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42화 (142/203)

“…꼭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뜻으로 들려요.”

인연론, 운명론을 싫어하는 도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끼웅. 끼웅이가 도진을 따라 하려다가 입이 없는 걸 알고 배를 내밀었다. 그러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끼웅이를 이리가 손바닥으로 받아내 다시 어깨에 앉혀 줬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과는 달라. 오히려 그 반대야.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뜻인데. 지금의 너에게는 다 똑같은 말로 느껴지겠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스승님 말씀처럼 저한테는 운명론이나 자연론이나 똑같게 느껴져요. 한 천 년쯤은 지나야 이해할 것 같아요.”

“천 년이라니. 너는 무척 영특한 아이니까 몇 년만 지나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하긴, 맞습니다. 저는 특출난 재능을 지닌 천재니까 금방 이해하겠죠. 얼른 나이 더 먹어서 스승님과 같은 시야로 살고 싶어요.”

당신과 같은 시야로 살고 싶다.

언제나 솔직한 제자는 지금까지처럼 가볍고 솔직하게 제 소망을 고백했다. 이 가벼운 고백에 이리는 어쩐지 가슴이 덜컥였다. 갈수록 큰일이었다.

그때 돌연 도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되겠어요. 우리 나가요!”

“응? 어딜?”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마침 다음 주 월요일이 할로윈 데이라서 이번 주말에 저녁부터 차량 통제하고 크게 행사한다고 했거든요. 거기 가야겠어요, 스승님.”

10월 31일, 할로윈 데이. 이리도 잘 아는 날이다.

인간들이 유령이나 악마 등 기괴한 변장을 하고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축제의 날. 한마디로 사람이 가득가득한 날이라는 뜻이다.

“그래. 재미있게 놀다 와.”

“당연히 스승님도 같이 가야죠! 기분이 저조한 저를 약하디약한 인간들 사이에 홀로 놔둬도 괜찮겠어요? 누가 제 발을 밟거나 어깨를 치고 지나가면 제가 가만히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그리고 우리 데이트한 지도 오래됐잖아요. 스승니임. 같이 가요. 데이트해요. 네? 제발요.”

“…….”

설마 할로윈 데이에 놀겠다고 지금껏 밑밥을 깔았던 건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에 스쳤으나 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알았어. 그럼 일요일 저녁에 잠깐 나가자.”

“아싸! 문경새재 이후로 한 달 만이네요. 헤헤.”

“정말 아직도 아이 같구나.”

헤벌레 웃던 도진이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아까부터 저보고 아이라고 그러는데 저 아이 아니거든요? 스승님보다 머리 22cm가 더 큰데 무슨 아이예요.”

“22cm?”

“네. 키 더 커서 지금 194예요. 지금도 성장 중이고요. 저는 2m까지는 되고 싶지 않은데. 1cm만 더 크고 멈췄으면 좋겠어요.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키스할 때 서로 불편하대요.”

“…….”

그럼 키 차이 별로 안 나는 연인을 사귀렴.

이리는 그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도진이 당장에 화로를 엎고 끼웅이를 쥐어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딱히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과 입 맞추는 도진이라니.

“스승님, 지금이라도 시험해 보실래요?”

“뭘….”

“우리 지금 키 차이로 키스할 때 어떤지. 많이 불편한지, 아니면 그냥 좋은지….”

도진이 그윽한 눈으로 이리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무엄하게도 스승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다른 손으로는 여린 어깨를 감쌌다.

“도진아, 안 돼. 잠깐만.”

“스승님.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어요.”

당황한 이리가 도진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다가와 이리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냈다. 설마? 진짜? 진짜 여기서? 이렇게 탁 트인 정원에서…. 아니, 물론 실내에서도 안 되지만.

언젠가는 정인이 될 운명이라는 건 알겠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이리였다.

이리가 도진의 가슴을 밀던 손을 뗐다. 도진의 눈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스승님…!”

그러나 그건 큰 착각이었다.

끼웅!

이리와 제 입술 사이에 낀 까만 잡귀가 바동거렸다.

끼웅이에게 찐한 키스를 해 버린 도진이 현실을 못 믿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다가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너무해요! 어떻게 저딴 걸 들이밀 수 있어요? 차라리 손바닥으로 입을 막으시지! 그럼 스승님의 고운 손바닥에 제 코를 박고 흠껏 체취를 들이마셨을 텐데!”

끼우우웅! 끼웅. 끼우웅! 끼웅끼웅!

“너는 용마랑 놀지 왜 여기서 와서 우리 사이 방해나 하고 있어?”

끼우웅!

도진이 펄쩍 뛰는 끼웅이를 잡아채서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리가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떴다. 도진에게는 딱히 미안하지 않으나 희생양이 된 어린 잡귀에게는 조만간 선물을 줘야 할 것 같았다. 할로윈 축제 때 뭐라도 사 주자.

