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69화 (16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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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선인과 헤어진 둘은 천리단길이 있는 ‘제2지구’로 향했다. 주로 인간 혼령들이 모여 살아 인간 사회와 가장 비슷한 지역이라는데, 그래도 역시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의 각종 ‘-리단길’처럼 아기자기한 포토존과 편집숍, 특색 있는 카페와 식당들이 모여 있었다. 제2지구는 본래 극락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으나 천리단길이 생기면서 핫해졌다는 정보가 팜플릿에 적혀 있었다.

이리와 도진은 구름 그네를 포함한 천리단길의 각종 포토존에서 극락 전용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극락에서만 판다는 군것질도 먹고, 극락에서만 즐길 수 있다는 오락기도  즐겼다.

어디 갈 때마다 “천지신명께서 저희 가게를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하며 서비스를 듬뿍 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서 식당에 들어갔다.

끼웅끼웅….

“어이없어, 진짜. 두 발로 걸어 다닌 건 우리인데 왜 주머니 안에 있던 네가 지치냐고.”

도진이 테이블 위에 엎어진 끼웅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끼웅이가 손을 바르르 떨었다.

“덕이 적은 잡귀라서 극락의 기운에 조금 기가 빨렸는지도 모르겠네.”

“아, 그런가요? 지치는 데 이유가 있었군요.”

납득하던 도진은 의문이 생겼다.

“그럼 덕이 없는 하계 족속들은 왜 극락에 자꾸 침입하려는 거예요? 와 봤자 살아갈 수가 없는데.”

“극락의 덕을 빼앗기 위해 침입하는 거야. 지역마다 중심에 있는 커다란 기둥 봤지?”

“네. 새하얀 기둥들이요.”

“거기에 순도 높은 덕이 응축되어 있거든. 이만큼만 가져가도 천년은 수행이나 선행을 안 해도 될걸.”

이리가 거의 손톱만큼만 표시했다. 도진이 호오, 하면서 이리의 검지를 덥석 붙잡았다. 이리가 조금 움찔했다.

“왜…?”

“이만큼만 있어도 천년 치라는 게 신기해서요.”

도진이 이리의 손가락을 주물렀다.

“와, 진짜 신기하다. 한 마디의 절반만 있어도 된다니. 와아, 겨우 이만큼이라니. 와아아아아. 손톱만큼이라니. 우와아.”

“…….”

이리는 응큼한 제자의 마사지를 한껏 당해 주다가 식사가 오고 나서야 손을 거뒀다.

극락에만 있는 희귀한 버섯으로 만든 요리를 먹고, 극락에만 있는 희귀한 과실로 만든 음료를 마시고. 레스토랑 측에서 서비스로 준 고급스러운 디저트도 먹었다.

배부르게 먹은 후에는 소화도 시킬 겸 천리단길의 잘 조성된 산책로로 향했다. 바닥엔 조족등이 박혀 있고, 양옆으로는 초롱불이 매달려 있어 저녁이 됐어도 어둡지 않았다. 극락인들도 한낮보다는 한결 차분해져 멋대로 말 걸어오는 이도 적었다.

끼우웅…….

끼웅이가 도진의 넓은 어깨 위에서 선선한 바람을 만끽했다.

“옷 잘 잡고 있어라. 그러다 뒤로 날아간다.”

끼우웅.

“대답만 잘하지. 스승님, 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요. 스승님 팔짱 껴도 돼요?”

“안 날아가. 팔짱도 안 돼. 지금 몇 시지?”

도진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극락 온 지 다섯 시간 삼십 분 지났네요. 시간 진짜 빠르다. 혹시 극락에서는 시간이 더 빨리 흐르나요?”

“아니…. 슬슬 용마 데리러 가자.”

“아까 보니까 호텔도 있던데. 전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경치라던데 하룻밤만 자고 갈까요?”

“우리 내일도 새벽부터 예약 있어. 그리고 그런 곳은 이미 예약이 백 년까지 다 찼을 거야.”

“사실 이리 선인께서 원하신다고 하면 다들 양보할 텐데….”

“도진아, 저길 봐. 저러다 넘어질 것 같구나.”

이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앞에 걷는 사람이 걱정되어 말했다. 도진도 이리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청색의 긴 장포를 걸쳤음에도 상당히 마른 체격인 게 티가 나는 남자가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지그재그였다.

“뭐죠? 술 취했나?”

“음…. 술은 아니고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야. 곧 넘어지겠구나. 가서 부축해 주렴.”

