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알걸.”
이리가 설명서를 떼어 냈다. 도진은 이리의 말대로 A4용지에 폰트 사이즈 14는 될 법한 크기로 큼직큼직하게 써 놓은 설명서를 보자마자 숨겨 놓은 이유를 알았다. 나전칠기함은 이렇게 멋있고 찻잔도 고상한데 설명서는 당장이라도 디자이너를 구해 주고 싶었다.
“다행이야. 무상 AS 기간이 10년이네.”
“그럼 신청하면 다시 배송해 주나요? 극락에서 대여점까지, 무료 배송?”
“응. 그런데 배송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
“얼마나요?”
“다음 달 중순쯤 도착하려나.”
오늘이 11월 21일이니 거의 한 달이 걸리는 셈이었다.
“제가 ‘한국인은 빨리빨리’ 정신으로 자라긴 했지만 그래도 좀 너무 늦는 거 아닌가 싶은데요.”
“아마 만들기는 며칠이면 만들 거야. 다만 배송이 오래 걸려서…. 극락에서는 수신할 때도, 발신할 때도 아주 까다롭게 물품 검사를 하거든. 사전 검사에만 3주는 소요돼.”
“참 나. 무슨 진현계도 아니고…….”
이리는 진현계는 접수에만 1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아!”
투덜거리던 도진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눈을 반짝 빛냈다.
“스승님, 그러면 이건 어때요? 우리가 직접 가서 찾아오는 겁니다!”
“극락에 가고 싶어?”
이리가 빙긋 미소 지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극락에 가 본 적 없잖아요. 이제 곧 왕이 되는데도 아직 칠계 전부를 가 보지 못했다니 이게 말이 되나요?”
“2대 왕도 진현계와 중간계 말고는 아무 데도 간 적 없었긴 해. 하지만 극락에 가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천사들과 안면을 터놓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거야.”
“간다는 뜻이죠?”
“그래.”
“좋았어! 멀리 나비 가지고 올게요!”
도진이 후다닥 이물을 가지고 왔다. 이리는 멀리 나비에 천사의 나팔 소리 세트 AS 신청과 함께 미니어처 찻잔도 따로 주문했다. 나름대로 대여점 일을 돕고 싶어 하는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하는 끼웅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도진의 감시하에 ‘우리가 직접 찾으러 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도진은 정원에 나가 멀리 나비를 날리며 크크큭, 낮게 웃었다.
데이트! 그것도 극락 데이트!
이리와의 야외 데이트는 무척 어렵다. 나갔다 하면 데이트는 뒷전이고 위아들만 도와주다가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스승의 날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극락에는 스승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위아가 적겠지? 이미 욕구가 다 이뤄진 녀석들만 존재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순탄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어…!’
처음 가는 곳이고, 인간 사회에는 아무 정보도 없는 곳이라 데이트 코스를 미리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유감이었다.
* * *
극락에서 3일 후 물건을 가지러 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도진은 3일간 부지런히 극락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의 원천은 물론 이리의 신령들이었다.
이해자
극락엔 가본적없는디,, 뭐 듣기로는 구름말랑솜사탕이 맛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만
학문가
극락? 극락 가? 그럼 미라클 편집숍에서 도자기 필통 사와라
약사
극락이면 천리단길 구름 그네가 유명하지 포토존도 잘 되어있으니 꼭 극락 전용 카메라로 사진 찍고~
구름 말랑 솜사탕, 미라클 편집숍, 천리단길 구름 그네.
신령 셋에게서 얻은 정보를 머릿속에 잘 입력해 놓는 동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오후 두 시, 평소보다 이르게 대여점 문을 닫은 도진이 팔랑팔랑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리의 옆에 붙었다.
이리는 이미 극락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본래 극락은 출입국장을 통해 가는 게 일반적이나, 하늘배를 타고서도 열여섯 시간은 걸리는 곳이라 대여점의 바쁜 업무를 감안해 통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스승님, 가요.”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렸네. 그렇게 극락에 가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딱히 극락을 원했던 건 아니에요. 전 사실 스승님과 둘만의 데이트를 즐길 수만 있다면 극락이 아니라 하계라도 좋아요.”
끼웅.
둘만의 데이트 같은 헛소리는 하지 말라는 듯 끼웅이가 이리의 어깨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도진은 혀를 차며 끼웅이를 제 셔츠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야. 너는 운 좋은 줄 알아. 우리 덕분에 극락에도 가 보고. 너 같은 덕 없는 잡귀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
끼웅, 끼웅. 끼우웅.
