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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60화 (160/203)

“둔갑 능력도 이토록 훌륭하니 너는 앞으로 나보다 더욱 큰 존재가 될 것이다.”

산신령이 고용한 이는 다른 고을의 믿을 만한 퇴마사 가문 둘째 도련님이었다. 약관에 든 퇴마사와 노루는 구름과 말, 배를 타고, 산과 강과 들을 건넜다. 마침내 천지천해 입구 앞에 도착했으나 노루는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형님. 지금 가면 형님이 죽을 때까지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거야. 나는 형님이랑 여기서 살고 싶어.”

“나도 널 떠나보내기 싫어.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무척 노하실 거야. 우리 도망치자.”

소년과 노루는 천지천해의 입구 앞에 신발 두 켤레를 버려 두고 땅끝으로 도망쳤다.

둘은 새로운 고을에 잘 정착했다. 소년은 퇴마사 가문에 고용되어 아직 미숙한 어린 퇴마사인 척하며 돈을 벌었고, 노루는 약초 방을 운영했다.

소년은 좋은 처자를 만나 혼인하여 아이도 셋이나 뒀다. 그 아이가 자라서 또 아이를 낳았고, 그때쯤 소년은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둘이 있는 자리에서 노루가 말했다.

“형님. 나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소. 이 능력으로 당신을 살릴 테니 비밀을 지켜 주시오.”

“그러지 마라.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형님만 함구하면 아무도 모른다오.”

노루는 소년의 병을 치료했다. 사람들은 신기해했으나 노루가 가진 능력이라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소년의 첫 손주가 천연두에 걸려 크게 앓았다. 저승사자까지 찾아와 소년이 주술로 내쫓는 일이 거듭 반복되었다. 소년은 노루를 불렀다.

“제발 내 손주를 구해 주게. 우리는 가족이 아닌가.”

“형님의 손주에게 저승사자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지 않소. 병이 나으면 의심이 싹틀 것이오.”

“상관없네. 그러면 또 마을을 떠나서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면 되지. 제발 내 손주를 구해 주게.”

노루는 고민하다가 그의 손주를 낫게 해 줬다. 손주의 병이 낫자 마을 사람들의 의심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같은 병에 걸린 아이들의 부모가 찾아왔고, 그 다음엔 같은 병으로 아이를 떠나 보낸 이들이 찾아왔다. 심지어 나라 관리직마저 찾아오니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마을을 떠나야겠다. 짐을 챙기거라.”

“형님. 늙은 몸으로 그리할 것 없소. 나만 떠나겠소. 그동안 고마웠소.”

노루는 환한 대낮,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노루로 변했다. 전신을 감싼 황금빛의 털과 구슬 같은 까만 눈. 신묘하게 영험한 분위기에 모두가 멍하니 보는 사이 노루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노루는 천지천해가 아니라 금강산으로 돌아갔으나 산신령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아직까지도 건재하던 퇴마사 가문과 마주쳤다.

“네가 바로 아랫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금 노루구나. 그 병을 낫게 한다던!”

그들은 단번에 노루를 알아봤다. 그때부터 길고 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산, 강, 들, 바다, 늪.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안 쫓아오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형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형님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그만 도망쳐라. 독 안에 든 쥐야. 얌전히 우리의 약재가 되어 줘야겠다.”

노루는 뒷발이 접질리고, 앞발은 화살에 관통되고, 목엔 밧줄이 묶인 채 퇴마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스스로 치유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생이 끝나는구나. 말로가 비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퇴마사들이 이동을 멈추고 한곳을 바라봤다.

“…이봐. 너는 누구지? 우리는 성서 가문이다. 누구길래 우리 앞을 막느냐.”

“지나가는 길에 노루 울음소리를 들어서 말이야. 그 노루를 놓아 주어야겠어.”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노루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리 선인이었다.

“하.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를 과소평가하는군. 어디 겨뤄 보자.”

“겨루기는 뭘…. 너희가 노루를 놓고 갈텐데.”

퇴마사들은 이리의 말대로 노루를 놓고 얌전히 떠났다. 이리가 한 걸음 걸어오자 화살이 꽃잎으로 변해 사라지고, 또 한 걸음 다가오자 밧줄이 끊어졌으며, 또 한 걸음 걸어오자 접질린 발목이 나았다.

“괜찮아? 금강산 신령과 동지가 말한 특별한 능력을 지닌 노루가 너구나. 보자마자 알겠어.”

동지는 형님의 이름이었다.

“형님은 잘 계시오?”

“그는 평온하게 눈을 감았어.”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오?”

“네 마음이지. 좀 더 수련을 하다가 소영물이 되면 의원으로 가는 걸 추천해.”

“나는 선인님의 권속이 되고 싶소.”

“나는 권속은 두지 않아.”

“그럼 선인님의 수하가 되겠습니다. 나는 금강산 산신령님과 동지 형님께 제대로 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급히 떠나야 했고, 내 은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지도 못했습니다. 선인님은 제 세 번째 은인입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은혜를 갚으며 살겠습니다.”

