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37화 (137/203)

“하나는 어린 신령이고….”

도진을 살피는 검은 동공이 세로로 좁아 들었다가 다시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너는 장사인가. 도사인가….”

“둘 다입니다.”

“으음…. 장사면서 선인이 되려 하는 자인가…. 나와는 다른 의미로 힘든 길을 걷고 있구나….”

늪이무기의 목소리에 연민이 어렸다. 동질감 때문인지 잠을 깨웠다는 분노가 빠르게 가라앉은 듯했다. 도진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군이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잠을 깨워 죄송하옵니다. 저는 이군이라고 하옵니다. 이쪽은 저를 도와주러 오신 김도진이옵니다.”

“그래, 무슨 일로 내 비늘을 뜯으려 하였는가….”

이군이는 솔직하게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를 고백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듣던 이무기가 음산하게 말했다.

“그 퇴물 산신령이 드디어 진현계로 올라가는구나…. 내 비늘로 만든 관자는 진현계 선인들도 몇 명 가지지 못한 것. 순순히 내어 줄 수는 없지…. 하지만 순리를 역행하는 길을 택한 어린 장사를 위해 기회를 주겠다….”

도진은 싸울 생각까지 했었는데, 늪이무기의 동질감과 동료의식이 생각보다 강했다.

“내가 내는 수수께끼 세 개를 풀면 비늘을 떼어 주마….”

…수수께끼?

자기가 스핑크스야?

어이없는 도진과는 달리 이군이는 결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예. 준비됐사옵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오후에는 두 개, 저녁에는 세 개인 것이 무엇인가?”

“그, 그것은….”

이걸 왜 고민해? 도진이 이군이의 팔꿈치를 툭 쳤다.

“모르면 제가 대답할게요.”

“아닙니다. 알 것 같사옵니다.”

그래. 역시 이런 쉬운 수수께끼를 모를 리가 없지.

“답은… 동자삼이옵니다!”

“뭐야?”

“정답이다.”

“…….”

그답지 않게 어벙한 표정의 도진에게 이군이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동자삼은 본래는 뿌리가 네 개지만, 시간이 지나면 동자삼을 발견한 인간이 뿌리를 두 개 떼어 가서 두 개만 남고, 그 상태로 다시 열심히 뿌리 하나가 자라 세 개가 되었을 무렵 생을 다하는 경우가 많사옵니다.”

“아, 네….”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도진은 앞으로 입 닥치고 있기로 했다.

“두 번째 수수께끼다. 몸집이 똑같은 말 두 마리 중 누가 어미이고 누가 새끼인지 구분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먹이를 줬을 때 먼저 먹는 쪽이 새끼이옵니다.”

이건 또 제대로 된 수수께끼네?

우리나라 민담 중 하나로 도진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

“마지막 수수께끼다. 어떤 다람쥐가 땅속에 씨앗을 숨겼다…. 두더지가 씨앗 위에 흙을 덮었고, 새벽 비가 씨앗을 움트게 했다. 그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었다면, 이 경우 나무 열매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지 않아? 서로 변호사를 써야 할 분쟁 아니야?

“장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수수께끼의 답변은 이군이 신령님이 할 겁니다.”

“안다. 네 생각을 말하거라….”

도진은 턱을 쓸며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모두가 나무를 키웠잖아요. 열매의 소유권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정답이라는 건 아니고, 저라면 그렇다고요.”

“그러한가….”

도진은 이군이도 자신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고심하던 이군이가 입을 열었다.

“나무는 스스로 자랐으니 열매의 소유권은 누구에게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모두가 공평하게 갖도록 하겠사옵니다.”

도진과 같은 결론이었으나 이유가 달랐다. 도진은 어째서 나무가 스스로 자란 게 되는 건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생각해 보면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납득했다.

“어린 신령이여…. 너는 벌써 산신령 녀석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정답이옵니까?”

“그렇다…. 비늘을 내어 줄 테니 그 퇴물 신령에게 갖다 주거라….”