“뭐? 네가 찻잔을 깨뜨린 덕분이라고? 어이없네. 스승님, 이 녀석 갈수록 뻔뻔해지지 않아요? 대체 누굴 닮는 거지.”
“너만 모르고 세상 사람 다 알걸.”
“스승님, 굳이 이 녀석까지 데리고 갈 필요가 있나요. 어른스러워지고 싶다는데 그냥 어른스럽게 집 지키라고 하죠.”
“용마도 데리고 가는데 끼웅이 안 데리고 가면 삐지지.”
“용마도 간다고요?”
기다렸다는 듯이 타박타박 다가온 망아지가 도진의 다리에 주둥이를 비비적거렸다.
“극락에는 용마가 좋아하는 버섯 군락지가 있거든. 채집하는 순간 시들어 버리는 특성이 있어서 직접 데려가서 먹이는 수밖에 없어.”
“별 식물이 다 있네요.”
푸히힝.
반사적으로 용마의 수염을 쓸어 주면서 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가 아니라 가족 여행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리 선인, 내가 죽은 이유를 알려 줘라!’, ‘이리 선인, 길을 잃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줘라!’ 할 위아들은 없을 테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럼 이제 갈까. 네가 먼저 들어가렴.”
“같이 가요, 스승님.”
도진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는 그 손을 힐끔 보고 말았다. 그러자 도진이 확 이리의 팔을 붙잡았다.
“가요!”
단단하고 굵은 팔뚝으로 이리의 팔짱을 낀 도진이 콧김을 내뿜었다. 이리는 역시 끼웅이의 뻔뻔함은 도진이 원인인 게 맞다고 생각했다.
둘은 통로로 넘어갔다.
극락은 12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동물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노래할 듯한 동화 마을도 있고, 구름에 탄 신선들이 껄껄껄 웃으며 도화주를 마실 듯한 신선 동네도 있다. 과학과 기술 문명이 최고로 발전한 AI 인공지능 도시 옆에 소와 닭과 양을 키우는 전원적인 산골 마을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 다양한 지역 중 그들이 가장 먼저 발을 들인 곳은 선치 마을이라는 산골 마을이었다.
농사짓고 있던 이들이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둘에게 몰려들었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이리 선인님이로군요. 처음 뵙습니다.”
“이리 선인님! 생전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다시 뵈니 좋네요.”
이리가 하나하나 인사하는 동안 도진은 옆에서 뚱하게 서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인님. 극락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필요한 게 있어서 왔어. 이제 바로 도시로 나가야 해. 여긴 용마에게 버섯을 먹이려고 들렀는데 근처에 버섯 군락지가 있을까?”
“제 군락지로 오시지요. 진현계에 3년에 한 번씩밖에 납품하지 않는 특등품 용지느러미 버섯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고마워. 우리는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하고 용마만 안내해 줘. 값은 얼마야?”
“제가 어찌 선인님께 덕을 받겠습니다.”
염소 영물이 생전에 이리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고, 그 덕에 극락에 올 수 있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도진이 용마의 긴 목을 쓰다듬다가 경고했다.
“이 녀석 먹는 양 상당할 텐데. 버섯이 안 남을지도 모릅니다.”
“선인님의 용마라면 전부 뜯어먹어도 됩니다.”
“그러면 진현계에 납품 못 하잖아요. 그럼 덕도 못 받고.”
“사실 덕이 많아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미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요.”
염소 영물이 미소 지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옆에서 다른 위아들도 영물을 거들었다. 결국 둘은 값을 치르지 않고 용마만 풀어 줬다.
“세 시간 후에 데리러 올게.”
“스승님, 여섯 시간 후요.”
“…여섯 시간 후에 데리러 올게.”
“예, 잘 먹여 주고 잘 놀아 주고 있을 테니 걱정마세요. 네가 이리 선인님의 용마구나. 거참 잘생겼다.”
“든든하게 먹고 선인님을 지켜 주거라. 알았느냐?”
끼히잉.
극락인들이 용마를 쓰다듬으며 버섯 군락지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도진이 말했다.
“극락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더니 그 말이 맞네요.”
흔히들 욕망에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욕망은 욕망을 부른다. 천만 원을 모으면 일억을 갖고 싶고, 일억을 모으면 십억을 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