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찰마 공주에게 말해 주자.”
도진은 그제야 찰마 공주가 통로로 뒤따라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진현계 임금님과의 조약 때문에 중간계로 올라오지 못한 것이다.
둘은 다시 어두컴컴한 감옥으로 돌아갔다. 찰마 공주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찰마 공주, 배리모스는 이미 음기를 거두었습니다.”
“안타깝군요. 내가 알았다면 흡수했을 터인데…. 선인께서 알고 있는 다른 무덤은 없습니까?”
찰마 공주는 진심으로 아쉬운 듯 보였는데 이리는 그 질문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들은 감옥을 나왔다. 찰마 공주는 마중을 보내지 않았을 때와 다르게 마차를 내왔으나 이리가 통로를 통해 나가겠다고 거절했다.
“이리 선인, 이제 어찌할 겁니까? 나는 당장 웅녀를 보내 인간의 몸에서 사역마를 끄집어내고 싶습니다만.”
“배리모스가 쉽게 나오려 하겠습니까? 그러다 이석진이 다치면 임금께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찰마 공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빨 빠진 호랑이 따위는 무섭지 않습니다. 그대의 의사가 중요하지요.”
“…인간이 다치면 나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사역마와 퇴마사를 확실하게 관리하길 바랍니다. 나는 더는 내 아이들이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오늘의 일은 왕께 보고드리고 대처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찰마 공주의 강한 경고에 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내심 놀랐다.
통영 도깨비 사건 때, 대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왕께 보고를 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리는 ‘인간의 도시가 전멸됐고, 그 나라에 혼란이 찾아왔다는 정도여야 해.’라고 대답한 바 있었다.
‘태고의 선인의 무덤에 남아 있던 음기가 엄청나긴 했나 보구나. 왕에게 보고할 정도라니….’
“도진아, 가자.”
“아, 네!”
이리가 다시금 통로를 만들었다. 도진은 찰마 공주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안 해도 될지 살짝 고민했는데 찰마는 도진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찰마는 이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 선인.”
“말씀하세요.”
“나는 그대처럼 강한 자가 어째서 진현계 왕의 수하 노릇을 자처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대라면 칠계를 통일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라면…….”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을 마지막 태고의 선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만큼 강해지면 알게 됩니다.”
도진은 이때, 쓰개를 사이에 두고도 찰마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방 먹은 사람 특유의 얼빠진 얼굴.
찰마 공주가 곧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 모습이 퍽 음산하여 도진은 얼른 이리의 곁에 붙어 통로를 빠져나갔다.
스승과 제자가 떠난 후 찰마 공주는 거추장스러운 면사 쓰개를 당장에 태워 없앴다.
새까만 눈썹에 새하얀 피부, 새빨간 입술의 고혹적인 용안이 드러났다.
만인사의 명줄을 끊어 내기 위해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왕은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계의 하늘에는 별이 없다. 그저 영원한 먹구름만이 들끓고 있을 뿐이다.
‘가끔은 나를 떠올려 주려무나…. 가끔은….’
‘가끔은 떠올려 달라고?’
그 말은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스승의 목소리도, 얼굴도, 손짓 하나까지도 단 한 순간도 떠오르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고독한 냉소가 하계의 음기 속으로 흩어졌다.
23. 만월
이리는 하계 방문 후 다음 날 진현계에 올라갔다. 왕은 기도식 때보다 훨씬 더 피로에 젖은 얼굴로 이리의 보고를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왕이 미간을 좁혔다.
“태고의 선인의 무덤이라…. 그런 곳이 있는 줄은 나조차 몰랐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일이 아니라 굳이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곳이 또 존재합니까?”
“한 곳 더 있습니다. 그곳에는 아직 누구도 방문한 흔적이 없더군요.”
“…결계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장 배리모스가 무덤의 음기를 탈취할지도 모르는데 안전한 지 확인만 하고, 결계도 세우지 않고 돌아왔다?
이리 선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왕이 손을 들자 홍의동자들이 부채질을 멈췄다.
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선인…. 그대가 무덤을 관리할 생각이 없다면, 누구도 그곳의 음기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진현계에서 관리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친구들이 원한 바가 아닙니다….”
“태고의 선인들이 원한 바가 무엇입니까?”
“누구든 가장 필요한 자가 무덤을 발견할 것이고, 그자가 힘을 가져갈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게 악신이라도?”
