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도 대여점엔 고객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도진은 전날만큼 화가 치솟지는 않았다.
바로 끼웅이와 삐웅이 덕분이었다.
“이보게, 김도진.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러다 여기서 겨울잠 들어 버리겠구만. 내 앞에 몇 명이 남았나?”
어떤 고객이 도진을 부르자 두 어린 잡귀가 서둘러 다가갔다.
끼우웅.
삐웅삐웅.
“으음?”
고객이 하얀 잡귀가 건네는 자그마한 메모지를 받아들자 이렇게 적혀 있었다.
53명
고객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잡귀 두 마리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어이, 김도진!”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으잉? 웬 잡귀?”
뒤쪽의 고객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새 직원들이 오자 당황했지만, 어쨌든 원하는 바를 얘기했다.
“의자가 흔들리는구만. 새 의자로 교체해 주게.”
끼웅….
삐웅, 삐웅.
끼웅이는 못한다고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삐웅이가 맡겨만 달라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두 잡귀가 접이식 의자 다리를 영차영차 끌었다. 그러나 의자는 두 잡귀에 비해 너무 무겁고 거대했다.
“이것 참. 자네들이 이 무거운 의자를 어떻게 들겠나. 어디로 가져가려는지 말하게. 들어 주겠네.”
삐우웅.
결국 보다 못한 고객이 직접 의자를 들고 삐웅이의 안내를 받아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서 멀쩡한 의자로 교체한 고객이 뭔가 내가 일을 다하는 기분인데? 라는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보게, 김도진!”
또 누군가 도진을 부르자 끼웅이와 삐웅이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도진은 대여점 중문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와, 씨. 제대로된 친구를 사귀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고객이 많을 때는 셔츠 주머니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던 끼웅이가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며 밥값을 하다니!
생각해 보면 그동안 스승님과 자신도 끼웅이에게 너무 유했다.
그래. 넌 겁이 많으니까 숨어 있으렴, 하고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성장하질 않았던 거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닐 수 있었던 녀석인데.
“이보게, 김도진! 차 리필 좀 해 주게!”
끼웅!
삐우웅!
누군가의 부름에 삐웅이와 끼웅이가 찻주전자를 들고 빨빨빨 달려갔다. 그런데 그 찻주전자는 미니어처 찻주전자였다. 덩치가 산만한 멧돼지 고객이 찻잔에 담긴 물방울 몇 개를 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서 한마디씩 했다.
“허허, 그것 참 소박한 리필이로군. 김도진을 부르지 그러는가.”
“어쩌겠는가. 차를 내주자마자 다른 직원 부르면 애들이 민망할 텐데. 그냥 아껴 먹어야지.”
도진은 끼웅이의 성장만 신기한 게 아니었다.
고객들이 진상을 부리지 않는다는 점도 신기했다.
차를 리필하자마자 면전에 대고 원샷 때린 다음 바로 빈 찻잔을 내밀던 진상 고객들이 어린 잡귀들의 서툰 대접에는 어쩌겠냐며 웃어넘겼다.
끼웅이는 일할 줄 아는 끼웅이였고…
고객들은 진상 부리지 않을 줄 아는 고객들이었다.
왜 나한테는 그렇게 성질 돋웠는지 어이없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마침 상담이 끝날 때가 되어서 정원 일은 둘에게 맡기고 대여점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고객이 막 나오고 있었다. 손에는 겨울잠 식량을 한보따리 들고 있었다.
“도진아, 다음 고객 불러 줘.”
“스승님. 저 드릴 말씀 있어요.”
“어?”
다음 고객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는 모습을 보고 도진은 상담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이틀째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청초하고 예쁜 선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할 말이 있어?”
“스승님 쉬게 하려고 거짓말했어요. 차 좀 마시면서 시간 보내세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대답하는 도진에게 이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거짓말이잖아. 할 말 있으면서.”
“…스승님은 정말 뭐든 다 알고 계시네요.”
“네가 내 눈을 보지 않고 말한다면 답은 하나지.”
“그럼 제가 할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고 계실 거잖아요.”
“으음.”
도진이나 이리나 둘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이리는 도진이 뽑아 준 겨울잠 식량 수량 확인 리스트를 잘 정리해서 옆으로 치웠다.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이는 도진이었다.
“끼웅이한테…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일모레면 삐웅이가 죽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끼웅이는 삐웅이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있고.
처음에는 끼웅이가 삐웅이에게 여러가지 알려 주는 게 많았다.
그림자를 먹는 방법, 찻잔을 쥐는 방법, 물을 핥아 마시는 방법. 주전부리 중 약과가 가장 맛있다는 것과 손수건 침대는 낮잠용이고 2층의 베개 침대가 취침용이라는 것까지.
삐웅이는 끼웅이가 하는 모든 걸 배웠다.
그리고 서서히 역전되더니 지금은 삐웅이가 끼웅이에게 많은 걸 알려 주고 있다. 단지 설거지나 차 대접만이 아니었다. 대여점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가르쳐줬다.
삐웅이는 끼웅이에게 고객들과 인사하도록 시켰다. 대여점을 자주 찾는 단골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게끔 했다. 평소에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던 이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 것. 엄청난 발전이었다.
“스승님, 삐웅이는 끼웅이의 친구이자 가족이고 스승이나 마찬가지예요…. 만난 시간은 짧지만 어쩌면 우리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고요. 그런 관계를 떠나보내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삐웅이가 원하지 않잖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에서 알릴 수는 없어.”
제자와 스승의 생각이 반대편에 있었다.
이리는 죽고 떠날 사람의 편이었고, 도진은 살아남을 사람의 편이었다.
“…….”
도진은 스승의 잔잔한 눈을 빤히 바라봤다.
입술이 뻐끔거렸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네, 본인의 의사 중요하죠.
저도 삐웅이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 녀석을 설득해야죠.
몇 날 며칠을 꼭 붙어 지내다가 갑자기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게 되는 끼웅이의 마음이 어떻겠냐고.
여기 앉혀 놓고 얘기해야죠. 끼웅이에게 알려 주자고, 어떻게든 타일러 봐야 한다고요!
만약 인간 사회라고 쳐도, 분명 의료진은 시한부 환자를 설득했을 거예요.
통하지 않을 걸 알아도 한번은 말해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스승님은 전혀 회유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한 번 더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 이렇게 바로 포기해 버려요?
스승님은 왜….
도진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리는 과거에도 그러했으니까.
하나둘 죽음을 택하는 태고의 선인들을 이리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왜 죽으려고 하는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어.’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고, 한번 말려 보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