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이 부분에 늘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죽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계속…….
“내 걱정은 하지 마. 나는 너희에 비하면 어리잖아.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고. 나는 이 세상이 좋아. 사람도, 산쥐와 풀벌레도, 구름도. 좋아서 남아 있겠다는 거야.”
“네 말대로 너는 우리에 비하면 어려…. 그래서 더 걱정된단다. 나중에 우리를 얼마나 그리워할지, 얼마나 원망하고 얼마나 후회할지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어떻게 널 두고 떠날까.”
항상 웃는 얼굴로 세상에 기쁨을 뿌리고 다녀서 ‘기쁨의 섶되’라고도 불렸던 친구는 이제는 피곤에 지친 얼굴로 혼자가 될 친구를 걱정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온 상황이었다. 결국에는 이리가 친구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섶되는 어느 때보다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그 팔찌는 우리가 네게 주는 선물이야. 그거라도 받아 줘. 그래야 우리가 널 두고 눈을 감을 수 있어.”
팔찌.
이리는 이물을 보는 순간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파악했다.
일종의 구속구였다. 능력을 봉인하는….
이리는 딱히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눈치가 보였는지 자운이 덧붙였다.
“지금 당장은 끼지 않아도 돼. 하지만 앞으로 긴 시간을 인간계에서 보내려면 반드시 필요할 거야. 버리지만 말고 갖고 있어.”
“너희가 준 걸 내가 왜 버리겠어….”
이리는 그 자리에서 팔찌를 착용했다. 자운과 섶되, 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는 뿌듯하다기보다는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넷은 과실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섶되는 해가 저물기 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면에 들었다. 태고의 선인의 소멸의 순간은 아름답다. 형체는 반짝이는 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그 빛은 한 점으로 뭉쳤다가 근방에 거대한 힘을 뿌리며 흩어졌다. 그렇게 무덤이 생기는 것이다.
섶되가 떠나고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한번 바뀐 어느 날 밤, 친구 하나가 잠든 이리를 깨웠다.
“이리, 나는 이제 떠날 거야.”
“…지금?”
“응. 떠나는 순간이 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전혀 후련하지 않네. 네가 너무 걱정돼.”
이리는 바로 앉아 친구의 손을 붙잡았다.
후련하지 않으면… 정 걱정된다면… 그러면 그냥 안 죽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리는 친구들이 하나둘 죽어 갈 때부터 절대로 친구들을 말리지 말자고 맹세했다.
“너희에게는 내가 영원히 막내라서 어지간히 걱정되겠지만 나는 너희 생각보다 잘 지낼 수도 있어. 나중엔 너희를 잊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은 너희 서운해하지 말라고 일부러 우울해해야 하나, 생각도 들어.”
그제야 친구는 안심이 된다는 듯 밝게 미소 지었다.
친구는 어디론가 떠났고 그 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리는 자운도 이제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여름에 떠난다고 했으면서 초봄에 떠나 버린 섶되처럼.
겨울에 간다고 했지만 여름에 떠나 버리진 않을까. 여름이 지나간 후에는 온산에 낙엽으로 물들 때에 떠나 버리지 않을까, 했고. 가을이 지나간 후에는 하루하루를 이별하면서 보내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자운은 제 말을 지켰다. 그는 겨울까지 이리의 곁에서 머물며 만물상점의 준비를 돕다가 떠났다.
이제 이리를 제외한 모든 태고의 선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저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친구 세 명이 만들어 준 실 팔찌뿐이었다. 이리는 약속대로 팔찌를 손목에서 빼지 않았다.
그 후로 바쁘게 지냈다. 진현계의 2대 왕은 여러모로 서툰 점이 많았다. 초대 왕인 진현이 인수인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영면에 들었으므로 이리가 옆에서 많은 조언을 해 줘야 했다. 그 와중에 친구들과 함께 관리했던 이물을 혼자 관리하려니 휴식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 점차 왕이 업무에 익숙해지고 진현계를 오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자운이 아끼는 구름이었던 관조자도 이리를 도와 상점 업무를 도우니 여유가 생겼다.
어느 날 새벽, 만물상점의 문을 여는 이리의 시야에 제 손목이 들어왔다.
‘앞으로 긴 시간을 인간계에서 보내려면 반드시 필요할 거야.’
팔찌를 보는 순간 이리는 친구들이 어째서 그렇게 얘기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친구들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아주 오래된 깨달음이었다.
* * *
‘이 팔찌에 뭔가가 있나?’
과거를 더듬던 이리는 손목을 들어서 팔찌를 살폈다. 검은색 실로 이루어진 얇은 실 팔찌. 능력을 봉인하는 이능 외에 다른 이능은 없다. 그런데 왜 과거의 그 순간에는 팔찌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는지….
안개가 낀 듯 기억이 희미해 그때 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팔찌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보고 있었어….”
