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78화 (178/203)

178화.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마경의 악마들은 모두 미치광이. 역천 또한 말투는 제정신 같아 보여도 마경의 구성원이며 누구보다 미쳐 버린 존재였다. 회까닥 눈 뒤집힌 역천이 팔을 뻗어 왔다. 커다란 덩치임에도 마치 번개 같은 속도였다. 도진은 거인의 손바닥을 피하며 황용검을 꺼냈다.

“이물인가? 그래서 어쩔 것이냐. 내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역천이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도진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콰앙! 도진이 있던 자리에 구덩이가 깊이 파였다. 동굴 벽에 붙었던 도진이 제게 뻗어 오는 거대한 주먹을 뛰어넘어 피했다. 콰앙! 벽이 와르르 무너져 구멍이 생겼다.

콰앙! 쿠궁! 쿠과광! 이렇게 휘두르고, 피하는 움직임이 반복되면 누가 먼저 지칠지는 뻔했다.

“장사여, 마치 날파리 같구나. 정말 용맹하다!”

비웃음 가득 담긴 조롱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유연하고 민첩하게 주먹을 피한 도진에게 역천이 다시 비아냥거렸다.

“그래. 괴력도 도술도 통하지 않으니 피하다가 스승의 도움만 기다릴 셈이더냐?”

“그러니까 이거 지금 말싸움이냐고.”

“뭐?”

“말싸움이면 나도 어디서 지지 않거든? 격투인지 말싸움인지 확실히 해라.”

“하……!”

화가 끝까지 난 역천이 주위에 돌덩어리들을 소환했다. 하나하나 크기가 집채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거인의 옆구리에서도 팔 두 쪽이 더 생겨났다.

쿠구구궁! 비처럼 쏟아지는 바윗덩이들을 피한 도진에게 거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황용검으로 막아 내자 이번엔 아래쪽에서 뻗어 왔다.

“흐아압!”

한껏 부푼 근육질 팔뚝으로 그 거대한 주먹에 맞서 주먹을 휘둘렀다.

크그그그…!

“으윽.”

서로에게 타격이 있었다. 다만 도진의 팔은 두 개고, 역천은 팔이 네 개나 되었다. 도진이 곧장 뒤따라오는 역천의 주먹을 피했다.

쾅! 쾅! 쾅! 거인이 휘두르는 자리마다 구덩이가 생겼다. 낙하하는 바윗덩어리들이 구경하던 악마를 깔아뭉갰다. 한수는 의수가 망가진 듯 보였으나 어찌 되었건 보호막 아래에서 잘 생존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수가 준비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황용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악마는 도술 면역이지만 이 지형은 아니지!”

황용검의 특별한 능력은 바로 지형지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물로 동굴 지형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꿀 수 있다.

쿠구구구….

동굴이 굉음을 일으키며 변화했다. 햇살 한 줄기 들지 않던 어둠에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려왔다.

황용검이 동굴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도진의 기운을 무섭게 빨아들였다. 그동안 한수가 보호막으로 역천의 공격을 막아 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거냐. 멈춰라!”

꽝, 꽝! 역천이 보호막을 한 대 때릴 때마다 수십 장의 부적이 타들어 갔다.

“동굴이 사라진다!”

“으아아악. 빛이 들어와!”

악마들이 괴성을 지르며 도망쳤다.

한수가 위를 올려다보니 이미 그곳은 동굴 천장이 아니었다. 새파란 하늘, 노란 햇살. 그리고 푸른 하늘 아래에 펼쳐진 풍경은 바다였다. 솨아아아-! 높은 파도가 이는 망망대해에 그들이 있었다.

“야, 저기에!”

“아, 알아요!”

지형이 바뀌면서 바윗덩이들이 물에 둥둥 떠오르고, 틀어막혔던 벽에서 이석진의 몸이 튀어나왔다. 이리의 말대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한수가 재빨리 슬라임에서 푸른 주머니를 꺼내 벌렸다. 그러자 이석진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배리모스가 몸 안에 있는지 없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한수는 얼른 주술로 나룻배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탔다.

“슬라임!”

“네!”

한수가 파란 주머니를 다시 집어넣은 슬라임을 도진에게 던졌다.

쿠구구궁!

무게로 인해 바닷속에 잠겨 가던 역천이 거대하게 몸을 키웠다. 비좁은 동굴에서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까마득한 크기였다. 해수면 위로 상체가 드러났다.

“바다? 하. 공간이 달라졌다고 무엇을 기대하느냐.”

바다의 깊이보다 커진 역천이 마음껏 바다를 휘저었다. 지진 해일을 연상케 하는 높은 파도가 연신 들이닥쳤다. 마침내 부적이 모두 불타 보호막도 없어졌다. 역천의 거대한 주먹을 피하려 해도 바다 위라 빠르게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도진은 황용검에 기운을 불어넣으며 다시 지형을 바꿨다. 이번엔 해가 쨍쨍한 사막이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쿠구구궁!

