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33화 (133/203)

“대화가 자유롭지 않아 정말 불편하구나.”

“그러니까요. 야, 솔직히 말해. 우리 도움 필요 없어?”

필요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리모스는 얼마 전 어마어마한 양의 음기를 손에 넣었다. 힘의 원천을 집어삼킨 악신은 한참 동안 그 공터에 서서 달빛을 만끽했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배리모스의 중얼거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서늘하기보다는 공허하고, 섬뜩하기보다는 허무에 차 있는…. 반쯤 내리깐 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푸른 빛을 띠었다.

한수는 이상하게도 배리모스가 꼭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그 순간만이었고, 음기가 잠들어 있던 공터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자 원래의 거칠고 흉폭한 악신으로 돌아왔다. 눈동자가 다시 푸른색을 띤 적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배리모스는 매일 어디론가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석진의 몸으로 다닐 때는 한수가 울고불고 빌다시피해서 동행했는데, 배리모스는 듣도 보도 못한 신비한 장소에서 약초를 캐거나 삼을 채취하거나 진귀한 샘물을 담거나 했다.

외출하지 않을 때는 아파트의 방에 틀어박혀 오로석영지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마치 수험 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사악한 짓을 계획하고 있는 걸까. 한수는 벌써부터 겁이 났다.

“야.”

“아…!”

도진의 부름에 한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안 돼요. 저, 절대 도와주지 마세요. 저, 저희가. 제, 제가 알아서. 알아서 할, 테니까.”

“거참 답답하네. 알았어. 안 도와줄 테니까 이거나 받아.”

도진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휙 던졌다. 한수가 받아 보니 저번에도 받았던 이리 만물 대여점 명함이었다. 생긴 건 똑같았는데 다만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한수의 눈빛에 이채가 서리자 이리가 미소 지었다.

“번호가 그때 알려 준 것과는 다르지? 우리 대여점은 주기적으로 번호를 바꾸거든. 명함에 자동 반영되고 있어.”

한수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바, 받을 수 없어요. 부, 부, 분명 눈치챌 것…. 드, 들키면. 들키면, 아, 안전하지 못, 못, 해요. 바, 받을 수 없, 어, 어요.”

심적으로 격양되자 말더듬도 심해졌다. 이리가 잔잔하게 말했다.

“진정해. 명함은 이 주차장 구석에 두는 걸로 하자. 나무껍질 속에 숨겨 놓을게.”

이리의 말이 끝나자 구깃해졌던 명함이 둥실 떠오르더니 근처의 은행나무 껍질 속에 파고들었다.

이리가 ‘이러면 될까?’ 하고 바라보자 한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가, 감사… 합니다.”

“더 해 줄 수가 없어서 유감이야.”

“이, 이미 충분히 해 주셨…. 그, 그때 알려 주신 주술도… 자, 잘 사용하고 있어요….”

이아진의 육신에 잡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주술을 말하는 것이다. 도진이 친절하게 부적을 그려 줬었다. 도진이 자기가 좀 잘 그려 줬다며 끄덕끄덕하고서는 물었다.

“배리모스가 이아진에게 걸린 주술을 보고 뭐라고 안 했냐?”

“흐읍.”

“아오, 씨. 함구령 때문에 뭔 대화를 할 수가 없어. 진행이 안 돼. 고구마 퍼먹는 것 같아. 스승님, 속이 답답해요.”

도진이 고릴라처럼 가슴을 퍽퍽 쳤다. 이리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배리모스가 이아진은 건드리지 않는구나.”

“……!”

한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리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배리모스는 아진에게 유달리 다르게 행동했다. 건방진 말을 해도 혀만 차고 넘어갈 때를 보면 특별 대우하는 것 같은데, 신체의 자유는 완전히 억제할 정도로 아주 예민하기도 했다.

아진은 어려서부터 장신구 하나 마음대로 걸치지 못했다. 귀도 뚫지 못했고, 술담배는 물론 문신이나 염색도 꿈도 꾸지 못했다. 한수는 더듬더듬, 아진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자유롭되 자유롭지 않은 상황을.

가만히 듣던 이리가 입을 열었다.

“이아진을 만나 보고 싶은데.”

“아, 아, 안 돼요. 아진이에게, 쓰, 쓸데없는 희망을-.”

“그냥 얼굴만 한번 보면 돼. 아무 말도 안 할게.”

“아, 안 돼요. 어, 얼른 가세요….”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만나지도 못하게 해? 너 동생 구속하는 오빠냐? 그러면 동생이 싫어해. 뭐, 딱 보니까 사이 나쁘게 생겼네. 나는 동생이랑 사이 진짜 좋은데.”

한수가 발끈했다.

“저, 저도 사이좋아요. 치, 친남매처럼. 아, 아진이는 저, 정말 착해요.”