“그냥 본다기엔 너무 아득한 시선이었는데. 수상해요. 제 본능이 질투하라고 외치고 있어요.”
이 팔찌를 이리의 친구들이 줬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눈치 빠르게 질투하는 도진이었다. 이것도 장사의 본능인 건지.
“얼른 밥이나 먹어. 주먹밥 만들어 줄까?”
“으아악. 제가 만들어 먹을게요. 어떻게 스승님한테…!”
이리가 비닐장갑을 끼려 하자 도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빼앗아 갔다. 빛의 속도로 주먹밥을 만들어 내는 도진을 보며 이리는 짧게 웃었다. 그리고 제 올라간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옛날보다 확연히 웃음이 많아졌다. 더 생각할 것 없이 제자의 영향이었다.
이리는 문득 아주 먼 미래를 상상했다.
태고의 선인들처럼 도진 또한 영면에 들기로 선택한다면.
‘스승님, 저는 이제 더 살고 싶지 않아요. 소멸을 선택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예요.’
서늘한 칼날이 심장을 툭, 건드린 듯 한기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친구들 때처럼 붙잡지 않고 그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을까?
그때처럼 내 걱정은 말고 편히 잠들라는 할 수 있을까?
이리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배불리 먹고 호프집에서 나온 둘은 버스킹 연주를 몇 곡 연달아 듣다가 여러 미니 게임들이 진행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도진은 찍찍이 표창을 두 개 던지고 인형을 다섯 개나 따왔다. 네 개는 반납하고 한 개만 받아서 이리가 품에 안았다. 거대한 병아리 인형이었다.
“스승님, 딴또리는 잘 지내고 있겠죠?”
이리가 옅게 웃었다.
병아리를 보자 바로 딴또리를 떠올리는 제자가 귀여웠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 궁금하면 융 서식지 알려 줄 테니까 가볼래?”
“스승님은 딴또리가 융 서식지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시네요. 음버섯이들에게 돌아갔을 수도 있잖아요.”
“으음…. 그렇구나. 네 말이 맞아. 돌아가서 본능을 이겨 내고 잘 살고 있을지도….”
“나중에… …….”
도진이 말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융 서식지에 가서 확인하겠다’라는 말이 따라와야 하는데,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으로 보아 확인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무슨 행진 구역이래요. 사람 많으니까 더 붙어야 해서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실례를 한다는 건가 했는데, 도진이 슬쩍 이리에게 더 달라붙더니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리는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은 허공 어딘가쯤을 보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요동쳤다.
허리에 얹어진 손은 긴장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힘이 미약했다. 장사가 아니라 어린애가 올린 것처럼.
이리는 이 손을 치우려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밤이 되니 조금 추웠는데, 도진이 닿은 부위부터 따뜻해졌다.
이리가 가만히 걷기만 하자 도진은 확신을 얻었는지 좀 더 강한 손힘으로 이리의 허리를 안아 왔다. 그래도 이리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
입가를 씰룩거리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제자를 보고 이리가 짧게 웃었다.
끼웅. 끼웅?
끼웅이가 이리를 톡톡 치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검은색 갓과 검은색 도포를 두른 사람들이 깔깔깔 웃으며 한데 모여 있었다. 이리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도진도 그들을 발견했다.
“와, 진짜 저승사자들인 줄. 리얼리즘에 기반한 코스프레네요.”
“그러게.”
저승사자들 옆에는 도깨비 탈을 쓴 사람들도 한 무리 있었다. 악마와 좀비, 공포 영화 속 크리쳐들 속에서 친숙한 동양 귀신들을 보자 괜히 반가웠다.
그렇게 구경하다가 인간으로 둔갑한 위아들 몇몇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이리 선인에게 꾸벅, 꾸벅 정중하게 인사했다. 재미있는 건, 위아들이 이리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본 주위 인간들이 똑같이 이리에게 인사하는 시늉을 한다는 점이었다. 기분 좋게 취한 듯한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이리에게 인사해 놓고 저들끼리 푸하하 웃으며 떠들었다.
“야, 뭐냐. 아는 사람이냐?”
“옆에서 인사하길래 봤는데 존나 잘생겼길래 나도 인사했지.”
“미친놈아. 모르는 사람한테 왜 인사해.”
“너도 따라 했잖아, 미친 새끼야.”
“그러게. 야, 말 좀 걸어 봐라. 근데 커플인가? 머리가 짧은데 여자인가 봐.”
개방적이면서 보수적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면서도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인간들 틈에서 은신술을 사용하지 않고 걷는 게 상당히 오랜만인데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저 새끼들이 지금 누구한테 수작질을-”
“도진아, 그런 거 아니야. 가자. 계속 걷자.”
이리가 도진의 등에 손을 얹고 밀었다. 이제 둘의 자세는 영락없는 연인이 되었다.
항상 이리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도진은 이리가 지금 이 축제를 꽤 즐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스승님이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분장도 좀 하고 나올 걸 그랬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