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긴 손톱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는 찻잔을 손에 쥐고 왕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 옛날, 이 세상에 생명이 이렇게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도 악신과 선인은 대립하는 존재였다. 도술을 사용하는 선인과 도술에 내성이 있는 악신. 대립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태고의 선인에게는 악신도, 선인도 똑같은 미물이었다. 태고의 선인 중 하나가 진현계를 만들고 그곳의 왕이 되면서 악신보다는 선인 쪽에 심적으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위아들의 수도 적었고 인간 문명이 찬란하던 시기도 아니었다. 치를 떨게 하는 악신도 없었으며 감탄을 자아내는 선인도 없었다. 태고의 선인들이 보기에는 이 개미 집단과 저 개미 집단이 서로를 헐뜯으며 앵알앵알 대는 것으로 보였다.
무덤의 막대한 음기를 한쪽 개미 집단에게만 선사하는 건 대단히 불공평한 일이라…. 누구든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자가 무덤을 찾을 것이고, 그자는 원하는 만큼 음기를 가져갈 수 있다. 그렇게 선언하고 잠든 것이다.
윤리의 기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윤리였다. 이리는 친구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이리 선인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왕의 음성에 피로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천 년 전의 왕이라면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했을 텐데.
이리는 왕의 무기력증과 피로를 이용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진현계의 왕도, 하계의 왕도 몰랐던 무덤의 존재를 안다니… 사역마의 가문이 실로 대단했나 봅니다. 선인께서 추측하는 가문은 어디입니까?”
“왕께서 생각하는 곳과 같습니다.”
과거 인간계를 호령하던 퇴마사 가문이 몇 곳 있었다. 위아 세계로 치면 칠계와 같은 강대한 세력들이었다. 퇴마사의 주술은 덕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진현계 왕의 규율이라는 제약도 받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주술은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 형태였다. 마치 인간의 한계 없는 잠재력처럼. 그야말로 퇴마사의 시대였다.
그러나 하루 전쟁 이후 하계 족속들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퇴마사가 필요한 이들이 줄어들면서 급속도로 몰락했다. 권력과 힘에 심취해 양민들을 괴롭혀 왔기 때문에 양민의 외면도 매몰찼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꽤나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 갔던 가문이 있었다.
“만월.”
이름에는 힘이 있다. 특히 강력한 퇴마사들이 사용했던 이름이니만큼 이리가 그 이름을 발음한 순간 기묘한 울림이 편전에 퍼졌다.
만월 가문은 퇴마사 가문 중에서도 가장 악독했던 이들이었다.
도깨비들을 주술로 협박해서 인간 마을을 괴롭히게 한 뒤 그 마을 관리에게서 거금을 받고 도깨비를 퇴치해 준다거나. 주술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관리직을 꿰찬다거나.
그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계의 족속과 손을 잡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정의로운 산신령이 근처 마을들을 괴롭히는 하계 족속들을 때려잡은 일이 있었다. 마을들은 한동안 평화로웠는데, 이게 아니꼬웠던 만월 가문은 몰래 하계 족속들과 손을 잡고 산신령을 덮쳤다. 산신령이 죽고 나니 당연히 마을들은 하계 족속들에게 다시 괴롭힘을 당했고, 만월 가문에 의뢰를 해야만 했다.
그 일로 만월 가문은 이리의 눈 밖에 났다. 인간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리의 인정이 있어야 하니 만월 가문은 난감했을 터였다.
“선인께서 탐탁지 않아 했던 가문이지요…. 하필이면 가장 사라졌어야 할 곳의 핏줄이 이어지고 있었군요.”
그때는 이 눈앞의 왕도 탐탁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왕은 인간을 약자의 범주에 넣었기에.
“만월이 맞을지 확실하진 않습니다. 이제 알아봐야지요.”
“선인. 나는 염려되는군요. 사역마는 위아가 아닙니다. 인간의 것입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이리 선인. 퇴마사는 덕을 사용하는 이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연구해서 개발해 낸 주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엄연히 인간이 인간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뿐인데 우리가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역마는 선인의 경고를 듣고 인간이나 죄 없는 위아가 아닌 하계의 족속만 해한 모양인데. 경고를 지켰다고 벌을 내릴 생각이십니까. 사역마도 무척 억울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