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린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신령이구나.”
이군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시, 신령으로서… 당연히….”
“잠깐만요. 왜 붉어지죠? 왜 빨개져요? 내가 생각하는 그 감정 아니죠? 감히 이리 선인에게? 내 스승님에게? 스승님과 나에 대해 소문이 퍼졌을 텐데?”
도진의 물음표 공격에 이군이가 기겁했다.
“아, 아니옵니다! 도진 님은 걱정 마세요. 저는 지리산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사옵니다.”
“도진아, 고객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
“하지만 스승니임.”
“이군이. 대여점에 두려움을 없애는 이물이 없으니, 대신 두려움을 없애 줄 사람을 빌려줄게.”
“사람 말이옵니까?”
이때 도진은 이미 이리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
“도진아, 네가 이군이를 도와주렴.”
“네? 저요?”
도진이 화들짝 놀라는 척했다.
“최대한 이군이가 앞에 나서게 하고 도진이 너는 보조만 해 줘. 할 수 있지?”
“할 수야 있지만…. 제가 받아 놓은 의뢰들이 너무 많아요. 스승님 혼자 하시다가 과로로 쓰러지세요.”
“신령들 부를게. 걱정하지 마.”
이리가 지금 당장 부르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군이는 이리 선인의 제자가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닌 장사라는 소문을 들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도진을 바라봤다.
“도진 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저는 그저 감사하지요. 덕도 충분히 드리겠사옵니다.”
덕이란 말에 도진의 눈이 이군이보다 더 초롱초롱해졌다. 아니, 초롱초롱 수준이 아니라 번뜩이며 발광했다.
“덕 얼마나 주실 겁니까?”
“5, 50년 어치 어떻사옵니까?”
“좋습니다. 당장 행동 개시하죠. 늪이무기가 어디 살고 있었죠?”
역시 돈으로 돌아가는 인간 사회나 덕으로 돌아가는 위아 사회나 큰 차이는 없었다.
* * *
도진과 이군이는 하루에 하나씩 해치우기로 했다. 먼저 처리할 대요괴는 늪이무기.
늪이무기는 늪에 살 것만 같은 이름과는 달리 제주도 바다 밑바닥에 살고 있다. 도진은 당장에 쳐들어갈 기세였지만, 이군이가 다음 날 새벽 해가 뜰 때쯤 제주도 해안에서 만나자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이튿날 이리가 용마의 날개를 꺼내 준 덕분에 도진은 용마를 타고 훨훨 날아 제주도 해안에 도착했다. 이군이는 구름을 타고 미리 와서 정찰 중이었다.
“도진 님! 오셨사옵니까? 다행히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는 해변가라 아침까지 인간이 나타나진 않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미리 주변에 결계를 펼쳤사옵니다.”
“잘했사옵니다. 그럼 바로 잠수하죠.”
“바, 바로 말이옵니까? 뭔가 작전 회의 같은 걸 해야.”
“작전이요? 그런 거 생각 안 했는데.”
“그럼 제 작전을 한번 들어보시지요.”
그냥 일단 내려가 늪이무기랑 힘겨루기를 통해 비늘을 쟁취할 생각이었던 도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신령이 짜 온 작전이 뭔가 하고 기다리니 이군이가 캐리어를 펼쳤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늪이무기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면서 보낸다고 하옵니다. 정오부터 딱 세 시간만 깨어 있으니 지금은 자고 있을 것이옵니다. 지상의 시끄러움에 익숙해져서 웬만한 소음에는 깨지 않는다고 하니 자는 틈에 지느러미를 뚝 떼어 오는 게 계획이옵니다.”
그러면서 이군이가 캐리어의 파우치 하나를 펼쳤다. 안에는 테이블 커터, 압착 펜치, 파이프 렌치 등 여러 공구가 들어 있었다.
“늪이무기의 지느러미가 굉장히 튼튼하다고 해서 준비했사옵니다.”
“흠. 준비성이 뛰어나시군요. 그럼 들어가죠.”
“그리고 이것도.”
이군이가 향주머니로 보이는 작고 동그란 주머니 두 개 중 하나를 도진에게 건넸다. 도진이 펼치자 코를 찌르는 생선 비린내가 났다.
“혹시 우리에게서 육지 생물 냄새가 날까 봐 준비했사옵니다.”
“훌륭합니다. 그럼 가죠.”
“그리고 이건-.”
“설명은 됐고. 그냥 일단 챙겨요. 어차피 신령님이 사용할 건데 저한테 설명해서 뭐 합니까.”
“아, 네….”
이군이가 주머니 두어 개와 약초 하나, 향낭 하나, 무슨 나뭇가지와 조개껍질까지 바리바리 가방에 넣었다. 도진은 비딱하게 선 채 기다렸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냥 멱살 잡고 확, 끌고 들어가고 싶지만 덕을 생각하며 참았다.
‘끼웅이라도 데리고 올걸. 이 스트레스를 끼웅이를 쥐어짜면서 풀어야 하는데.’
늪이무기가 좋아하는 먹이가 잡귀라서 놓고 온 게 한이었다.
풍덩!