노루는 곤란해하는 이리 선인을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다. 그러다 관조자라는 심복이 하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한 명이 있다면 나는 왜 안 된단 말인가?

심복 자리에 더더욱 집착하게 된 노루에게 결국 이리가 백기를 들었다. 이리는 노루에게 약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렇게 약사 신령이 탄생했다.

* * *

“잠깐만요…. 스승님이랑 만난 부분은 짧고, 약사 님 혼자 돌아다닌 부분만 존나 길잖아요. 존나 지루하잖아요.”

“서사를 알려면 지루해도 읽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

약사가 뻔뻔하게 차를 호로록 마셨다.

“스승님, 그때 정말 곤란하셨겠네요.”

“응. 막무가내로 수하가 되겠다고 따라다니니까 이걸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

“하아. 진짜 귀여웠겠다. 곤란해하는 스승님….”

“…….”

심복들의 뜨거운 시선이 이리에게 내리꽂혔다. 이리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약사 신령님도 우여곡절이 많으셨군요. 오래 전 일이지만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영수가 말했다.

“순박하네. 뭐. 다음 차례 녀석보다는 내가 좀 더 고생한 편이지.”

“순박하다니…. 다음 차례라면 누구입니까?”

“야, 학문가. 네 차례다.”

약사는 치유 능력을 언급하지 않는 한영수에게 속으로 높은 점수를 줬다. 비슷한 생각 중일 학문가가 넓은 소매에서 부채를 꺼내 팔랑거렸다. 긴 생머리 또한 함께 휘날렸다.

“나는 3천 년 전, 한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 * *

붓은 인류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비단 붓뿐만이 아니라 종이, 바퀴, 도로 등 많은 문물의 시작이 인간이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인데 그 이유는 당연히 태고의 선인이란 존재 덕분이다.

태고의 선인은 일찍이 인간들에게 붓을 알려 줬고, 인간들은 각양각색의 붓을 창조해 내기 시작했다.

토끼털, 양털, 말털, 여우털, 족제비털. 온갖 종류의 짐승 털로 붓을 만든 인간은 나중에는 위아의 털까지 넘봤다.

학문가를 만든 사람은 고조선 사람으로, 여성이었지만 남성으로 가장하여 붓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기도 했다.

그자는 어렵게 구한 복배바리의 털과 토끼털을 섞어서 수를 만들고, 삼백 년 묵은 나무로 축을 만들었다. 재료를 구하는 시기까지 포함하여 1년이나 걸려 만든 붓 한 자루를 많은 이가 탐냈다.

“이보게. 내가 아주 비싼 값을 쳐주겠네. 내게 팔게나.”

“나는 저치보다 두 배를 얹어 주지. 나에게 팔게.”

“미안하지만 이 붓은 파는 붓이 아니오. 다른 붓을 사 가시오.”

“팔지 않을 거라면 왜 만들었나?”

“내 장남에게 줄 것이오.”

그녀는 딸 둘을 낳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러했듯, 딸 둘도 아들 둘로 남장시켜서 양육했다. 장녀, 정연은 글솜씨가 좋아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모두 납득하고 돌아갔다.

붓을 완성한 후에도 손질을 멈추지 않으며 정성을 쏟은 결과 장녀의 손에 들어갈 때 붓은 이미 귀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의식이 있다.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말은 하지 못한다. 대체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데 이리 선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나는 살아 있나? 나는 죽어 있나? 나는 무엇인가.’

귀물이 된 붓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장녀는 명필가로 활약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그녀를 남자로 알고 있는 한 무사와 특별한 교감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정연은 무사에게 성별을 밝힐지 말지를 고민했다.

어느 날 무사가 그녀에게 벼루를 선물했다. 용과 봉황이 오목하게 조각된 풍연자였다. 어떤 장인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평범한 벼루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명필가는 무사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붓은 벼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무사가 정연의 성별을 알고 기뻐 날뛰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성별이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날 터이므로 그들은 집을 떠나 아무도 둘을 모르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우연히도 여인도 명필가를 할 수 있는 고을이라 이번에는 정말 여성 명필가가 될 수 있었다.

하루는 퇴마사 가문에 글씨를 써 주러 갔는데, 가문의 아이가 풍연자를 탐냈다.

‘안 된다. 제발 풍연을 넘기지 말거라. 풍연은 내 친구다.’

붓이 뻐끔거렸지만 정연은 당연히 듣지 못했다. 어림없이 풍연자가 퇴마사 아이의 손에 넘어가려는 그때였다.

“음. 그 벼루는 갖지 않는 게 좋겠는데.”

청아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 이리 선인이었다.

“선인님, 제 아이가 갖고 싶어 합니다. 명필가도 주겠다 하고요. 반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아이와 명필가처럼 이 붓과 벼루에도 의사가 있거든. 너는 안 그래도 벼루가 많잖아. 하나를 아이에게 주렴.”

“알겠습니다. 선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라야지요.”

붓은 크게 안도했다. 안도하느라 정신이 쏠려 이리에게 감사 인사하는 것을 잊고 그대로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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