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뭔데?”
“뭐일 것 같나용?”
끼웅, 끼웅?
선인과 요괴 셋, 잡귀 하나가 도진을 바라봤다. 도진은 확신에 가득 차서 외쳤다.
“인간도, 위아도, 동물도, 벌레도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 있다. 이 모든 단서가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 외계인입니다!”
“…….”
“…….”
“하. 전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어요. 지구가 우주를 향해 신호를 쏘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 신호를 받은 외계인이 몰래 지구를 조사하러 올 거라고 말이죠.”
“음….”
“그러고 보니 그 외계인들은 인간을 보긴 했을까요? 지구인이란 죄다 종잇장 몸을 가진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앗, 생각해 보니 초고도 문명을 지닌 외계 행성에서 외계인을 몇 명만 보냈을 리는 없습니다. 적어도 부대 하나는 파견했을 테니 외계인이 인간계 곳곳에 와 있을 거예요!”
“…….”
“자기네 기술력에 비해 뒤쳐졌다고 비웃고 있겠군요. 한창 방심해 있을 녀석들에게 우리 지구에는 선인이라는 우주 최강 존재가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도진이 오랜만에 망상에 빠졌다.
이리도 오랜만에 고객 앞에서 얼굴 들기가 부끄러워졌다.
이튿날 오후, 이리와 도진은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존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대여점을 나섰다. 이리는 사실 도진만 보내려고 했으나….
세지들이 사는 곳은 전남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관방제림, 죽녹원 그리고 떡갈비가 유명한 바로 그 담양이다.
11월 초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은 단풍 구경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 안 그래도 우리 단풍 여행 가야 한다고, 가고 말 거라고, 11월 중순 전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귀에 가시가 박히도록 얘기했던 도진이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다.
‘제가 저번 주 내내 겨울잠 식량 비축해 놓은 거 아시죠? 다 단풍 구경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딱 담양 관광 기회가 온다고요? 이건 천지신명이 내려 준 기회입니다. 온우주가 스승님과 저 보고 담양으로 단풍 구경을 가라고 신호를 주고 있는 거라고요. 이 기회를 놓치는 건 운명에 대한 배신이에요. 당장 가야 합니다! 떡갈비! 떡갈비! 단풍 데이트!’
이리로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단풍 구경을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던 건 우리가 아니라 너 혼자고, 관광이 아니라 일이고, 천지신명이 바로 나고… 너는 운명론도 싫어했던 거 아니냐고.
하지만 이미 데이트 생각으로 기대에 부푼 도진의 표정을 보니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담양행이 결정되었다.
용마를 타고 내려오는 10분 동안 담양의 가을 데이트하기 좋은 곳을 모두 파악한 도진이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드라이브 코스로 안내했다. 그러나 이리는 갓길에 용마를 세웠다.
“도진아. 침입자가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에 단풍 구경하는 게 좋겠어.”
“하지만 우리에게 적대적인 외계인이면 어떡해요? 싸우게 되면 금방 끝나겠지만, 스승님은 분명 대화로 푸실 테고. 그러면 시간 오래 걸릴 텐데. 물론 저녁에 보는 단풍도 예쁠 거예요. 하지만 햇빛 아래에서도 보고 싶은걸요.”
“설마 정말로 외계인이겠니…. 그 아이에게도 단풍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서 그래.”
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님, 이미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하셨군요.”
“직접 봐야 알겠지만 대충은. 먼저 세지들 집으로 가자.”
“음, 네. 사실 저는 지금이든 이따가든 스승님이랑 단풍 데이트할 수만 있으면 돼요. 헤헤.”
그들은 다시 차를 돌려 세지들이 살고 있는 구아산 기슭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로의 가로수들마다 단풍이 울긋불긋 예쁘게 물들어 있어서 의도치 않게 훌륭한 단풍 구경이 되었다.
도진은 지금까지 이리가 뒷좌석에 앉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오늘 이 양쪽으로 펼쳐진 붉은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옆에 앉지 않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끼웅! 끼우웅.
[(^∀^●)ノ]
끼우웅!
[ヾ(^▽^*)))]
끼웅이가 용마의 내비게이션에 달라붙어서 단풍이 예쁘다고 난리를 피웠다. 용마도 절친한 친구와 함께 단풍을 즐겼다.
도진은 룸미러로 슬쩍 이리의 얼굴을 살폈다. 이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창밖의 붉게 물든 가로수들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느끼고 도진을 마주 봐 왔다. 까만 눈이 향기가 나는 듯 반짝였다.
“도진아. 왜?”
“너무 예뻐서요.”
“그러게. 진짜 곱고 예쁘네. 우리 상수리나무도 가끔은 단풍을 물들게 할까 싶어.”