잠시 후 두 사람이 바닷속에 들어갔다. 둘 다 이물 ‘공기 주머니’로 만든 공기 방울을 삼켰기 때문에 반나절은 바닷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한참을 내려가자 40m는 될법한 뾰족한 돌탑이 보였다. 늪이무기의 꼬리 끄트머리였다. 꼬리가 아니라 꼬리의 끄트머리. 늪이무기는 삼천 년을 살아온 대요괴인데, 악신으로의 진화를 거부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갈래를 역행하여 영물 그리고 나아가 신수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이군이의 설명을 들은 도진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갈래 역행이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역사상 역행에 성공한 위아가 몇 명 있었다고 하옵니다. 과거에 하계를 호령했던 어떤 악신도 갈래를 역행하여 신령이 된 적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다만 역행할 때는 순리대로 진행할 때보다 세 배는 넘는 덕이 소모되기 때문에 신령이 되기까지 5,000년이 걸렸다고 하옵니다.”
“으. 끔찍하군요.”
“더 끔찍한 건 그렇게 힘들게 신령이 되었는데 결국은 타락하여 악신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옵니다.”
“끔찍하고 안타깝군요….”
둘은 돌탑을 붙들고 헤엄쳐서 어두운 해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눈을 감고 있는 것보다도 어두웠다. 이군이가 가지고 온 보따리에서 구슬 몇 개를 꺼내 앞에다 던지자 주변이 확 밝아졌다.
“야광석입니까?”
“예. 늪이무기가 사는 동굴이 무척 어둡다고 들어서 준비해 왔사옵니다.”
정말 준비성이 철저한 신령이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드디어 꼬리를 지나 비늘로 뒤덮인 몸통 구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수도 있어서 둘은 입을 다물고 작업에 착수했다.
늪이무기의 비늘은 성인 남성 손바닥만 한 크기부터 지름이 도진의 키보다도 큰 것까지 다양했다. 도진과 이군이는 가장 작은 손바닥만 한 비늘을 골랐다.
“후읍후읍.”
이군이는 매우 겁먹은 듯 펜치를 꺼내는 손을 달달 떨었다. 도진은 그냥 완력으로 비닐을 뜯어내고 싶었지만 이리 선인의 ‘너는 보조만 해.’라는 지시를 들었으므로 참아야 했다. 대신 이군이의 손에 펜치를 쥐여 주며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 줬다. 이군이는 믿음직한 대여점 직원의 응원을 받으며 진정했다.
양손에 펜치를 쥐고 가장 작고 두께가 얇은 비늘 하나를 집었다. 힘을 주는 순간 펜치의 날이 구부러졌다. 도진이 재빨리 다른 공구를 건넸다. 그렇게 여섯 개의 공구를 모두 사용했지만 전부 비늘의 강도를 이기지 못했다.
‘어쩔 수 없죠. 비키세요. 제가 힘으로 뜯겠습니다.’
‘아니옵니다. 혹시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다른 방법도 구해 왔사옵니다.’
보글보글. 물거품을 일으키며 조용히 속삭인 이군이가 보따리에서 로프를 꺼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로프가 아니라 ‘선속’이라는 영물의 허물이었다.
선속은 긴 끈 모양의 영물인데 물리적인 힘으로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으며 뛰어난 수축 기능도 지니고 있다. 수십 년에 한 번씩 허물을 벗는데 그 허물 또한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저승에서는 죄인을 지옥에서 꺼낼 때 쓰기도 한다. 죄인이 선속 허물의 꼬리 부분에 매달리면 목 부분 어딘가를 눌러 수축시켜서 꺼내는 방식이다.
이군이가 꺼낸 선속 허물은 끝에 갈고리도 매달려 있었다.
‘신령님이 직접 갈고리를 매달았습니까?’
‘네…. 혹시 공구들이 효과 없을 때를 대비해서….’
이군이가 갈고리를 비늘과 비늘 사이에 걸었다. 카랑카랑한 소리가 꽤 커서 둘 다 흠칫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늪이무기는 다행히 깨어나지 않았다.
수축되었을 때 갈고리가 비늘을 벗겨 낼만 한 위치에 잘 걸어 놓은 다음에는 허물의 머리 쪽으로 헤엄쳤다. 이군이와 도진이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도진이 완력으로 떼어 낸다는 마지막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이군이는 제힘으로 해내고 싶은지 꽤 긴장한 상태였다.
‘제발…!’
이군이가 허물을 수축시키는 관절 부위를 꾸욱 눌렀다. 그때였다.
크르르르릉-
자고 있던 늪이무기가 꿈틀거렸다. 해저동굴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으음… 간지럽구나….”
늪이무기의 낮은 음성이 해저 동굴에 우우우우웅- 울려 퍼졌다.
도진은 이군이의 멱살을 쥐고 재빨리 헤엄쳐 동굴의 오목한 부분 쪽에 숨어들었다.
“불청객이 왔느냐….”
“…….”
“두 명인가. 모습을 보이거라….”
정말 들킨 걸까? 싸워야 하나?
도진이 이군이의 입을 막은 채로 눈치를 살폈다. 계속 숨어 있을 생각이었으나 이군이가 그의 뿌리인 금가락지로 변해서 도진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사람 모습을 한 이군이는 늪이무기의 모습이 보이는 곳으로 헤엄쳤다.
“아아아아안녕하세요욧…. 늪이무기 님…!”
몹시 겁먹은 상태에서도 꾸벅 인사하는 이군이에 어쩔 수 없이 도진도 헤엄쳐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늪이무기 님.”
쿠구구궁- 늪이무기가 거대한 목을 비틀었다. 늪이무기의 노란 눈이 둘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 눈이 얼마나 큰지 시야가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했다.
도진이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악신이 되기를 거부하고 역행의 길을 걷고 있는 해저의 늪이무기는 아주 강한 존재였다. 혼자라면 동굴이 무너지든 말든 상관 안 하고 싸워서 찍어 누를 수 있겠지만, 이군이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