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73화 (173/203)

물론 왕이 허락한다면 이리 홀로 가면 되지만 말이다.

“중간계에 내려와 있는 장군신이 소 장군 말고 누가 있더라. 도진아, 일단 소 장군에게 연락해 봐.”

“장군신 필요 없어요! 제가 있는데 왜 남을 부르려고 해요? 전우치든, 소 장군이든, 오방장군이든 누구든 다 필요 없고 그냥 제 능력으로 구출해 보일게요!”

“절대 안 돼.”

“스승님, 저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알지만 제 눈을 보시며 침착하게 생각해 보세요.”

도진이 이리의 양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리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으나 제자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도진의 붉은 눈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 육체 능력이 마경의 악마들에 비해 많이 떨어집니까?”

“……그렇다고 압도할 거란 확신도 없어.”

“바로 그겁니다!”

도진이 이 대답을 기다린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났다.

“왜 확신이 없느냐. 그건 바로 스승님이 저를 어리고 약하게만 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워낙 아기 때부터 봐 왔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있는 거죠. 스승님, 그 이야기 아시죠?”

“…뭐?”

“어떤 할아버지가 와플 가게에 애기 줄 거라고 달달하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알바생이 애기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까 38살이라고 하더래요.”

“…….”

“그 얘기도 아세요? 이삿짐센터 직원이 책상 어디로 옮겨 드릴까요 물으니까 어머니가 애기 방으로 옮겨 주세요, 했대요. 그리고 잠시 후에 180cm 건장한 청년이 엄마 부르며 들어오더래요.”

“…….”

이리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한숨 쉬지 마세요. 걱정하지도 말고요. 저는 강합니다. 언제나 스승님께 그 사실을 알려 드릴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드디어…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알려드릴 수 있겠네요. 제가 마경에 들어가 멀쩡하게 이석진을 데리고 나오면 스승님도 더 이상은 절 약하게 보지 못하실 테니까…!”

도진이 계획대로라며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으하하하-! 웃었다. 나이 지긋하게 든 장군신들이 저렇게 웃고는 하는데…. 대여점에서 나이 지긋한 위아 고객들을 많이 보고 자라서 옮은 걸까?

끼우우웅….

끼웅이가 이리의 손가락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김도진 왜 저래? 라는 듯했다.

이리는 끼웅이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도진에게는 확실히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압도할 만한 능력이 있긴 했다.

바로, 이리의 골치 썩이는 고민거리를 한순간에 하찮고 가벼운 것으로 만드는 대화 능력이었다.

“스승님! 제 말대로 하실 거죠?”

“…일단 수련하면서 생각해 볼게.”

“수련이요?”

“마경 특화 수련. 네가 이 수련을 잘 해낸다면 홀로 보내도록 하마.”

“좋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드디어 내 능력을 뽐낼 수 있다. 아싸아아!”

도진은 수련 내용을 듣지도 못했으면서 만점을 받기라도 한 듯 기뻐 날뛰었다. 이리의 한숨이 좀 더 짙어졌다.

한수와 아진은 차분한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았다. 아진은 마경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게 이석진 구출 작전에 참여할 인원이 정해졌다. 임시이긴 하지만… 도진과 한수, 두 명이었다.

“어, 언제 들어가는지. 저, 저는 지, 지금이라도.”

“구출 작전은 이틀 후에 시행하자. 내일은 하루 동안 특별 수련을 하고.”

“수, 수, 수련이요?”

“그래. 마경에는 아주 위험한 악마가 살고 있고. 너희는 그자와 겨루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특화 수련을 할 거야. 이틀간 여기서 머무르렴. 도진아, 2층에 방을 마련해 줘.”

“네!”

도진이 한수와 아진을 2층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리 선인님이 수련을 봐주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 줄 아느냐며 거들먹거렸다.

그날 밤, 이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현계에 올라갔다.

이리가 다시 눈을 뜨자 옆에서 몸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던 도진이 물었다.

“임금님이 뭐래요? 마경에 들어가도 된대요?”

“만나지도 못했어.”

“네에?”

“저번에 뵈었을 때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결국 우울증이 육신까지 좀먹어 버린 모양이야.”

도진이 신음했다.

“즉위식까지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는데 버티실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 버티기 위해 지금 모든 방문을 거절하고 누워 계신 거겠지. 우리도 이제 자자.”

“네, 스승님. 굿나잇 키스.”

