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락과 저승, 하늘꽃밭과 천지천해에 새로운 종의 탄생을 알려야지요.”
“그렇군요.”
“…….”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까? 요즘 내 기억이 성치 않아서.”
“가끔… 이런 일이 있고는 했습니다.”
이리는 고요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천 년 전에도 새로운 종이 탄생했고, 그때 임금은 천지신명을 불러 축배를 들며 새로운 종의 탄생을 축하했다. 생명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남색 눈은 이제는 반짝임을 잃고 어둠으로 침잠해 있었다.
무한한 시간을 지닌 자의 무기력증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들에게 직접 알리겠습니다.”
“선인의 배려심이 무척 깊군요. 그러나 진현계 왕의 일이기에 선인께서 내게 가장 먼저 온 게 아닙니까.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중으로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는 왕의 옆에 서 있는 홍의동자에게 눈짓했다. 홍의동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보필하는 이들이 있으니 설마 잊지는 않을 것이다. 이리는 조금 안도했다.
“그나저나 이리 선인, 현무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의 후보는 사퇴를 결정했습니다.”
“벌써요….”
“아이가 심히 부담스러워하여 일찍 결정을 내렸다더군요.”
“홍연은 어떻습니까?”
“어제 염라대왕이 무슨 말을 했는데…. 홍아, 어제 그자가 뭐라 했더냐.”
왕이 묻자 오른편에 선 홍의동자 하나가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답했다.
“염라대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홍연이 왕이 된다면 진현계를 일부 개방해도 되느냐고 묻더군요. 진현계를 개방해도 됩니까?’”
“나는 뭐라고 대답했느냐?”
“‘그것은 왕의 마음이오.’라고 답하셨습니다.”
진현계 개방이라니, 이리는 조금 놀랐다. 도진도 아주 화끈한 아이지만 홍연 또한 매우 시원한 아이구나 싶었다. 누가 왕이 되든 진현계는 큰 변화를 맞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변화를 맞아야만 한다는 자연의 뜻이기도 했다.
“이리 선인. 그대의 제자는 왕이 될 준비를 잘하고 있습니까?”
“예. 요즘 들어 더욱 진지한 자세가 됐습니다.”
“다행이군요.”
왕은 마치 ‘불행하게 되었군요’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이리는 웬만해서는 차 맛을 가리지 않는데, 도진이 타 준 차가 몹시 그리워졌다.
“선인께 말씀드릴 내용이 또 하나 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홍아, 내가 어제 너에게 뭐라고 말했더냐.”
“임금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서 이 자리에서 내려가고 싶다. 하야 시기를 당기도록 하마. 이번 개천일에 내려갈 테니 염라대왕과 이리 선인에게 이를 알려야겠다.’”
“내가 그렇게 말했구나. 이리 선인,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개천일은 음력 12월 15일. 내년 1월 6일로 이제 약 두달 가량 남았다.
진현계 올라올 덕도 빠듯한 도진을 생각하면 너무 촉박한가 싶지만서도… 만물이 김도진이 왕이 되기를 원한다면 수가 생기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왕의 우울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제 더는 그에게 그 자리에 좀 더 남아 있으라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고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이리 선인…. 혹여 이후에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면 이제 내게 오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이제 개천일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색으로 칠한다면 회색 음영만이 가득할 탁한 음성이었다.
알겠습니다, 나직이 말하며 이리는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이리 선인, 왕께서 퇴임 의사를 밝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내가 다음 왕이 되면 어떨 것 같은가? 마고는 벌써부터 대모 소리를 듣고 있소. 백호는 천지천해 제일의 성군, 그대는 마지막 태고의 선인. 그렇다면 나도 왕 자리는 꿰차야 함께 어울릴 맛이 나지 않겠소?’
그렇게 말하던 어린 왕의 눈은 총기로 반짝였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호탕한 목소리와 오색 빛깔로 빛이 나는 듯한 환한 미소. 그의 주위는 언제나 시끌벅적했고, 몸짓과 언어 하나하나에 생기가 가득했다.
…지금의 왕은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저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불로불사의 존재를 괴롭히는 유일한 질병. 우울증이란 참으로 무서운 질병이었다.
씁쓸한 기분으로 궁궐을 나온 이리는 바로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금왕이 통로 사용을 자제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진현계를 오갈 때는 대부분 혼으로만 이동했다. 통로를 통한 이동보다는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육신의 안전도 걱정되고….
