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 돼요? 안 닦아 주고 애도 좀 축축해진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감기도 걸리고 해야, 아 얼굴을 물에 담그면 안 되는구나-, 얼굴이 젖으면 닦아야 하는구나-. 깨닫는 법이죠.”
“끼웅이가 안에서만 이러지 밖에 나가면 물에 안 젖게 잘 핥아 먹어.”
“그게 더 문제라는 생각 안 하세요? 오냐오냐하니까 집에서 더 애기가 되는 거예요. 이러면 다 큰 후에도 우리가 보살핌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계속 보살펴 줘야 한다니까요. 우리가 얘한테 효도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어요.”
“이 쪼그만 애 보살피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대화를 듣던 약사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영락없이 애 키우는 부부의 대화인지라….
“하, 스승님. ‘이 쪼그만 애’라고요?”
“그래. 쪼그만 애. 왜?”
“미친.”
도진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존나 귀여워.”
“푸훕.”
차를 뿜는 약사에게 세 명의 시선이 꽂혔다. 약사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죄송합니다. 알콩달콩 대화 계속하세요. 저는 그냥 선인님한테 대놓고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오랜만에 봐서.”
“…….”
알콩달콩 대화를 완전히 끝내 버리는 이야기였다.
“오랜만?”
“어…….”
“오랜만이라니. 저 말고 또 누가 있었습니까? 정말 궁금하네요. 말씀해 보세요. 하하하….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네.”
살벌하게 치켜뜬 붉은 눈에 약사가 딸꾹질을 했다.
* * *
저녁에 이해자가 연인을 데리고 왔다.
이름은 한영수, 성별 남성, 나이 51세. 부산에서 자기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 기업인. 인물이 훤칠하고 성격은 순박한 사람이다. 다만 질투심은 좀 많은데, 이해자는 그 점이 제일 좋다고 했다.
“서, 선인…. 네가 그 이리 선인이라고…? 아니, 당신이 그 이리 선인님… 이었습니까?”
“기억하는구나.”
“예…. 저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뒤늦게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한영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영수가 제 자식뻘 되는 외모의 이리에게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해자가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학문가, 약사와도 인사를 마친 한영수는 마지막으로 도진과 마주했다.
“크흠.”
“흐음.”
도진과 한영수는 어색한 상황에 맞닥뜨린 적 있었다. 2년 전 이해자에게 퇴마 영상 건으로 찾아갔을 때, 둘의 격 없는 모습을 보고 한영수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오해했었다. 물론 오해는 곧장 풀렸지만, 서로 얼굴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네.”
그렇게 짧게 인사를 끝낸 한영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끼웅이였다.
끼웅!
테이블 모서리에 서서 인사받을 준비를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영안 능력이 희미해진 한영수는 어린 잡귀를 발견하지 못했다.
끼우웅…!
모처럼 용기를 냈지만 무시당해 버린 끼웅이가 당장 울면서 도진에게 안겼다. 신령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자 한영수는 뭔가 실수했나? 하는 얼굴이 되었다.
“끼웅아. 우리 자기 용서해 줘. 원래 이 나이가 노안이 오는 나이거든.”
이해자가 한영수의 영안을 잠시 트이게 하고, 한영수는 그제야 어린 잡귀에게 쩔쩔매며 사과했다.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 소파에 둘러앉았다.
이해자는 한영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보이지 않도록 중년 여성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둘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청년 모습이라 누군가 본다면 단란한 일가족으로 생각할 터였다.
“그런데 한분이 더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보, 관조자 신령님이랬지?”
“응. 지각인가봐.”
도진이 ‘여보’라는 단어에 오소소 올라온 팔뚝의 소름을 쓸어내리는 동안 이해자가 핸드폰을 꺼냈다. 따로 온 연락은 없었다.
“역시 안 오려나. 내가 말했잖아, 자기야. 관조자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충동적으로 온다고 했다가 마음이 바뀐 거겠지.”
이번엔 ‘자기야’란다. 손등까지 내려온 소름을 쓸어 없애는 도진의 반대편에서 학문가와 약사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태고의 선인의 무한한 경험 덕분일까. 닭살이 돋지 않은 유일한 이리가 잔잔히 미소지었다.
“온다고 말했으니 올 거야. 조금 더 기다리렴. 그보다 두 사람 얘기를 좀 해 줘.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
“부끄럽게도 제가 용기 내지 못하는 사이 해자가 먼저 말해 줬습니다….”
“이이가 반지까지 맞춰 놓고서는 우물쭈물대는 겁니다. 이러다 늙어 죽겠다 싶어서 제가 결혼하자고 했죠.”
