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52화 (152/203)

“임금님의 우울증이 심해졌나 보네요. 보부상 형이 걱정이 많겠어요.”

“응, 그렇겠지….”

“그런데 만약 홍연이랑 저 중에서 둘 다 사퇴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둘 다 왕이 되나요?”

“내 직감으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둘 중에 한 명만 왕이 될 거야.”

“스승님의 직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당연히 제가 왕이 되겠죠?”

“모르지….”

“스승님의 소원을 이뤄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해요. 이제 내 소원만 이루어지면 되겠네. 뭔지는 스승님도 아시죠?”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잘 아는 이리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야, 김끼웅! 들었냐? 두 달 후면 내가 왕이 된다! 너희는 무려 왕의 수하가 되는 거야. 알겠냐? 얼마나 영광이냐!”

끼우웅?

삥!

끼웅이와 삐웅이가 도도도도 다가왔다. 용마는 오지 않고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진은 끼웅이와 삐웅이를 낚아채고는 공중에 번갈아 던지고 받으며… 저글링했다.

끼우웅!

삐웅!

두 잡귀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이리가 말할 게 더 있다고 하고 나서야 도진이 잡귀 고문을 멈췄다. 도진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실 사항이 무엇입니까, 스승님.”

“이건 사실 삐웅이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삐웅이요?”

멀미로 비틀거리던 삐웅이가 제 이름에 바로 섰다. 삐웅이는 이리 선인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돌려 끼웅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이리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았어.”

“뭔데 그러세요?”

“삐웅이가 얘기하길 원하지 않아….”

“…….”

도진은 이때 어떤 직감이 들었다.

선인의 길에 들어서며 직감이 강해졌는데, 길조보다 흉조를 더 강하게 느끼곤 했다.

도진은 지금 이 전율과도 같은 직감에 강한 확신을 느꼈다. 그리고 확인하기 위해 이리를 바라봤다. 스승은 당연한 듯 도진과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였다.

‘8일.’

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명인은 팔일살이다.

8일만 살고 죽는 위아였다.

* * *

세상 모든 위아가 오래 사는 건 아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종마다 수명이 천차만별이듯 위아의 수명도 천차만별이다.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걸려 끝내 소멸을 선택하게 될 만큼 불로불사하는 위아가 있다면, 단 며칠만 짧게 불타오르고 떠나 버리는 위아도 있다.

이렇게 단명하는 위아를 일명 ‘팔일살이’라고 부른다.

단명하는 위아들이 전부 8일만 살고 죽는 것은 아니나 90%는 8일을 넘기지 못하므로, 위아 세계에서는 짧은 수명의 대명사가 바로 8일이었다.

명인인 삐웅이는 11월 3일에 태어났다. 4일에 세지들이 대여점으로 찾아왔고, 5일에 이리와 도진이 명인을 데리고 대여점으로 왔다.

그리고 11월 6일인 지금 삐웅이의 생은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끼웅. 끼우웅.

삐웅?

끼우웅!

삐웅이에게 가장 아끼는 미니어처 찻잔을 양보하는 끼웅이를 보며 도진은 마음이 착잡했다.

삐웅이는 끼웅이에게 자신의 수명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용마는 오래 산 만큼 지식도 많아서 어제의 대화로 눈치를 챈 듯한데 끼웅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이었다.

삐우우.

삐웅이가 찻잔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서 도진의 앞에 왔다. 끼웅이가 시키는 대로 찻잔을 높이 드는 삐웅이에게 도진이 찻주전자의 차를 조금 떨어뜨렸다.

삐우웅.… 삐웅!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하다가 차를 죄다 흘려 버린 삐웅이가 소스라쳤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끼웅이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끼우웅, 끼웅.

삐이…….

끼우웅.

끼웅이가 삐웅이를 토닥이면서 전용 손수건 침대로 향했다. 삐웅이가 흘린 흔적을 가리키자 끼웅이는 도진을 가리켰다. 김도진이 알아서 닦을 거라는 뜻이었다.

도진이 티슈로 물 자국을 닦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모습을 마침 상담실에서 나오던 이리와 고객이 목격했다.

“허어. 김도진, 자네에게도 고민이란 게 있었나? 그렇게 한숨 쉬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도진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대여점의 단골, 마원이 껄껄 웃었다.

마원을 보니 도진은 더더욱 착잡해졌다.

왜냐하면 마원도 이제 죽을 날이 다 되어서 여생을 평안히 보내기 위한 이물을 빌리고자 왔기 때문이었다.

“저도 당연히 고민쯤은 있죠. 상담은 다 끝났습니까?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했네.”

“어디로요?”

“미국과 그리스에 들렀다가 천지천해로 갈 생각이야.”

“천지천해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하셨군요.”

“그렇네. 내 친구 장생이들도 다 천지천해에 갔으니. 이리 선인, 이물은 천지천해에서 심부름꾼을 통해 반납하도록 하겠습니다.”

“편한대로 해. 도진아, ‘연두 두건’ 주렴.”

“네.”

도진이 작업대에 준비해 뒀던 연두 두건을 마원에게 건넸다. 도깨비 감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이물로, 둔갑 능력이 없는 위아들이 주로 찾았다. 워낙 인기가 많은 탓에 마원은 이걸 빌리기 위해 18년 전에 이미 예약해 놓았다. 노후 준비를 잘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한번 써 보세요.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봅시다.”

“알겠네.”

마원도 궁금했는지 전신 거울 앞에서 두건을 착용했다.

털이 듬성듬성 벗겨진 회색 바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 구부정한 허리에 포근한 인상의 평범한 인간 할아버지 모습으로 변했다. 의상은 사계절 내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개량 한복이었다.

“에잉, 내가 이렇게 주름이 많단 말인가? 키는 왜 이렇게 작은가. 김도진 같은 이목구미 뚜렷한 나쁜 남자 스타일이면 좋겠는데.”

“어디 저 같은 외모가 쉬운 줄 아십니까? 제 얼굴은 지구 역사 통틀어 전무후무할 거라고요.”

“떼잉, 이리 선인. 혹시 고장난 게 아니요?”

“자기가 이렇게 생겨 놓고 왜 스승님한테 그러세요. 완전 이미지랑 딱이구만.”

도진의 핀잔에 마원이 혀를 차며 거울 속 자신을 살폈다.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돌았다가 포즈도 한번 취해 보는 마원의 옆으로 끼웅이과 삐웅이가 다가왔다. 작업대 끝에서 삐웅이가 삐이, 하고 마원을 불렀다.

“오, 대여점에 또 잡귀 직원이 늘어났는가? 점점 사람이 많아지는구만.”

마원이 잡귀들에게 손을 뻗었다. 겁먹은 끼웅이가 삐웅이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삐웅이는 오히려 마원의 손바닥에 올라탔다. 그리고 끼웅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삐우웅.

끼웅….

삐웅. 삐웅.

…끼웅.

망설이던 끼웅이가 친구의 손을 붙잡고 마원의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도진이 “오?” 했다. 친구 앞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건가… 하다가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저 작고 겁 많은 녀석의 행동을 아무리 삐딱한 도진이라도 허세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친구 앞이라서 용기를 내는 것이다.

허세와 용기는 많은 차이가 있고, 끼웅이의 행동은 분명 용기였다.

삐우웅.

끼웅!

삐웅이가 마원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쿡쿡 찌르자 끼웅이도 따라 찔렀다.

“이것 참 귀엽군. 너희 둘 중 하나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

삐웅.

끼웅.

단호한 거절에도 마원은 마음이 상하지 않은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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