“내 동생도 착해. 그리고 예뻐. 애가 털털하긴 한데 생긴 건 아이돌 같아. 데뷔 권유를 벌써 세 번이나 받았어.”

“아, 아진이는 예뻐요. 또, 똑똑하고. 서, 서울대도 갈 수 있었고. 요, 요리도 잘해요.”

“내 동생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한다고 하면 그냥 몇 달만 빡세게 공부하면 바로 서울대 들어갈걸. 머리가 좋거든.”

“아, 아진이는-.”

두 오빠가 갑자기 동생 자랑에 빠진 그때 드르륵,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서 내린 이는 예쁘고 착하고 서울대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며 요리도 잘하는 이아진이었다.

“으앗.”

이리와 도진은 놀라지 않았는데 한수가 거의 기겁을 하다가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빠?”

급히 달려온 이아진의 시선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고 있는 한수와 깡패임이 틀림없는 잘생긴 남자를 훑고 마지막으로 이리에게 가 닿았다.

무당인 아진은 이리의 영험함을 단번에 알아봤다. 만약 신을 받은 상태였다면 이 자리에서 납죽 엎드리지 않았을까 싶은 영험함이었다.

아진은 배리모스한테도 겁 없이 대드는 대찬 성격이었는데, 저 곱상한 청년의 앞에서는 어째서인지 기가 죽었다. 아진이 얼른 한수의 곁에 섰다.

“누… 누구세요? 누구야, 오빠?”

“그, 그냥 지, 지나가던 사람들, 이야.”

“거짓말하지 마. 느낌이 되게 묘한 분들인데. 저기 앉아 계신 분은 무당이야? 아니, 근데 지금 어디에 앉아 계신 거지?”

“…….”

“어…. 저 남자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아진이 도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퇴마 영상’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출연자들을 간절하게 찾는 이석진으로 인해 도진의 얼굴 초상화를 본 적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영상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야!”

구름처럼 보이는 이상한 의자에 앉아 있는 예쁘장한 청년한테는 주눅이 드는데, 부리부리한 남자한테는 성격대로 말이 나왔다.

“너희 뭔데 우리 오빠 괴롭혀? 악신이 보낸 놈들이냐?”

“아, 아진아. 아, 아니야. 그, 그런 거 아니야. 조, 좋은 분들, 이야.”

좋은 분들 중 하나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하, 어이없네. 배리모스가 보내? 배리모스 따위는 우리한테 한주먹거리도 안 돼. 누굴 누구의 수하로 아는 거야, 지금.”

“뭐야…. 진짜로 배리모스를 알고 있어? 대체…?”

“우리는 이-.”

“아, 아무도 아, 니야! 이, 이분들은… 그, 그냥 무, 무당이야!”

한수가 꽥 소리쳤다. 도진을 쳐다보는 눈이 제발 말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진은 이리 만물 대여점에서 왔다고 소리칠 작정이었다. 도진은 답답한 건 질색인 장사였으므로. 이리도 잠자코 있질 않은가. 막 입을 열려는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끼웅?

“어…….”

셔츠 앞주머니에서 끼웅이가 고개를 내밀었고, 이아진이 끼웅이를 알아본 것이다.

끼웅. 끼웅!

끼웅이가 반갑다고 손을 흔들었다. 경계 어린 얼굴에 설핏 미소를 띤 이아진이 말했다.

“끼웅이, 네가 무당을 데리고 온 거구나. 우리를 도와주라고…. 난 또 오해할 뻔했네.”

충분히 큰 오해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악신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예전에도 누가 우리 도와주다가 영능력을 잃었거든요.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아요. 이만 가 보세요. 배리모스가 돌아오기 전에…….’

이아진은 주차장 밖으로 배웅 나오면서까지 이리와 도진을 멀리 내보냈다.

둘은 오해를 풀어 주지 않았다. 한수가 눈에 띄게 안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아진이 끼웅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나중에 끼웅이를 심문할 일이고. 명함도 전달했고, 얼굴도 확인했으니 오늘의 목적은 다했다.

그 뒤로는 도진이 조르고 졸라서 데이트를 이어 가다가 시내에 있는 카페에서 차 세 잔을 시켜 놓고 앉았다.

“도진아. 오늘 이아진, 느낌이 어땠어?”

“도희가 더 강해 보이던데요. 팔씨름하면 1초도 안 걸리고 이길걸요.”

“…그거 말고.”

“음, 배리모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는 걸 보면 함구령에 걸리지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성격으로 봐서는 함구령에 걸렸어도 계속 말하고 다닐 것 같은데, 그러면 온몸이 흉터 투성이가 되겠죠. 배리모스는 이아진의 육신에 예민하니 일부러 함구령을 걸지 않았어요.”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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