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도진 님.”
도진의 어깨에서 끼웅이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베드로 신부는 이리의 말대로, 도깨비도 함께 왔군요, 했다.
“여기. 받으세요. 올해는 스승님과 제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년간 잘 쓰겠습니다.”
도진이 신부에게 오색 가루가 든 손바닥만 한 병을 건넸다.
이 가루를 뿌려 테두리를 만들면 악신이 가루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구마 의식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가루로, 이리는 이 성당과 50년째 거래해 오고 있었다. 그동안 신부가 두 번 바뀌었는데, 베드로가 보조 사제를 데리고 온 걸 보면 이제 또 바뀔 때가 된 모양이었다.
오늘 만남의 목적이 단지 이것뿐이지는 않았다.
베드로 신부가 성당 안으로 안내했다. 꽤 넓은 곳이었는데 늦은 밤이라서인지 기도드리는 이는 없었다. 양쪽 벽면이 십자가의 길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진은 걸으면서 왠지 기분이 묘했다.
고해실과 제의실을 지나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로비에 있던 깔끔하게 잘 관리된 계단과는 달리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이었다. 베드로가 앞서 걷고 이리가 뒤를 따랐다. 도진도 냉큼 뒤에 따라붙었다.
“가족분들께 저보다 능력 있는 선생님께서 도와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다만?’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티칸 사제가 아니라는 점에 불안해하고 계십니다…. 혹여 선생님을 믿지 못하고 실례를 범하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세요. 1년이나 고통받은 분들입니다.”
“불안은 당연한 감정이니 걱정하지 마. 도진아, 들었지? 화내지 말고 잘 참아.”
“…….”
도진이 벌써 화가 끓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지만 각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을게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스승님께 어떤 망발을 지껄여도 다… 참을… 참겠…. 하으어어어.”
그는 요즘 언행을 조심하고 있었다. 나비 선인의 한로 연회가 다음 주인지라…. 본래 ‘씨발’ 욕설 정도는 숨 쉬듯 내뱉는 그였지만 이리와 동석하려면 덕을 한 톨이라도 아껴야만 했다.
“도진아. 괜찮겠어?”
“그럼요. 전 이 녀석만 있으면 참을 수 있어요.”
끼우웅!
도진이 끼웅이를 손에 쥐었다. 스트레스받을 때 끼웅이를 길게 늘이거나 납작하게 누르면서 참을 생각이었다.
베드로 신부가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부님!”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일가족이 벌떡 일어났다. 부마자(付魔者)의 아내와 부모님이었다. 가족은 이미 신부에게서 ‘선생님’에 대한 설명을 들은 터라 누구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젊다고는 들었으나 생각보다 더 어린 모습에 놀라고, 두 사람의 외모에 두 번째로 놀랐다.
“구마 의식은 교황청에서 허가받은 사람만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저기. 정말로 선생님도… 허가를 받으셨는지….”
“제가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그, 그게 아니라…. 저이가 악마에 들린 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사기꾼들도 많이 만났어요…. 이제 막다른 길이라서, 그래서….”
“걱정 마세요. 정말 악신에 들린 거라면 제가 해결할 테니까 세 분 모두 안심하고 기다리세요.”
이리가 걱정 마라,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말하자 일가족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불안과 걱정이 사라졌다.
“네,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세상에. 보조 사제가 경탄했다. 구마 의식을 신부님이 직접 해 달라, 그리고 우리도 과정을 직접 보게 해 달라고 떼쓰던 사람들이 아무 억지를 부리지 않고 앉으니 신기했다. 베드로 신부는 매년 보아 온 광경이라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역시 스승님이야.”
도진이 딱히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아 끼웅이를 다시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이리가 옅게 웃었다. 사실 이리는 무례하게 구는 인간들로 인해 스트레스받은 도진이 덕을 깎는 언행을 지껄일까 봐 미리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스승님, 이제 들어갈까요?”
“그러자.”
대기 공간 안쪽에 녹슨 문이 있었는데 아까부터 끄응, 끙 신음 소리와 끼히히헤헤 하는 웃음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손잡이가 굉장히 녹슬고 더러워서 절대로 이리의 고운 손으로 열게 하지 않기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도진이 얼른 문을 열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베드로 신부는 둘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문을 닫았다.