1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계단을 올라오던 도진과 마주쳤다.
“아, 스승님! 금방 오셨네요. 아직 만지지도 못했는데.”
“뭘 만지는데?”
“아.”
“…….”
“크흠.”
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아. 혼이 떠난 육신을 마음대로 만지는 건 파렴치한 행위야.”
“스승님의 제자가 짝사랑을 오래 하다 보니 미쳐서 좀 파렴치해졌습니다.”
“뻔뻔해지기도 했구나….”
“하루 이틀인가요. 내려오세요. 아직 주무시기엔 이르잖아요. 차를 내올게요. 작업대 앞에서 드실래요?”
“오늘은 날이 그리 춥지 않으니 정원으로 가져와.”
“네!”
이리가 정원에 나가니 망아지로 변한 용마와 끼웅이, 명인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옆에는 전기난로가 있었는데 도진이 갖다 둔 모양이었다. 이리가 난로 옆의 의자에 앉자 끼웅이가 명인을 데리고 다가왔다.
끼웅끼웅!
삐이웅?
끼웅!
삐웅!
이리가 웃었다.
“이제 삐이거리지 않고 삐웅거리네.”
끼웅끼웅!
한껏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한 끼웅이는 다음으로 정자와 피크닉 테이블, 수돗가와 오동 화로 등을 명인에게 소개하고 다녔다. 용마도 그 뒤를 타박타박 따라다녔다.
“스승님.”
차와 겉옷을 가지고 온 도진이 옆에 앉았다. 이리는 순순히 겉옷을 걸치고 딱 적당한 온도의 따뜻한 찻잔을 쥐었다.
“들었어? 삐이, 삐이 울더니 이제는 삐웅거리더라.”
“네. 웃기죠. 끼웅이가 한참을 교육했어요. 앞으로 같이 살 테니까 이름도 지었는데. 삐웅이 어때요? 잘 어울리죠.”
“…잘 어울려.”
도진이 엉거주춤 일어나 의자째로 바짝 다가왔다.
“저 꼴을 보니까 제 용마가 나타나도 저 녀석들이 질투하거나 텃세 부리진 않을 것 같네요. 안심이에요. 빨리 용마가 생겼음 좋겠다.”
“금방 생길 거야.”
“대략적으로 얼마나 금방이요?”
“20년 안에는 생기지 않겠어?”
하아아아아, 도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금방이네요. 아주 찰나예요. 눈 깜빡하면 지나가겠는데…. 스승님이랑 연애하는 게 빠를까요. 용마가 생기는 게 빠를까요.”
“글쎄….”
“역시 ‘백지’에 스승님과의 연애 여부가 아니라 시기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너무 아쉬워요.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에요.”
고작 그런 일을 두고 가장 후회된다고 말하는데, 과장도 없이 순수한 진심인지라 덕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진현계에서 우울증에 빠진 남자를 보고 온 이리는 열심히 설렜다가, 열심히 비아냥거리고, 또 열심히 후회하는 도진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진이 왕이 되면… 이 아이 또한 그처럼 될까?
이렇게 다채로운 감정과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도진이 음울한 얼굴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게 된다면….
그때 이리는 현왕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슬픔에 젖게 될 터였다.
“스승님, 진현계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도진이 이리의 눈앞에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잘생긴 눈썹 끝이 내려앉아 있었다. 붉은 눈에 깃든 걱정을 보며 이리가 미소지었다.
“큰일은 아닌데 무슨 일이 있긴 했지. 서윤이가 왕 후보에서 사퇴하기로 했고, 왕은 내년 중순이 아니라 개천일에 왕위에서 내려오겠다고 말씀하셨어. 1월이 되면 너와 홍연 중 누가 왕이 될지 정해질 거야.”
“엄청 큰일이잖아요!”
도진이 꽥 소리를 지르자 놀고 있던 세 마리가 깜짝 놀랐다. 도진은 소중한 극락 찻잔을 깨뜨릴까 봐 일단 침착하게 테이블에 올려 둔 후 다시 소리쳤다.
“내년 1월이라니. 다다음 달이라니! 물론 저는 마음의 준비는 다 한 상태지만….”
흥분하는 도진이 곧 침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