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67화 (167/203)

매일같이 붙어 있던 제자와 멀어져서 10년에 한 번 봐야 한다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리는 허벅지 위에서 움켜쥔 제 주먹을 발견했다.

“그래. 네 말이 맞네.”

어차피 거짓말도 못 하거니와 딱히 숨길 필요가 없는 부분이라 이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널 10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다면 정말 불안하고 슬플 거야….”

“그렇죠?”

도진이 활짝 웃으며 이리에게 어깨를 부비며 앵겨 댔다.

“스승님, 밀당 너무 잘하세요. 제 마음을 외면했다가도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해 오고.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세요.”

이리는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논의를 마친 칠성신이 돌아왔다. 가장 어린 외모를 한 막내 파군성이 말했다.

“선인님, 저희는 김도진의 조언대로 일곱 개를 모두 선물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선인님의 제자 덕분에 식견이 좀 더 넓어진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가 아니라 도진이에게 고마워해야지.”

“아, 그렇군요. 김도진, 그대의 현명한 조언에 감사한다. 그대 덕분에 앞으로 스승님의 선물 고를 때 다툴 일이 없겠구나.”

칠성신이 까마득히 어린 도진에게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겸양의 미덕 따위는 갖추고 있지 않은 도진은 콧대를 높이 쳐들며 인사를 받았다.

칠성신이 부랴부랴 선물을 사러 떠나고, 두 사람은 드디어 트램을 타고 판타지 월드로 이동했다. 도진은 이름 때문에 막연히 서울랜드나 에버랜드 같은 곳을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라 서양식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웅장한 산맥과 성탑이 있는 곳이었다.

“10011번째 고객님, 구름 말랑 솜사탕 두 개 나왔습니다.”

도진이 솜사탕 두 개를 받아서 넓은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는 이리에게 돌아왔다.

“일단 생긴 건 인간계에서 파는 솜사탕이랑 똑같네요.”

“그러게.”

“스승님도 처음 먹어 보세요?”

“응. 나도 판타지 월드는 처음이라.”

이리에게 하나를 건네고, 끼웅이에게는 자기 걸 조금 떼어 줬다. 끼웅이가 받자마자 와구와구 먹었다.

끼웅, 끼우웅!

맛있는지 바로 또 더 달라고 성화였다. 도진은 아직 먹기도 전이었는데 끼웅이에게 또 한 움큼을 줘야 했다.

이리도 한 입 먹어 보고는 맛있네, 했다. 도진도 먹어 보니 정말 달콤하면서도 푹신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가는 게 특히 일품이었다.

“살면서 먹어 본 솜사탕 중에 제일 맛있어요! 솜사탕은 다 그 맛이 그 맛인 줄 알았는데. 스승님은 어떠세요?”

“맛있네.”

“스승님이 맛있다고 하시니까 더 맛있게 느껴져요!”

도진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한입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바로 또 하나를 더 사려고 보니까 대기인이 90명이 되어 있었다. 아쉬워하던 도진이 끼웅이의 솜사탕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끼웅이가 서둘러 입에 쑤셔 넣었다.

이리가 도진에게 솜사탕을 내밀었다.

“도진아, 내 거 먹어.”

“제가 어떻게 스승님 걸 뺏어 먹습니까. 스승님 다 드세요.”

“나는 너무 달콤해서….”

“맛있다면서요. 스승님, 저 그렇게 식탐 많은 사람 아닙니다. 손 끈적거리죠? 손수건 물 적셔 올게요!”

이리가 떠안기기 전에 도진은 얼른 일어나 솜사탕 가게 옆의 개수대로 달려갔다. 손수건을 물에 적신 후 벤치로 돌아가려는데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 씨. 그새를 못 참고 어떤 위아 새끼가 또 내 스승님한테 달라붙어서…!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아 쿵쿵거리며 달려가던 도진은 그 사람의 의복이 익숙하다는 걸 눈치챘다.

흰 베일을 온몸에 감싼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율도국 팔씨름 대회에서 봤던 나림국의 낭자군이었다. 흰 베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체형이 그때와 완전히 똑같았다.

“스승님!”

“아, 도진아.”

도진이 한걸음에 달려와 이리와 나림국인 사이의 좁은 공간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리를 옮겼다. 낭자 또한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얼른 사이를 벌렸다.

“스승님은 정말 인간 사회에서든 위아 세계에서든 혼자 둘 수가 없네요. 이봐, 너. 율도국 팔씨름 대회에 참가했던 녀석이지?

“…내가 그때 그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체형이 똑같잖아. 장사의 눈썰미는 정확한 법이지.”

“…….”

“극락에 온 걸 보니 죽었나 본데. 내 스승님한테는 무슨 볼일이냐?”

나림국인이 얼굴에 드리웠던 베일을 걷었다. 도희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린 얼굴이었다. 물론 실제 나이는 도희의 수십 배는 되겠지만.

“나는 나림국의 이화(梨花). 이리 선인님께서 마침 극락에 오셨다기에 드릴 말이 있어서 왔다. 제자는 방해하지 말거라.”