입술을 쭈욱 내미는 제자에게 이리가 쿨쿨 잠든 끼웅이를 들어서 입술에 부딪혔다. 도진이 우웩, 하며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너무해요. 스승님. 어떻게 키스 한 번을 안 해 주세요? 우리가 얼마나 긴 분량을 밀고 당겨 왔는지 아세요? 이제는 입 맞출 때가 됐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자러 가. 내일 혹독하게 수련해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저 수련 들어가면 내일 업무는 어떡하죠. 이아진한테 도와 달라고 하시게요?”

“신령을 부르면 돼. 도진아, 나는 얼른 눕고 싶구나.”

“네! 안녕히 주무세요!”

도진이 얼른 문을 닫고 나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 닫았으면서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는 우렁차기도 했다. 작게 웃은 이리가 끼웅이를 제자리에 다시 눕혔다. 주위로 인형 여러 개가 굴러다녔다. 전부 끼웅이가 낑낑대며 갖다 놓은 것이라 이리는 치우지 않았다.

“…….”

작고 도톰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던 이리가 문득 행동을 멈췄다. 새근새근 잘 자는 그림자 잡귀를 보면 이리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 마경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 * *

이튿날, 이리의 부름을 받은 이해자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리는 익숙하게 작업복인 앞치마 끈을 묶는 이해자에게 아진을 소개했다.

“이해자, 이쪽이 이아진이야. 간단히 업무를 알려 줘. 나는 도진이랑 퇴마사의 수련 때문에 이만.”

이리가 총총총 떠났다. 이해자는 자신보다 조금 큰 키의 아진을 올려다봤다. 아진은 새하얀 머리색이 신기한지 홀린 듯이 보고 있다가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해자… 신령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처음은 아니야. 예전에 우리 선인님이 배리모스에게 경고할 때 틈을 통해서 널 봤었지.”

“그때라면, 아직 만인사에게 빙의되었을 때 말씀인가요?”

“그래. 하긴 그때 너는 기절해 있어서 날 못 봤겠구나.”

이해자가 아진의 고운 손을 덥석 붙들었다.

“힘든 일은 한 번도 안 하고 산 것 같은 손인데. 너, 무당 일 말고 아르바이트 몇 개 해 봤어?”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무당 일도 하는 둥 마는 둥 했고요….”

아진은 집안일도 제대로 한 적 없었다. 배리모스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흐음. 뭐 됐다. 대여점 일이 다른 일 해 봤다고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물 작업은 내가 다 할 테니까 접객만 맡아. 오면 의뢰서부터 적게 하고, 상담실로 안내한 다음 차 내오면 돼.”

“네. 맡겨 두세요.”

끼웅, 끼우웅. 끼웅.

이리가 간단한 도술로 만들어 준 앞치마를 멘 끼웅이가 이아진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끼웅이가 지금 뭐라고 했는지 신령님께서는 알아들으셨어요?”

“자기가 옆에서 볼 테니 걱정하지 말란다. 그래, 끼웅아. 너만 믿을게.”

끼웅!

그렇게 아진이 끼웅이와 이해자에게서 간단한 업무를 교육받는 동안, 한수는 뒤뜰에서 이리를 기다렸다.

도진이 수련장으로 사용하는 대여점의 뒤뜰에는 여러 수련의 흔적이 가득했다. 목검과 창이 담긴 무기고와 찢어진 부적 용지들, 무너졌다가 다시 쌓은 티가 역력한 담벼락. 담벼락에는 키를 잰 흔적도 있었다.

‘한수 오빠, 나 키 이만큼이나 컸어. 손가락만큼 컸어.’

‘마, 많… 이 컸네. 고, 곧 서, 석진이보다 크, 크겠다.’

‘흥! 그럴 일 없어. 본래 어렸을 때는 남자애보다 여자애가 더 빨리 자란대. 이제 조금 있으면 아진이 너는 내 키 따라잡지도 못할 거야.’

‘그러지 말고 내가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려 줘. 그다음 공평하게 경쟁하자. 응?’

‘바보야. 우리 나이부터가 차이 나는데 무슨 공평이야?’

‘한수 오빠, 석진 오빠가 내 말 안 들어. 혼내 줘어. 흐어엉.’

머릿속을 스치는 과거의 기억에 한수의 표정이 흐려졌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일까 요즘 들어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많았다. 한수는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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