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46화 (146/203)

“했잖아. 악마 머리띠.”

“내년에는 악마 머리띠하고 우의도 입는 거 어때요? 어차피 인간들은 선인 옷인지 못 알아보니까.”

우의는 선인들이 입는 날개옷이었다.

“그냥 머리띠만 하자.”

“설마 인간들 앞에선 입지 말라는 규율이 있어요?”

“그런 건 없어. 임금님도 인간들 축제의 장 한가운데에서 우의를 입는 선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 못 할 테니까.”

“좋습니다. 최초가 되어보는 거예요. 최초라는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법이죠!”

딱히 할로윈 축제 때 우의를 입었다는 최초의 기록을 세울 마음은 없는 이리가 난감하게 웃었다.

끼웃! 끼후웅!

끼웅이가 연달아 기침을 했다. 그냥 재채기가 아니라 둘은 길옆에서 멈췄다. 평소 같았으면 도진이 달랑달랑 들고서 살폈겠지만, 도진의 손은 현재 이리의 허리에 못 박혀 있는지라… 이리가 손으로 감싸 살폈다.

“끼웅아, 추워?”

끼우웅.

끼웅이가 이리의 손바닥 위에서 팔짱을 끼고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끼웃! 기침했다. 이리는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고는 소매 속에 넣었다.

“밤 되니까 쌀쌀해졌어. 도진아, 이제 돌아가자. 시간도 벌써 열 시 넘었네.”

“김끼웅, 이 자식 진짜 도움이 안 돼요.”

도진은 말로는 투덜거렸지만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자칫하면 어린 잡귀가 감기 걸릴 수 있으므로 돌아갈 때는 빠르게 가기 위해 도진이 은신술을 펼쳤다. 인파 사이를 거슬러 올라 버스 정류장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이리가 멈춰 서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스승님?”

“저쪽에.”

이리가 왼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절 대 금 연!’ 주의문 아래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저 씨벌새끼들. 제가 한 대씩 패고 올게요. 임금님도 이 정의로운 폭력을 용서해 주실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날 보고 저 골목으로 도망가는 위아가 하나 있어서.”

“참 나. 또 어떤 녀석이 무슨 나쁜 짓을 꾸미고 있길래….”

이리 선인을 본다고 모든 위아가 반가워하면서 쫓아오지는 않는다. 기겁하면서 일단 도망부터 치는 녀석들도 많은데 대개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녀석들이었다.

상대가 원혼이나 악신이 아니라면 그냥 웃으며 도망치게 놔두는데, 어째서 신경 쓰시는 건지 생각하던 도진이 벼락같이 깨달았다.

“우리 은신술 중인데!”

“응.”

“제 은신술을 뚫고, 저희를 보고 도망쳤다는 거예요? 와, 뭐지. 신령님들도 제 은신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대체 뭐하는 위아길래. 당장 가 봐요, 스승님!”

“그래.”

이리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진이 얼른 골목으로 달려갔다.

이리도 막 따라가려는데 끼웅이가 또 기침했다. 이리는 검지 끝에 물방울처럼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불방울을 소매 안에 넣어 주자 웅크리고 있던 끼웅이가 얼른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도에 끼웅이는 언제 추워했냐는 듯 금방 노곤노곤 녹았다.

이리는 끼웅이를 쓰다듬으며 도진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흡연하는 인간들 앞을 지나갈 때는 몰래 담뱃불을 꺼뜨리고 담배도 죄다 꺾어 버렸다. 인간들이 어? 뭐야? 이거 왜 이래. 하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임금님도 이 정도 개입은 허락하시니 다행이었다.

이리는 당연히 도진이 위아를 찾아내 짤짤 흔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슨 죄를 저질렀냐, 얼른 실토해라 협박하고 있을 거라고.

그런데 막다른 골목 안쪽에서 이리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도진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씩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진아.”

“스승님. 놓쳤어요. 분명 뭔가 푸른 형체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걸 봤는데. 아, 씨. 어디로 사라졌지.”

“…….”

“혹시 실망하셨어요?”

이리가 화들짝 놀랐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실망을 해. 놓칠 수도 있지…. ”

“제자 위로해 주세요.”

도진이 이리에게 머리를 숙였다. 도진은 숱도 참 많았다. 이리는 북슬북슬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너는 위아 세계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야. 당연히 도술도 완벽하지 않고…. 너보다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속상해 하지 마.”

“위로 맞죠?”

“앞으로 더 열심히 배우렴. 나도 열심히 가르쳐 줄게.”

“네. 사실 속상하지는 않은데 자존심이 좀 상하네요. 대체 누구였을까요? 혹시… 퇴마사? 배리모스?”

심각한 추측을 하는 도진의 옆에서 이리가 골목을 쓱 훑었다.

분리수거를 한 건지는 의문인 쓰레기봉투들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빈 맥주 상자들, 담배꽁초가 쌓인 버려진 화분, 벽돌 담벼락을 가로지른 거미줄.