돌아서는 이리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며칠이 흘러 약속한 일요일이 되었다. 그날도 고객들은 상담을 마치고 이물까지 얻은 후에도 이리 선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도진이 10분이 넘어서면 칼같이 “다음!”을 외치며 차단한 덕분에 저녁 일곱 시에는 대여점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올 수 있었다.

할로윈 데이 기념 차 없는 거리가 조성되어 용마는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벌써 등 뒤에 자그마한 악마 날개를 달고 있는 청년들이 보였다.

끼웅? 끼웅?

끼웅이가 저들이 인간인지 위아인지 헷갈리는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우리도 뭐 좀 코스튬하고 나올 걸 그랬나 봐요. 가면 악마 머리띠 같은 건 팔 테니까 그거라도 해요.”

“글쎄. 코스튬을 하면 뭐가 좋은 거야?”

“뭐가 좋긴요. 추억이 되니까 좋은 거죠! 하긴 스승님은 코스튬 같은 거 한 적 없겠구나. 저는 학교 다닐 때 축제 때 뱀파이어 했었는데. 기억나시죠?”

“응. 등에 날개 달린 흡혈귀였지. 귀여웠어.”

도진이 씨익 웃었다.

“봐 봐요. 스승님 지금 그때의 저를 떠올리며 웃으시잖아요. 바로 이런 효과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제 악마 머리띠하고 돌아다니면, 몇 년 후에는 오늘의 우리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거라고요. 그때 네가 악마 머리띠를 했었지. 멋있었어- 이렇게요.”

“그렇구나. 그럼 해야지.”

이리가 선뜻 대답하자 도진은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올리며 이리에게 어깨를 치댔다.

곧 버스가 오고 악마 코스튬을 한 청년들과 같은 버스에 올랐다. 승객들은 등에 날개를 단 사람들보다 그냥 평범한 복장을 한 이리와 도진을 더 힐끔거렸다. 이리를 창가에 앉힌 도진이 속삭였다.

“스승님, 불편하시면 은신술 할까요?”

“너 축제 즐기고 싶잖아. 하지 말자.”

“네! 우리한테 말 걸려는 인간들 있으면 제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내쫓을게요. 후후.”

그러고서 도진은 정말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승객들이 다시는 이쪽을 쳐다보지 못하게 했다.

악마 날개를 단 청년들과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들은 둘에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으나 결국 그냥 떠났다.

“사람이 진짜 많네요. 제 옆에 꼭 붙어 있으세요. 인파에 쏠리겠어요.”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고, 하루가 다 끝나 가는 늦은 저녁인데도 거리는 정말 붐볐다. 둘은 우선 악마 머리띠부터 사서 바로 머리 위에 썼다. 거울을 본 이리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도진을 보자 그 생각도 금방 사라졌다.

그 뒤로는 다양한 코스튬과 버스킹, 여러 미니 게임과 이벤트를 구경하며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거리를 걸었다.

도진은 둘에게 다가오거나 말 걸려고 하는 이들이 있으면 바로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느라 바빴지만, 이리는 한가하게 사람들을 구경했다.

“신기하네. 한국에서 할로윈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지다니. 옛날 동짓날 때는 귀신 변장을 하고 나와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팥죽만 먹었거든. 인간들은 동양 귀신보다 서양 귀신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걸까?”

“아뇨. 더 단순한 이유예요.”

“뭔데?”

“동짓날이 너무 추워서 그래요.”

이리는 도진이 농담하는 건가 하고 쳐다봤는데 도진은 인상을 확 쓴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12월 22일. 완전 한겨울이잖아요. 존나 추우니까 뜨거운 팥죽 끓여 먹고 집 안에 꼭꼭 숨었던 거죠. 하지만 할로윈 데이는 적당히 쌀쌀한 계절이니까요. 만약 동짓날과 할로윈 날짜가 정반대라면 할로윈 때는 문을 걸어 잠그고, 동짓날에는 축제가 열렸을 거예요.”

“맞는 말이야. 그런데 어딜 그렇게 노려봐?”

도진이 이렇게 노려보는데도 눈길을 안 돌리는 인간이 있나 싶어서 묻자 도진이 답했다.

“저거… 인간 아닌 것 같아서요.”

이리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유령 변장을 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보였다.

“아, 가장 오른쪽 아이는 혼령이네.”

“진짜요? 와. 할로윈은 죽은 이가 돌아오는 날이란 게 진짜였어요?”

“저 애는 그냥 지박령이야. 놔두면 저승사자가 와서 데리고 가겠지.”

“스승님, 저쪽에서 기타 치는 사람들 앞에 있는 애도 인간 아니죠.”

“잡신이야.”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은요?”

“요괴 하나가 인간 둔갑을 하고 어울리고 있구나.”

그렇게 하나를 찾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많은 위아가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