 나름 병문안이라고 음료와 과일 바구니도 챙겼다. 아진과 한수는 까슬까슬하고 창백한 낯으로 둘을 맞이했다.
“둘 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거야? 이러다가 이석진이 깨어나면 너희가 쓰러지겠어.”
“제 말이요. 미리 병실 알아봐야 할 지경이네요. 거의 산송장이네.”
끼우웅. 끼웅….
“우리가 그렇게까진…….”
아진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한수의 얼굴을 확인하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에 경악했다.
“오빠! 세상에. 꼬라… 모습이 왜 이래? 눈가는 또 얼마나 문질러 댔기에 다 헌 거야?”
“아, 아진이 너, 너도. 이, 입술에서 피나….”
“내가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하, 내 잘못이다. 얼른 밥 먹자. 선인님, 죄송한데 저희 잠깐 식사 좀 할게요. 여기 주방 시설 있어서….”
“야. 너네 이석진 나오고 한 끼도 안 먹었지? 지금 밥 먹어 봤자 소화 안 돼. 우리가 죽 사 왔으니까 이거나 먹어.”
“…감사합니다.”
말한 이는 도진인데 아진은 이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죽이 필요할 거라고 챙긴 이가 이리였기에, 도진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한수와 아진이 죽으로 배를 채운 후, 넷은 소파에 모여 앉았다. 과일 바구니를 살 때부터 바나나에 달라붙어 있던 끼웅이는 테이블 위에 자리 잡고 앉아 도지이 까 준 바나나를 갉아 먹고 있었다.
제 몸보다 더 큰 것을 열심히 먹는 어린 잡귀 옆에는 슬라임도 자리했다. 탱글탱글한 까만 슬라임은 아직 의식이 생기지 않은 빈 사역마였다.
끼우웅. 끼웅.
…….
끼우웅?
끼웅이는 슬라임에게 바나나 조각을 떼어 줬으나 움직임이 없자 다시 자기가 가져다 먹었다.
아진이 그 모습을 보고 설핏 미소 지었다. 이석진의 일 이후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선인님, 이 슬라임도 끼웅이처럼 귀여운 애가 될까요?”
“글쎄…. 어떨까.”
이리가 오랜만에 인간이 만든 공산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옅게 웃었다. 도진은 그 순간 이리가 이 슬라임에 깃들 혼에 대해 뭔가 짐작하는 바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이리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아진과 한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석진 오빠는 귀신을… 그러니까, 위아를 좋아하거든요. 저번에 한수 오빠가 만들었던 사역마는 인간에게 빙의해서 돌아다녔는데 이번 사역마는 만질 수도 있는 작고 귀여운 애라서 분명 좋아하겠죠.”
아진은 미소 지을 때는 언제고 금방 씁쓸해졌다.
“그 사역마는 고통만 받다가 떠났어요…. 배리모스에게 혹사당하다가. 그 아이도 살아 있는 아이였는데. 한번은 배리모스가 덜떨어졌다며 비아냥거리자 우리한테 슬금슬금 기어 온 적이 있어요. 우리는 기겁하면서 피하고, 발길질하고… 저리 가라고 욕했고요.”
“…….”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요. 그 아이도 피해자였는데, 외면하기만 해서…. 그렇게 괴롭힘당하다가 죽어서…. 아!”
씁쓸하게 말하던 아진이 갑자기 지레 놀라서 이리를 향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선인님을 탓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선인님께서 그 아이의 고통을 끊어 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말할 때가 되었구나.”
“네?”
“그때 그 사역마가 끼웅이야.”
“…….”
아진과 한수가 눈을 끔뻑이더니 동시에 끼웅이를 쳐다봤다.
끼웅?
정신없이 바나나를 갉아 먹던 끼웅이는 제 이름이 들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진과 한수가 어쩐지 울 것 같은 눈망울로 저를 바라보자, 한숨을 내쉬더니 바나나를 끌고 영차영차 걸어와 아진과 한수 앞에 놓았다.
끼웅, 끼우웅. 끼웅!
“바나나 먹고 힘내란다.”
도진이 통역해 줬다.
“끼웅이가… 정말로.”
“스승님이 정이 많으셔서 바로 없애지 않으셨어. 그때의 기억은 없고. 김끼웅, 이 사람들 바나나 안 먹는다니까 너 다 먹어.”
끼우웅.
“그냥 너 먹으라고.”
끼웅.
끼웅이는 한수와 아진의 눈치를 한번 보더니 다시 바나나에 들러붙어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아진은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따뜻하게 터지는 감정에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이 막 나오려 하는데, 옆에서 한수가 눈물 콧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쏙 들어갔다.
“선인님, 감사합니다…. 끼웅이도, 그리고 석진 오빠 일도….”
“아니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저도 언젠간 사역마를 만들 수 있을까요? 선인님의 말씀대로 제가 정말 만월 가문의 후손이라면…. 배리모스 같은 사역마가 아니라 끼웅이 같은 아이로.”
이석진이 입원한 날, 아진과 한수는 이리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배리모스는 만월 가문의 사역마고, 아진과 석진은 만월 가문의 직계 후손. 그리고 한수는 만월 가문의 용역 퇴마사의 후손이라고.
이에 아진과 한수도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얘기했다.
그들이 놀던 산의 이름이 보름산이었다는 것. 그곳에 있던 오래 전에 폐허가 된 집터와 부적으로 봉해진 항아리.
아진은 여기까지의 정보 전달로 멈추려 했으나, 이리 선인의 까만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배리모스가 나타난 뒤로 삶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에 대한 감정적인 토로까지 하게 되었다. 힘들었겠구나, 그래, 네 마음 알아, 하며 차분히 듣는 이리 선인에 아진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너는 퇴마사가 아니라 무당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어려울 거야. 무당과 퇴마사는 의사와 한의사만큼 다른 존재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반대로 퇴마사가 못 하는 것도 할 수 있지.”
“그게 뭔데요?”
“혼의 정화. 퇴마사는 말 그대로 ‘퇴마’밖에는 하지 못해. 소멸시키거나 아니면 곧장 지옥으로 떨어뜨리거나. 하지만 무당은 악신조차 위로하고 정화로 구원해 줄 수 있어.”
“…저는 악신을 구원하고 싶지 않습니다.”
“…….”
“악신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배리모스를 소멸시키고 싶어요.”
이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배리모스가 한수에게 걸어 둔 금제가 풀렸을 때, 아진은 배리모스가 죽은 게 아닐까 기대했다.
그러나…….
‘배리모스가 아직 안에 있구나.’
의식을 잃은 이석진을 보자마자 이리가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었다. 악신은 끈질기게도 살아 있었다. 이 신묘한 분께서 다행히도 배리모스의 괴롭힘은 더 없을 거라고 단언해 주셨지만, 사실 아진에게는 배리모스의 생존 그 자체가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다.
“저, 저기….”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한수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서, 석진이는 어, 언제 눈, 을 뜨… 는지.”
사실 이게 두 사람이 가장 묻고 싶은 일일 터였다.
이리와 도진이 오늘 방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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