이해자가 왼쪽 검지의 반지를 보여 줬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비싼지 짐작하게 했다.
끼우웅.
끼웅이가 호기심을 보이며 이해자에게 반지를 달라고 손을 뻗었다. 이해자는 흔쾌히 반지를 빼고는 조심히 가지고 놀라는 말을 덧붙였다. 반지가 없어진 빈손을 한영수가 붙잡았다. 손깍지 끼는 두 사람을 보고 약사와 학문가가 질색했다. 학문가는 여전히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면서 물었다.
“한영수, 자네에게도 가족이 있을 텐데 그들은 뭐라던가?”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고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아직 얘기하지는 않았으나 분명 축하해 줄 겁니다.”
“여동생은 이해자를 뭐라고 알고 있고?”
“용한 무당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아라고 하던가요? 이 위아 세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고요.”
이해자는 신령들 중 인간 사회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바로 무당이라는 직업으로. 주기적으로 신분과 모습을 바꾸면서도 무당이라는 직업은 변하지 않았다.
“보통 인간들이 무당과의 결혼이라면 안 반길 텐데.”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나 제 동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생이 이 사람을 내게 소개했으니까요.”
처음 듣는 얘기에 약사와 학문가가 배배 꼬았던 자세를 바로 했다.
“솔직히 안 궁금하지만 둘을 위한 자리니까 물어보긴 해야겠지. 그래, 자네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나?”
“아… 전혀 듣지 못하셨습니까?”
곧 배우자가 될 연인이 서운하다는 눈짓을 보내자 이해자가 헛기침했다.
“우리가 이런 사적인 얘기를 하는 사이는 아니거든.”
“그럼 선인님한테는? 이리 선인님. 선인님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 나는 들었어.”
그제야 서운하단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때 도진은 한영수란 인간에게서 굉장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 잠깐의 대화와 잠깐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격차가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그 사람의 지인들에게 열등감을 품게 되었다는 걸.
너무 당연한 수순이다.
왜냐하면 도진도 불로불사가 된다는 확신을 갖기 전에는 이리의 신령들과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으니까.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해자가 지금 이 시기에 한영수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 또한 깨달았다.
상대의 열등감과 불안을 눈치채고 확신을 안겨 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네가 첫 만남에 대해 얘기해 준다면 애들도 좋아할 거야. 속으로는 엄청 궁금해하고 있을 거거든.”
“별로 안 궁금한데요.”
“하나도 듣고 싶지 않은데.”
라면서 학문가와 약사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도진도 조금 궁금했다. 이해자가 이리에게 연애 얘기를 주절거릴 때 옆에 있긴 했지만, 첫만남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으니까.
이해자가 본래 사랑이 많은 스타일이라곤 하지만 어떻게 연애에 성공했는지 들으면 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아… 사실 그렇게 거창한 첫 만남은 아니었는데 부끄럽군요.”
한영수가 쑥스러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본래 영안이 없었는데, 스물다섯 살 생일이 지나며 갑자기 생겼습니다. 안 보여야 할 것들이 보이자 힘들어하는 저를 위해 동생이 수소문하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하다는 무당인 해자 선녀를 만났습니다.”
해자 선녀.
도진은 언제 들어도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평범한 인간은 만나기 쉬운 무당이 아닌데. 집이 잘 살았나?”
“유복하게 자랐으나 학문가 님의 말씀대로 해자 선녀를 만날 정도는 아니었죠. 동생 학교 선배의 아버지가 정치에 오래 몸담았는데, 그 인연으로 소개받았습니다.”
당시 한영수는 집 밖을 나가기도 무서워해서 동생이 홀로 무당을 만나러 갔다. 그때 이해자는 동생이 자리에도 앉기도 전 ‘네 오빠가 직접 와야지 왜 네가 오느냐’고 말하며 아주 간단하게 한국 최고 무당으로서의 위용을 뽐냈다.
이 얘기를 듣고 학문가와 약사는 어른이 어린애들 사이에서 주름잡냐며 이해자를 놀려 댔다.
“이틀 후 저는 반년 만에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가 해자 선녀를 만났습니다. 저는 한눈에 반했는데, 이 사람은 그때는 저를 어린아이로만 봤다더군요. 아직 영안이 완전히 열린 게 아니니 닫아 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그러면 인연이 끊길 것이 두려워 계속 열어 놓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찾아가서 귀신들에 대해 물으며 그녀를 괴롭했지요.”
“아, 그래. 알 것 같군. 이 녀석은 자기한테 집착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