이리의 시선이 거미줄 어딘가를 향했다가 벽을 타고 내려와 옆 건물 가게의 간판쯤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막다른 벽 쪽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따라가는 듯한 눈동자 움직임이었다.

도진이 빠르게 눈치챘다.

“아직 여기 있군요!”

정답이었다.

“스승님께서 당장 족치지 않으시는 걸 보면 나쁜 새끼는 아닌가 보네요. 그런데 대체 왜 스승님을 보고 도망친 거죠?”

“그건 이제 물어봐야지.”

“네! 물어봅시다!”

“…….”

“…제가 붙잡아요?”

“한번 해 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이리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도진은 이리의 테스트를 단 한 번도 마다한 적 없었다.

“좋습니다. 스승님 앞에서 멋진 모습 보일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도진이 골목의 막다른 벽을 향해 돌아섰다. 주먹 쥔 채 관절을 우드득 꺾으며 다가가는 모습이 깡패 그 자체였다.

도진은 어두운 공간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상대도 도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 은신술이라면 신체 접촉 후에는 발각된다. 양팔을 넓게 벌린 채 공간을 휘젓고 다니면 효율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멋이 없었다.

‘스승님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보고 계시는데!’

육체 능력이 아니라 도술로 제압해야만 한다!

도진이 손바닥을 곧게 편 후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펼치자 하얀 빛덩어리가 손바닥 위에 만들어졌다. 도진은 눈을 감고서 그 빛덩어리를 눈꺼풀에 집어넣는 느낌으로 손바닥을 꾸욱 눌렀다. 그리고 다시 뜨자 붉은 홍채에서 하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하, 저기 숨어 있군.’

도술로 영안의 위력을 일시적으로 높인 도진은 담벼락 꼭대기에 매달린 푸른 불덩어리를 발견했다. 예상대로 은신술 중이었는데 얼마나 도력이 강한지 지금도 깜빡깜빡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 땅을 박차고 도약하면 잡아챌 수 있으나 도술로 제압하겠다고 결심한 상태.

도진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스팔트 바닥에 손을 대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쇠로 된 채찍, 철편이 만들어졌다. 손잡이 부분을 잡은 도진이 철편을 휘둘렀다.

푸른 불덩어리가 휘익, 빠르게 다른 곳으로 피하고 철편은 담벼락을 타격했다. 강한 힘으로 가격당했음에도 담벼락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포할 때 사용하는 이 철편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푸른 불덩어리는 이번에는 쓰레기봉투 더미에 숨었다. 도진이 다시 채찍을 휘둘렀으나 역시 푸른 불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렇게 몇 번을 휘둘렀지만 푸른 불은 사샥사샥 잘만 피했다.

도진의 몸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러나 길바닥에 꽂힌 듯 꿋꿋이 움직이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다가 안 되겠는지 철편을 없앴다.

“흐압!”

양 손바닥을 맞대고 기합을 준 도진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가 이번에 만든 것은 그물이었다. 골목 전체를 감싸도 남을 크기의 거대한 그물에 푸른 불덩어리가 당황한 듯 지그재그로 도망 다녔다. 그래 봤자 그물 안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큼직큼직하고 엉성한 그물 틈으로 푸른 불덩어리가 몸을 비집었으나, 그 성긴 틈을 아주 촘촘한 망이 또 메우고 있기에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도진이 입술 끝을 비스듬하게 올리고 그물을 확 잡아당겼다.

얌전해진 푸른 불덩어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주먹만 한 크기였다.

“잡았어요! 하, 역시 나는 천재. 물론 다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이거 도깨비 같은데, 도깨비불 맞죠?”

“누구인지 모르겠어?”

“…제가 아는 사람이란 뜻이에요?”

도진이 놀라며 푸른 불덩어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물도 해제했는데 푸른 불덩어리는 지쳤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도망치지 않았다. 절대로 요리이기는 아닌데. 통영 도깨비들이 서울에 올라올 리도 없고.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도깨비….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르는 위아가 하나 있었다.

“털복숭이 님?”

도진이 이름을 내뱉자 푸른 불덩어리가 꿈틀꿈틀하더니 도진이 익히 알고 있는 푸른 털의 동그란 공으로 변했다.

털복숭이는 민망한지 커다란 눈을 한껏 기울인 상태였다.

“여기서 볼 줄 몰랐다, 김도진. 이리 선인도 오랜만이오.”

“안녕하세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로 오긴. 할로윈 축제를 한다기에 와 봤다. 밤늦은 시간에 인간들이 바글바글 모인다는데 어느 도깨비가 마다하겠나?”

“그건 흥도깨비나 한도깨비 경우고 산도깨비는 인간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비면 그때 음기를 섭취하기 위해 내려오던데요.”

“내가 좀 개성 있는 성격이다.”

“털복숭이.”

물러나 있던 이리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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