크르르르- 이무기가 거대한 머리를 움직여 제 목 부분의 비늘 하나를 날카로운 송곳니로 떼어 냈다. 그렇게 단단하게 붙어 있던 것이 마치 채소 이파리처럼 툭 떼어졌다. 물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도진이 품에 안고 돌아왔다. 무게가 상당했다.

이무기는 다시 자려는 듯 머리를 돌려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군이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묵례했다.

“감사하옵니다. 혹시 지리산 신령님께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옵니까?”

“그런 것 없다. 얼른 꺼지거라….”

“예…. 육체 보중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도진도 인사를 드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해저 동굴을 빠져나갈 무렵 저 안쪽에서 한탄 섞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제 그 녀석이 진현계에 가면 한동안 만나지 못하겠구나…. 나는 어찌하여 요괴의 삶을 선택했던가…. 후회스럽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진현계로 함께 올라갔을 것을…. 구미호는 이 일을 알고 있는가…. 아아… 이 길고 긴 고난의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한단 말인가……. 후회스럽구나….

도진은 그때 늪이무기가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깨어 있으면 이렇게 후회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잠을 선택하는 것이다.

과제 하나를 해결했지만 어째서일까, 과제를 얻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 * *

지리산 산신령이 구해 오라고 한 두 번째 재료는 바로 아지시시의 꼬리 털. 아지시시란 바로 한국에 사는 유일한 구미호의 이름이었다.

도진과 이군이는 늪이무기 때처럼 몰래 털을 뽑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구미호가 좋아하는 음식인 간 요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대요괴의 거처로 향했다. 금강산자락의 으리으리한 기와집 문을 두드리자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곱상한 외모의 종이 나왔다. 이군이가 공손하게 용건을 말하자 남종이 고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뭐가 필요하다고요?”

“구미호 님의 꼬리 털이옵니다….”

“…….”

종이 콧잔등을 와락 구겼다.

“허튼소리 마십시오!”

소리치고 바로 돌아가려는 종에게 도진이 얼른 선물 보따리를 건넸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간 요리를 들고 왔는데 아지시시 님께 좀 전해 주십시오. 겸사겸사 저희 부탁도 전해 주시고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대는 마세요.”

종이 새침하게 말하며 선물을 들고 돌아섰다. 닫힌 대문 앞에서 30분 정도 기다리자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랍니다.”

새침한 종을 따라 들어가자 잘 꾸며진 정원이 나왔다. 종과 똑같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빗자루질을 하거나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눈에 띄는 미형이었다. 도진처럼 구릿빛 피부의 건강미 넘치는 미남이 아니라 어여쁘고 곱상한 타입의 미인들이었다.

“시시 님, 손님들 모시고 왔어요.”

“들이거라.”

종이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종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여쁜 이가 곰방대를 피우며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렀고, 도톰한 입술은 붉은 윤기가 돌았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있어서 가슴골이 보였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그건 도진과 신령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아지시시 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사옵니다.”

“그래. 앉거라.”

두 사람이 앉자 종이 둘에게 차를 내주었다. 그러고는 나갈 기색이 없는 종에게 구미호가 턱짓하여 나가게 했다. 종은 입을 삐죽 내민 채 나갔다. 문이 닫히고 구미호는 이군이와 도진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말했다.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정말 부리부리하구나.”

“네. 제가 잘생기긴 했지만 아지시시 님의 취향은 아니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격도 재밌어 보이는데 말이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한 재미 합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늘 웃게 만들어 주는 스타일이랄까요.”

“그런 것 같구나. 이리 선인님은 잘 계시는가?”

“…….”

잘만 말하던 도진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종들의 외모를 보아하니 구미호가 이리한테도 추파를 던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무엄한 생각 중인 것 같구나. 그분처럼 음전한 분은 취향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나는 귀엽고 새침한 아이를 좋아한단다.”

“안 물어봤습니다만.”

“너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구나.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것까지.”

한번 혀를 찬 구미호가 이번엔 이군이를 응시했다.

“그래. 내 꼬리 털은 왜 필요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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