모래 위에서 몸을 구른 도진이 단숨에 솟구쳐 거대한 발등 위로 올라갔다. 바위로 이루어진 몸은 검이 들어갈 흠집이 없어 보였다.

쾅, 쾅! 도진이 발등과 발목에 주먹질했다. 그 자리마다 움푹 파였으나 워낙 크기가 거대해서 마치 발등에 난 작은 점 같았다.

역천은 간지럽지도 않은 듯 도진에게 팔을 뻗었다. 툭 치는 것만으로 온몸을 으스러뜨려 버릴 손이 도진을 노렸다. 도진은 비상술로 날아올라 반대쪽 발등으로 착지했다. 쾅, 쾅쾅! 같은 짓을 반복하는 귀찮은 날파리를 치우기 위해 역천이 발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도진을 모래 속에 깊이 처박았다.

“도, 도, 도진 씨!”

“크흐읍!”

모래 구덩이에 깊숙이 파묻힌 도진이 황용검으로 근처의 지형을 얕은 물가로 바꿔서 빠져나왔다.

“이제 놀이는 끝이다.”

콜록, 콜록! 기침하던 도진은 저를 사이에 두고 다가오는 양 손바닥을 발견했다. 얼른 검을 가로로 들었다.

쿠구구구궁, 끼득, 끼드득, 비틀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황용검에 쩌저적 금이 갔다. 파괴되려는 것이다. 도진은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지형을 바꿨다.

이번에는 온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인 빙하 지대였다. 째앵! 그 순간 한 줄기 노란 섬광과 함께 황용검의 검신이 산산이 조각났다.

도진은 칼자루를 버리고 재빨리 몸을 굴려 빠져나왔다. 쾅! 손뼉 맞부딪치는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도진이 이를 악다물었다.

문제는 거인에게 두 개의 팔이 남았다는 것이다. 도진은 몸을 피하기 무섭게 위에서부터 납작하게 눌러 버리려는 또 다른 손바닥을 마주했다.

하, 씨. 여기서 빨간 주머니를 열어야 하나?

슬라임을 더듬거렸다.

“이제 끝을…… 무슨?”

역천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균형을 잃은 듯 기우뚱거렸다. 역천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진이 집요하게 노리던 발목과 발등이 쩌저적 큰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쿠웅!

영문도 모른 채 비틀거리던 역천이 추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진짜 말로 싸우네.”

“크으윽.”

그의 허리가 쩌저저적! 큰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끔찍한 소리는 허리에서 멈추지 않고 팔뚝, 어깨, 목까지 올라오더니 마침내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온몸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한 역천에게 도진이 말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바위가 뜨거운 열을 만나 팽창하고, 극저온의 지역에서 급격히 수축하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인간은 교육이라는 걸 한다는 뜻이죠.”

이제 마지막 일격만 가하면 역천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도진은 그리하지 않았다. 이곳이 하계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죽였겠지만… 이곳은 마경. 살생해서는 안 되는 규율이 적용되는 곳이다.

역천 정도 되는 악신은 이대로 두어도 반나절 정도의 시간만 흐르면 회복할 것이다. 마경의 악마들은 지형이 바뀌면서 다들 도망쳤으니 그 시간도 충분했다.

“결투는 내가 이겼고, 우리의 목표였던 인간을 되찾았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금도 갈라지고 있는 제 손가락을 마치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바라보던 역천이 고개를 들었다.

“난 네게 진 것이 아니다. 이물의 힘에 패배했지…. 정말 졸렬하구나.”

“날 도발하려는 모양인데 딱히 화는 안 나네요. 아무튼 전투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진이 슬라임을 꺼냈다. 빨간 주머니를 쓸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얀 주머니를 꺼내려는 그때였다.

콰과과광!

돌무더기가 날아와 도진이 재빨리 피했다.

“도, 도진, 씨. 여기로!”

“부적 남았어?”

“아, 아직 있어요!”

도진이 한수의 보호막 안으로 들어갔다. 역천의 몸부림에 바윗덩이들이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바닥의 얼음 대지가 갈라졌다.

“역천! 뭐 하는 겁니까? 당신 지금 유리 세공품보다 쉽게 깨지는 몸이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죽는다고!”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크크크. 이참에 저승 구경을 해 보는 것도 좋겠지!”

“씨발, 미치광이 악마 새끼.”

한수가 도진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 그냥 주, 죽게 내버려 두고 우, 우리는 어, 얼른 여기를… 나가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대로 두면 규율에도 어긋나고, 마경에 지배자가 없어지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져서….”

고민하던 도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음성이 있었다.

‘빨간 주머니는 위기의 순간에 열면 돼.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저는 위기 없이 여유롭게 해치우고 올 건데요.’

‘위기라는 게 꼭 네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닐 수도 있어.’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이 뜻이었다. 내 위기가 아니라 역천의 위기였던 것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7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