4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는 두 손과 두 발이 침대에 묶인 깡마른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끼히, 히, 히히. 너희 같은 보잘것없는 인간 따위가….”
남자의 입을 빌려 말하던 악신이 마치 동영상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멈췄다.
당연했다.
들어온 이가 인간 사제들이 아니라 이리 선인과 그의 장사 제자였으니까.
애들 노는 데에 갑자기 어른이 나타난 꼴이었다.
“왜, 왜 당신이 여기에?”
“의뢰를 받고 왔어. 너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
“저, 저, 저한테요?”
인간을 좀 가지고 놀려고 했던 악신이 뚜둑, 뚝, 밧줄을 끊고서 침대 위에 공손하게 무릎 꿇고 앉았다.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만약 도와드리면 절 지옥에 보내지 않아 주실런지… 헤헤.”
“그 약속을 하려면 일단 확인부터 해야 해. 혹시 인간을 죽인 적 있어?”
악신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어, 없습니다요.”
“내 눈 보고 말해.”
“아이고…. 선인님. 저는 악신입니다. 절대 착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악한 인간의 혼만 잡아먹었는디유. 지금 제가 빙의한 이 자도 아주 사악한 놈입니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바람을 피웠고, 그 상대도 임신했는데 연락 끊고 내다 버렸어요.”
“미친. 쓰레기네.”
도진이 호응하자 악신이 열렬하게 끄덕였다.
“이딴 놈들 잡아먹는다고 절 지옥에 보내시지 않을 거지요?”
“하지만 이딴 놈을 이용해서 아내와 부모의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그 슬픔을 먹고 있는 너도 만만치 않게 쓰레기야. 벌써 1년이나 됐다며? 1년 동안 저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혔어.”
“…너는 닥치거라. 겨우 장사 주제에 어딜 나대느냐.”
“겨우 장사? 기도식도 치렀고 이제 곧 선인이 될 사람한테 겨우 악신 주제에!”
“도진아, 그만.”
성난 소처럼 씩씩거리는 도진을 말리며 이리가 악신에게 다가갔다.
“내 제자에게 건방지게 굴지 마.”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배리모스라는 악신, 알아?”
“배리모스요?”
“그래. 내 눈을 보고 대답해.”
악신이 이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름을 들으니 서양 녀석인가 본데, 저는 맹세코 모릅니다유. 그 서양 녀석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요? 제가 대신 가서 복수해 드릴까요?”
“만인사는?”
“히익.”
악신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넙죽 엎드렸다.
“만인사는 수천 년 묵은 악신이 아닙니까! 저는 그놈과는 못 싸웁니다. 마경의 미치광이들이나 하계의 지배자분들이 아니고서야 만인사와 어떻게 싸워요.”
이리는 필요한 대답을 모두 얻었다. 악신들은 배리모스의 존재를 모른다. 바꿔 말하면, 배리모스는 악신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그의 목적에 악신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선인님, 이제 저는 어찌… 그냥 쏘옥 빠져나가면 되는 것일까유? 헤헤.”
눈감아 주냐는 물음에 이리가 고개를 저었다.
“죄를 지었으면 재판을 받아야지.”
“질문에 대답했는데!”
“도진아.”
“맡겨 두세요.”
도진이 콧김을 내뿜으며 소매를 걷었다.
“젠장. 나도 순순히 나가진 않을 것이다!”
크게 소리친 악신이 남자의 몸으로 숨어들었다.
남자가 끼긱, 끼기긱 괴기한 소리를 내며 발광했다. 사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청력이 좋은 도진은 바깥에 있는 일가족이 ‘제발 우리 남편을, 우리 아들을 돌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저 쓰레기 새끼!”
도진이 허공에서 흰 부채를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의 끼웅이를 이리에게 건넸다.
끼우웅….
악신 때문에 떨고 있던 끼웅이가 이리의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는 끼웅이가 안전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손을 둥글게 만들어 등을 덮었다. 그리고 조금 뒤로 물러나 지켜봤다.
“흐얍!”
도진은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다른 손가락은 접은 채로 허공에 휘황찬란하게 손동작을 했다. 결박술을 선보이려는 것인데…. 노련한 선인들은 손동작 없이 생각으로도 도술을 펼칠 수 있으나, 도진은 아직 이런 휘황한 손동작이 필요했다.
“크으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