“저는 스승님 예쁘다고 말한 건데요.”
“…….”
“스승님이 단풍보다 훨씬 더 곱고 예뻐요. 세상에 스승님보다 더 어여쁜 건 존재하지 않아요.”
용마가 경적을 빠앙 울렸다.
[(/ω\*)]
끼우웅.
“뭐. 이것들아, 뭐 어쩌라고. 우리 대화하는데 방해하지 마. 우씨.”
뻔뻔하게 위협하는 도진과는 달리 이리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당! 어서 들어오세용.”
세지들은 산속의 버려진 폐가를 자기들 식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살고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신문지를 발랐고, 바닥에는 고서적들을 쌓아 놓았다. 도진은 지금 밟고 있는 이 옛 한글로 된 서책이 제발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니길 바라면서 조심조심 이동했다.
“오늘도 소리가 들렸어?”
“네! 선인님이 오시기 2분 전에도 서랍에서 삐이삐이 우는 소리가 났습니당.”“어떤 서랍?”
“주방 오른쪽 두 번째 서랍입니당.”
세지들이 오들오들 떨며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주방으로 가는 통로를 거대한 책꽂이가 막고 있었다. 세지들은 당연한 듯 얇은 몸으로 틈을 빠져나가다가 아차, 했다.
“선인님과 도진 님은 여길 통과하지 못하시는군용! 아이고. 이를 어쩐당.”
“선인님과 도진 님, 다이어트를 하세용!”
“어떻게 잘 노력해 보세용. 일단 머리부터 좀 넣어 보세용. 머리만 통과하면 그 뒤부터는 쉬워용.”
1cm 틈으로 머리를 넣어 보라는 세지들을 이리는 귀엽게, 도진은 한심하게 쳐다봤다.
“도진아.”
“네, 스승님.”
도진은 이름만 불려도 스승의 뜻을 읽었다. 장사가 책꽂이를 종이 집듯이 번쩍 들어서 옆으로 옮겼다. 우와아아, 세지들이 게 눈 같은 눈을 반짝였다.
“역시 장사라 힘이 좋네용.”
“갈 때 제자리로 옮겨 놓을게.”
“아니에용. 지금 위치도 괜찮아용.”
세지들은 출입하기 더 편해졌다며 좋아서는 폴짝폴짝 뛰었다. 도진이 손바닥을 탁탁 털고는 이리의 옆으로 왔다.
“스승님, 침입자는 이 작은 틈을 통과해서 들어간 건가요?”
“응. 틈이 아예 없어도 통과할 수 있는 아이야.”
“호오. 싸움은 제게 맡겨 주세요. 호승심이 피어오르는군요.”
당연한 듯 결투를 예상하는 제자를 보고 이리는 작게 웃기만 했다.
“바로 저 서랍입니당.”
세지들이 주방 구석에 뭉친 채로 서랍을 가리켰다. 도진이 성큼성큼 다가가 서랍을 열어젖혔다.
놋쇠 젓가락과 숟가락 몇 개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 외에는 썩어 가는 종이 몇 장들이 끝이었다. 도진은 바로 이리의 표정을 확인했는데, 이리는 서랍 안쪽을 보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듯이….
“스승님. 표정 수습하세요.”
“응?”
“저 질투 난단 말이에요.”
“…….”
도진은 일단 질투부터 하고 그 다음 결투가 필요하진 않겠구나 깨달았다. 그러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외계인은 아니죠?”
“아니야.”
“흠. 좋아요. 다 방법이 있죠. 흐압!”
도진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고 그 자리에 장풍을 쏘듯 손바닥을 뻗었다. 은신술 해주술이었다. 그러나 서랍 속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도진은 다시 손가락을 튕기고 왼쪽 검지와 엄지로 그 자리를 주욱 끌어당겼다. 그리고 원을 그린 후 서랍 안쪽에 던졌다. 둔갑술 해주술이었는데 역시 서랍 속은 변화가 없었다.
“하.”
조금 심통이 난 도진은 마지막으로 양팔을 크게 벌리고 손뼉을 짝! 소리가 나도록 마주친 후 서랍 안으로 양손을 뻗었다. 서랍은 잠잠했다. 결계 해주술도 소용이 없었다.
“진짜 외계인인가 봅니당!”
“아이고. 외계인이 우리 집에 오다니용.”
“외계인이라면 공격하지 마세용. 외계인과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당.”
호들갑 떠는 세지들을 뒤로 하고 도진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스승님, 대체 뭐예요?”
이리는 제자의 불퉁한 표정을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이리가 서랍에 손을 뻗자 서랍 안에 있던 것이 스르르 드러났다. 마치 허공에 색깔이 입혀지듯이 나타난 그것은 작고 하얀…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