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인들은 그러한 욕망의 사슬을 끊어 낸 이들이다. 극락에 옴으로써 모든 욕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애초에 욕망이란 게 없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극락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욕심을 버리면 그 자리에는 행복이 찾아오는 법이지. 마음을 비운다면 중간계에 있더라도 극락에서 사는 것과 다름이 없어. 도진아, 너도 욕심을 비우려고 노력해 봐.”
“음. 포기합니다. 저는 절대 극락에 못 올 것 같아요.”
“왜?”
“스승님의 손을 잡으면 포옹하고 싶고, 포옹하면 뽀뽀도 하고 싶고…. 뽀뽀까지 하면 그다음은 더한 걸 바라게 되겠죠.”
“…그런 단계에도 마지막 단계가 있지 않아?”
“스승님, 제자의 욕망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하아. 이걸 다 까뒤집어 보여 드릴 수도 없고.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랑 방법이 있는지 아세요? 언젠가 침대에서 전부 알려 드릴게요.”
“그러니까 전부 알려 주면… 욕망이 해소되는 거잖아.”
“아니죠! 한 번 하고 나면 두 번 하고 싶고, 두 번 하고 나면 세 번 하고 싶고. 그렇게 9999불가사의, 9999무량대수, 구골플렉스….”
“알아들었어. 그만하자.”
이리가 팔을 휘저었다. 제자를 기다려 주지 않고 냉큼 통로를 건너 버리는 스승의 귓가가 살짝 붉었다. 물론 제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연신 히죽거렸다.
다음으로 넘어온 곳은 현대 한국과 비슷한 도시였다. 다만,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는 없고, 마차와 자전거들이 도로를 다니는 모습이 꼭 저승을 연상케 했다.
“어머, 이리 선인님?”
“이리 선인님! 극락에서 다 뵙네요. 혹시 돌아가신 건 아니죠?”
“앗, 선인님. 기도식 소문은 들었는데, 혹시 그 옆은 제자분입니까?”
거리를 걷던 이들이 죄다 이리를 알아보고 모여들었다. 이리는 그걸 또 다 웃으며 인사를 받아 줬다. 도진은 이때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인간계의 인간들은 이리를 못 알아보기라도 하지만, 위아 세계에서는 이리를 못 알아보는 이들이 없다. 뿌리 단계에서 죽어도, 혼령이 된 순간부터 이리 선인의 존재를 알게 되기 때문에….
‘하. 인간계보다 더 데이트하기 어려운 곳이었어!’
도진은 뼈저린 깨달음을 얻고서야 이리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팔짱 낀 채로 어떻게든 한 발짝, 한 발짝 이동해서 도자기 센터까지 왔다. 극락인들은 다행히 도자기 센터 안까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등에는 하얀 날개, 머리 위에는 노란 링을 단 천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천사 도자기 센터입니다. 이리 선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녕. 오랜만이야, 엘. 이쪽은 내 제자, 김도진. 도진아, 이쪽은 천사 도자기 사장인 천사 엘이야.”
“안녕하세요, 도진 씨.”
“안녕하세요.”
곱슬곱슬한 짧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미청년이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도진은 악수하면서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등 ‘엘’로 끝나는 여러 천사를 떠올렸다. 그들 중 하나일 것 같긴 한데, 굳이 물어볼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엘은 둘을 3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선인님을 위해 아주 귀한 차를 준비했다며 다과를 내왔는데 바로 금광초 차였다. 정말 귀한 차가 맞았다.
“최근에 바리공주가 들렀었어?”
“예. 얼마 전에 칠성신 생일 선물 제작을 맡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덕 대신에 금광초를 달라고 했더니 풀잎을 한 줌 주고 가시더군요. 옥황상제와 소별왕께 드리고 얼마 남지 않은 걸 선인님께 대접하는 겁니다.”
“저런. 안 그래도 되는데. 대여점에서도 금광초 차를 마시고 있거든….”
심지어 아예 텃밭에서 키우고 있다.
“하하, 그렇습니까. 선인님께서도 이 향 좋은 차를 즐겨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엘은 천사답게 아까워하거나 배 아파하지 않았다. 도진은 ‘천사’와 같은 갈래인 이리의 신령들과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이해자라면… 이리에게 내온 금광초 차는 아까워하지 않겠지만, 도진에게 내온 것은 당장 도로 가져갈 것이다. 마신 것도 도로 내뱉으라 할지도 몰랐다. 같은 신령인데 참 차이가 났다.
노란 링을 단 다른 천사 직원이 ‘천사의 나팔 소리’ 세트를 가지고 왔다. 이리가 추가 주문한 미니어처 버전 하얀 도자기 찻잔 세트도 함께였다. 놀라운 점은 두 세트가 전부 나전칠기함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AS인데 나전칠기함에다 담아 주는 거야? 이럴 필요 없는데. 함은 다시 가져가고 내용물만 줘. 도진이가 ‘입의 문’ 가지고 와서 여기에 넣으면 안 깨져.”
“다른 분도 아니고 선인님께서 사용하실 제품인데 어떻게 그런 무성의한 대접을 해 드리겠습니까. 저희의 성의를 받아 주세요, 선인님.”
“으음……. 그럼 잘 받을게. 고마워.”
속으로 ‘받으세요. 제발 받으세요. 받읍시다’ 염불을 외우고 있던 도진이 얼른 찻잔 세트 두 개를 입의 문 안에 넣었다.
끼웅, 끼웅끼웅!
“야, 야. 참 나. 자기 거라는 건 귀신같이 알고 달라붙네.”
도진이 나전칠기함에 달라붙은 끼웅이를 떼어 냈다. 그 모습을 본 엘이 웃었다.