“이화라면…….”

나림국은 나림 선인이 만든 나라로, 현재는 월백 대장군이 다스리고 있다. 나림 선인이 나림국을 건국할 때 진현계에서 내려와 나림 선인을 도와준 친우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화 선인, 혈례 선인, 골화 선인이었다.

도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인이셨습니까? 아니, 선인이면서 팔씨름 대회에서는 어떻게 그런 괴력을…! 혹시 도술을 부렸던 겁니까?”

“나는 염라처럼 협잡은 부리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팔씨름 대회에서 4강까지 올라왔습니까?”

이화가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이 없자 이리가 웃으며 말했다.

“도진아. 이화는 본래 장사였어. 그러다 도우의 제자가 되고 선인이 되었지.”

“아…!”

‘장사는 도사가 될 수 없는 게 맞아. 둘은 갈래가 완전히 다르니까. 하지만 선인은 될 수 있어.’

‘바로 선인으로 직행할 수가 있다고요?’

‘그래. 바로 그 방법이 선인의 제자가 되는 거야. 선인의 제자는 진현계에서 도사로 인정해 주니까. 아주 드문 경우이기 때문에 요리이기 같은 어린 도깨비는 그 사실을 몰라.’

예전에 설명 들은 바 있었다. 그 ‘아주 드문 그 경우’가 눈앞에 있었다. 도진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길을 이미 걸은 이. 장사면서 장군신이 아니라 선인이 된 사람. 도진의 눈에서 적대감이 사라졌다.

“선배님이셨군요!”

“선….”

“이화 선배도 참, 진즉 말씀해 주시지. 이리 선인의 제자 김도진이 장사면서 선인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은 이미 들으셨을 텐데. 선배로서 좀 조언도 해 주고, 정보 공유도 해 주고 그러셔야죠. 진짜 흔치 않은 케이스인데 정 없게 연락도 안 해 주고 말입니다.”

“그-.”

“본격적으로 수련하고 얼마 만에 선인이 되었습니까? 선인이 된 후에도 괴력이 사라지진 않았죠? 저는 이 경이적인 육체 능력을 유지하고 싶거든요. 지금은 어떤 식으로 수련하고 있습니까? 혹시 장사에서 선인이 된 다른 선배들도 알고 있습니까? 그럼 커넥션 좀 소개해 주시면 저도 나중에 선배들이 이물 필요할 때 저렴한 값으로….”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내뱉는 도진에 이화가 조금 당황한 듯 이리를 바라봤다. 나림국인들은 전부 말수 적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도진의 친화력에 당황했을 것이다. 가끔 이런 사람을 맞닥뜨리는 것도 좋지 않겠나 싶어서 이리는 어깨만 으쓱했다.

도진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그들은 근처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양식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펍이었는데, 내부가 너무 떠들썩해서 외부 테라스에 자리 잡았다. 끼웅이에게는 우유를 내어 주고, 이리는 물을 마시고, 이화와 도진은 맥주를 들이켰다.

“극락 맥주는 인간계 맥주보다 밍밍하네요. 거의 그냥 음료수네.”

“도수 높은 것도 있는데 관광객한테는 팔지 않아.”

“거주민한테만 판다는 뜻이에요?”

“응. 극락인들은 술에 취해도 말썽을 안 부리고, 애초에 취하기 전에 멈추지만 관광객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아하…. 납득 완료요.”

끼우웅!

끼웅이가 안주로 나온 땅콩 껍질을 몇 개 까서 이리의 접시에 부지런히 옮겼다. 이리가 끼웅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껍질을 까 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가 까서 나눠 주는 모습이 무척 기특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끼웅!

“야, 나도 줘. 선배도 드리고.”

끼웅끼웅.

열심히 땅콩 껍질을 까고 부지런히 나른 끼웅이가 지쳐서 접시 위에 엎드렸다. 하긴 지금 한창 낮잠 잘 시간이다. 도진이 끼웅이를 셔츠 앞주머니로 옮기고 땅콩 몇 개도 같이 넣어 주었다.

‘이리 선인? 저기 이리 선인이 계시네.’

‘오오, 이리 선인님을 판타지 월드에서 다 보다니.’

‘한 명은 제자고, 한 명은 나림국 사람인 것 같군. 일행이 있으니 말 걸면 안 되겠지.’

위아들이 수군거렸다. 그래도 접근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물론 사람만 접근하지 않은 것이지만….

푸히잉, 이마에 멋있는 은색 뿔을 단 유니콘 한 마리가 타닥타닥 다가와 이리의 옆에 털썩 앉더니 손길을 종용했다. 이어 뀌이익, 멋진 꼬리를 단 봉황 한 마리가 훌쩍 날아와 반대쪽 옆에 앉고. 매애옹, 수염이 기다란 고양이가 살금살금 걸어와 이리의 발치에 앉았다.

판타지 월드도 오래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자, 이제 이화 선배,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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