“예?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부축하면 놀라서 더 사고 날 수도 있어요.”

“지금 이미 넘어지고 있는데.”

“아!”

이리의 말대로 남자가 옆으로 기우뚱 기울더니 가로수에 머리를 부딪치려고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깜짝 놀라는 그때 도진이 빠르게 달려갔다.

끼우웅!

그 반동으로 추락하게 된 끼웅이가 비명을 질렀으나 충격은 오지 않았다. 이리가 끼웅이를 허공에 둥실둥실 뜨게 한 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도진은 남자가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에 팔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뼈대가 느껴질 만큼 마른 팔이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정신 차려요.”

“으으…….”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으니 정말로 피곤했던 것 같다. 도진은 남자를 근처 벤치에 앉혔다.

“으…. 감사… 합니다….”

눈 밑은 시꺼멓고, 두 뺨은 움푹 파였으며 입술은 메말라서 갈라져 있었다. 목소리에도 피곤이 묻어 나왔다. 꼭 병에라도 걸린 것 같은 몰골이었다. 분명 아는 사람 중에 이 정도의 환자는 없는데, 얼굴이 묘하게 익숙했다.

‘극락인도 병에 걸리나?’

도진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이리가 남자의 앞에 섰다.

“화담.”

“아…. 이리 선인님….”

역시 이리가 아는 사람이었다.

화담, 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도진이 머리를 굴렸다.

“오랜… 만입니다….”

“으음. 기도식 이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았는데 많은 일이 있었나 보구나.”

이리의 친절한 힌트로 도진은 이 병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최근에 저승 시왕이 된 화담 선인.

기도식 때 덩치 큰 시왕들 사이에 껴서 연신 구부정한 자세로 부채만 팔랑거리고 있던 심약한 시왕이었다.

“안녕하세요, 화담 선인님.”

“오랜만… 이네…. 도진 장사….”

쿨럭, 쿨럭. 화담이 몹시 기침했다. 도진은 화담에게 실례인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이리의 얼굴 앞을 옷 소매로 가렸다. 도진을 흘겨보면서 팔을 내린 이리가 화담의 옆에 앉았다. 도진은 그냥 이리의 앞에 서 있었다.

“무슨 병이라도 얻은 것 같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하하….”

“시왕들이 많이 괴롭혀?”

“그분들은 괴롭힌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그저 서로에게 대하듯… 저한테도 똑같이 대하는 것이니…….”

화담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를 제외한 아홉 대왕은 모두 장군신. 화담이 염라대왕의 공석을 이어받아 시왕이 되기 전에는 열 명의 왕이 모두 장군신이었다. 그러니 서로에게 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서 선인의 여린 육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을 저지르고는 했다.

목청껏 고함을 쳐서 화담의 고막을 터뜨린다든가…. 물건을 건네줄 때면 힘껏 던져서 화담의 손목뼈를 부러뜨린다든가…. 호탕하게 웃으며 벽을 치다가 화담을 돌무더기에 깔리게 만든다든가….

시왕은 결코 악인이 아니라 그때마다 사과를 한다.

‘이런, 미안하네! 자네가 연약한 선인이라는 걸 까먹었군. 연고 바르면 재건될 걸세!’

‘이런, 미안하네! 자네가 연약한 선인이라는 걸 까먹었군. 붕대 감고 있으면 금방 붙을 걸세!’

‘이런, 미안하네! 자네가 연약한 선인이라는 걸 까먹었군. 한숨 자고 일어나면 바로 나을 걸세!’

사과가 사과 같지 않아서 더 문제였지만 말이다….

화담이 차마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다 안다는 듯 이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땀을 많이 흘리는구나. 도진아, 부채질 좀 해 줘.”

“예.”

도진이 허공에서 부채를 소환하고 손에 쥐자 화담이 기겁했다.

“아, 아, 안 부쳐도 된다…. 장사가 부채질을 하면… 나는 날아가서… 나무에 머리를 처박을… 뇌진탕이…. 흐윽….”

“화담 선인님, 저는 그쪽보다 작은 선인을 스승으로 둔 장사입니다. 절대로 다치게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힘 조절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으니까.”

“그래, 화담. 걱정하지 말고 여기 기대. 갑자기 긴장하면 또 몸에 이상 올 수도 있어.”

“예에…….”

화담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으나 도진이 딱 적절한 속도로 부채질을 시작하자 곧 괜찮아졌다.

끼웅.

끼웅이가 눈치를 보더니 슬쩍 화담의 어깨 위로 올라가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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