“선인님께 인형 놀이 취미가 생기셨나 했는데, 작은 다기는 어린 잡귀를 위한 것이었군요.”
“응. 귀엽지. 이름은 끼웅이야.”
“잡귀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희 극락에서는 아주 희귀한 존재이죠. 끼웅아, 안녕. 너는 꼭 덕을 많이 쌓아서 극락에 와야 한다. 기다리고 있으마.”
끼웅!
엘의 인사는 얼핏 듣기에는 다정한 인삿말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죽음을 기다린다는 뜻이라 도진은 조금 섬뜩했다.
“김도진 씨, 도진 씨도 나중에 극락에서-.”
“아뇨. 저는 스승님과 함께 천년만년 현세에서 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지 않겠습니까?”
“절대요. 죽을 일 없습니다.”
“70억 년 후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태양계를 잠식하면 지구는 어차피 소멸합니다.”
칠계는 모두 지구에 기반을 둔 세계다. 그러므로 지구가 없어지면 칠계도 없어지지 않겠냐는 뜻인데, 도진의 생각은 달랐다.
“지구를 떠나야 할 때가 되면 천지신명이 어련히 알아서 다른 외계행성에 다시 기반을 만들어 주겠죠. 그때쯤에는 인류도 이미 다른 은하에 자리 잡고 우주여행 하면서 잘살고 있을 거고. 스승님과 저도 우주여행 중인 우주선에 타고 있을 거고.”
“하긴 선인님들은 다른 행성에 다녀오신 후 저희에게 특별한 재료를 전달해 주시곤 하시죠. 제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선인님들을 믿어 봐야겠군요.”
엘은 빙긋 웃고는 찻잔을 입에 댔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생각하는 투라 도진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늘 그렇듯 제 기분을 숨기지 않는 제자로 인해 이리는 담소를 일찍 끝내기로 했다.
“엘, 우리는 이만 일어날게. 도진이가 무슨 솜사탕을 먹고 싶다고 하던데 어디서 파는지 알아?”
“구름 솜사탕 말이군요. 요즘 유행하는 간식이라 온갖 곳에서 파는데, ‘판타지 월드’의 성도에서 파는 솜사탕이 가장 맛있습니다.”
“추천 고마워.”
“이제 또 언제 만날까요? 위대한 능력을 갖고 계시니 종종 들러 주시지요. 극락은 심심한 곳입니다.”
“대여점이 워낙 바빠서 말이야. 하지만 태양이 부풀기 전에는 또 올 테니 걱정하지 마.”
이리가 잘 하지 않는 농담을 던지며 일어났다.
도진과 이리는 아쉬워하는 엘과 헤어지고 로비로 내려왔다.
끼웅, 끼우웅.
심보 고약한 얼굴을 한 도진을 끼웅이가 위로했다.
“야, 간지러워. 가슴 건들지 마. 내 가슴은 스승님만 만질 수 있어.”
“도진아. 나 말고 스승이 있어?”
“에이, 왜 이러실까.”
도진이 이리의 팔꿈치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이제 현실 부정과 외면은 그만하시라니까요. 스승님의 철벽이 70억 년 후에도 남아 있을까 봐 걱정이에요. 그때가 되면 저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사리가 굴러 나올지도. 아니다. 이대로면 7개월만 지나도 탈탈 흔들 때마다 사리를 뱉어 낼 거예요.”
“그럼 난 사리 주워다가 ‘애밤송이’ 담아 놔야겠네. 사리는 항상 부족해서 애밤송이 의뢰 들어올 때마다 곤란하거든.”
“스승님…. 정말 너무해요. 잔인해요. 제자 울어요.”
끼우웅.
“이것 봐요. 오죽하면 끼웅이도 잔인하다잖아요.”
“끼웅이는 얼른 솜사탕 먹고 싶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아, 맞다. 여기서 판타지 월드로 가는 트램이 있어. 트램 타고 갈까, 아니면 통로로 갈까?”
“당연히 트램 타고 가야죠!”
도진이 헤헤, 웃으며 슬며시 손도 붙잡았다. 이리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도진의 손을 털어 냈다. 도진은 그에 기죽지 않고 팔짱을 꼈고, 이리는 팔짱은 허락했다. 도진이 희희낙락 신나게 걸었다.
극락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트램 정류장에 향하는 그때였다.
“앗, 이리 선인님 아니십니까?”
“이리 선인님!”
“선인님!”
한 무리의 훤칠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등 뒤에 1부터 7까지의 숫자가 적힌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그 선인들은 바로 칠성신이었다. 첫째는 40대의 외양, 가장 막내는 소년 외양인데 사실 그들은 전부 동갑인 쌍둥이 형제들이었다.
“선인님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아…. AS 맡긴 게 있어서 찾으러 왔어. 너희도 바리공주의 선물을 찾으러 왔구나.”
“역시 선인님은 모든 걸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아, 김도진도 있었군. 기도식 이후로 처음 뵙는구나. 잘 있었느냐?”
“예. 안녕하세요.”
도진은 훤칠하다고는 해도 저보다 작은 선인들을 한껏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앞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둘을 둥글게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그냥 로비로 내려가지 말고 바로 통로로 이동할걸.
끼웅끼웅!
“아아, 그래. 네가 끼웅이랬지. 반갑다. 선인님, 마침 잘 만났습니다. 저희가 지금 며칠째 의견 통일이 안 되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의견 통일?”
“예. 스승님 생신 선물에 대해… 일단 어디 좀 들어가시죠.”
“그래.”
이것 봐. 이럴 줄 알았어! 도진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