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스승님의 간식이래요. 여기 위아들은 절 모르나 봐요. 기도식도 치렀는데.”
“알면서 농담하는 걸 수도 있고. 소문에 어두우니 진짜 모를 수도 있고….”
이리가 문득 말을 멈추고 정면을 쳐다봤다. 도진도 고개를 들었다. 두 개의 뿔이 달린 집채만 한 이무기가 둘 앞을 가로막았다. 길고 도톰한 혀가 당장이라도 뻗어 올 것처럼 낼름거렸다.
“크크크. 이리 선인의 악명은 자자하지. 나는 촉징. 그대에게 결투를 청한다.”
“스승님에게 도전하려면 나를 먼저 통과해야 합니다.”
도진이 앞에 서자 요괴가 킬킬 웃었다.
“스승? 스승이라고? 이리 선인이 제자를 받았나? 크크크. 이리 선인의 제자라니 정말 먹음직스러운 요리 이름이로군!”
쉬익! 요괴가 곧장 혀를 뻗어 왔다. 도진은 두꺼운 혀끝을 낚아채고 돌돌 말아서 요괴의 얼굴을 끌어당긴 뒤 주먹질했다. 퍼억!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800년간 하계의 합천군 문 영역을 호령했던 대요괴 촉징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뭐야. 너무 약하잖아.”
주변은 잠깐 고요하더니 곧 귀가 찢어질 만큼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이리 선인의 제자가 아주 장사로군, 정말 장사 아닌가? 아아,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다. 염라대왕과 팔씨름을 해서 이긴 자답군, 도술도 제법 한다던데 자네가 가서 겨뤄 보게, 자네가 가 보게 등등…. 도진은 그 말소리들을 무시했다.
“도진아.”
이리가 부르자 도진이 끈적끈적한 촉수 액과 피가 묻은 손을 내밀었다. 이리가 도술로 손을 깨끗하게 씻겨 줬다.
끼우우…….
도진의 주머니에서 끼웅이가 안 그래도 동그랗게 말았던 몸을 더 동글게 말았다.
“야, 무서워하지 마. 이미 얘기했던 상황이잖아.”
합천군에 오기 전에 이리가 말 했다.
절대로, 절대, 절대, 절대로 먼저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되지만, 만약 상대가 먼저 공격할 경우 한 마리 정도는 쓰러뜨려도 된다고.
쓰러뜨려도 된다는 건 죽여도 된다는 뜻이다.
하계는 칠계 중 유일하게 ‘살생’이 금지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진현계 왕의 규율 중 ‘살생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율을 마음껏 어겨도 덕이 깎이지 않는 것이다.
대요괴 하나를 저승으로 보낸 도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승님, 저 뭔가 속이 시원해요. 조금만 더 싸우고 싶은데요. 한 세 마리만 더 죽이면 안 될까요?”
“우리 바빠. 얼른 가야 해.”
“저 가끔 여기 와서 스트레스 풀고 가도 돼요?”
“그러다가 잘못 걸리면 네가 다쳐.”
“저보다 강하면 바로 도망치면 되죠.”
“너보다 강하면 너를 도망치게 놔두겠어?”
하긴…. 이리의 말이 옳은지라 도진은 이리 없이 여기 오는 걸 포기했다.
“이리 선인의 제자! 네게 도전하겠다. 나는 대요괴 철차!”
다시 이동하려는데 또 다른 요괴가 하나 나타났다. 이번엔 철망을 뭉쳐 놓은 것처럼 생긴 놈이었다.
“이대로면 움직이지를 못하겠구나.”
이리가 손을 한번 휘젓자 주위에 울타리가 생기고, 그 울타리가 주욱 올라와 새장처럼 둘을 감쌌다. 쉬익! 요괴가 촉수를 뻗었지만 결계에 가로막혔다.
둘은 다시 둥둥 떠서 이동했다. 그동안 계속 위아들이 결계를 공격했다. 도진이 혀를 내둘렀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꼭 한번씩 공격해 보고 가는군요. 이걸 호승심이라고 해야 할지, 객기라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지.”
“미쳤다고 해도 될 것 같네요.”
“응. 그래도 마경의 미치광이들보다는 정상적이지만….”
이리는 좀 더 이동하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래도 마중을 보내지 않은 모양이야. 통로로 직접 가야겠다. 내 옆에 붙어.”
“네.”
도진이 이리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 틈을 타 팔짱까지 꼈지만 이리는 팔을 빼내지 않았다.
이리가 앞으로 손을 뻗어 통로를 만들고 잎사귀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자, 처마마다 등불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는 붉은 비단이 깔린 대전이 나왔다.
언제 봐도 신기한 능력이었는데, 감탄할 새가 없었다.
대전 위 금장식으로 치장한 옥좌에 붉은 대례복을 입고 검은 면사 쓰개로 얼굴을 가린 찰마 공주가 앉아 있었다. 진현계 임금님의 홍의동자처럼 수발드는 이도, 웅녀와 대적 같은 악명 높은 수하들도 없이 혼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리 선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찰마 공주.”
찰마 공주의 음성은 매우 낮고 불길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유혹하는 악마처럼 음산한 목소리였다.
도진은 이리의 팔짱을 놓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리보다 반 발짝 앞에 섰다. ‘장사의 본능’이 말해 왔다.
찰마 공주는 강하다.
지금까지 도진은 수많은 강자를 만났다.
진현계의 선인들, 극락의 옥황상제와 오방장군, 저승의 시왕과 강림도령, 하늘꽃밭의 박씨부인, 천지천해의 사방위신….
그러나 그들 앞에서도 이런 압도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계의 왕은 강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검은 실 팔찌로 제약을 둔 이리 선인, 바로 그다음이 아닐까 할 정도로.
긴장감에 근육이 팽팽해지고 등줄기가 찌릿하게 솟았다.
“이리 와 앉으시지요.”
찰마 공주가 넓은 소맷자락을 한번 휘두르자 이리와 도진의 앞에 원형 원목 탁자가 나타났다.
찰마 공주는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와 스스로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리도 도진을 지나쳐 원목 의자에 앉았고, 도진도 얼른 뒤따르려는데 남는 의자가 없었다.
‘…뭐야? 나는 서 있으라는 거야?’
도진은 기가 막히고 자존심도 상해서 긴장이 도리어 풀려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의자는 보이지 않고 대전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석상과 화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가까운 기둥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도진이 주저 없이 석상을 들어 올리고는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쿵! 석상을 거꾸로 들어서 땅에 꽂은 뒤 판판한 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찰마 공주가 새카만 면사 쓰개 뒤에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게 보였다.
이리는 도진이 하계 궁궐의 가구를 상하게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하게 미소 짓더니 불편한 석상 의자를 방석이 깔린 원목 의자로 바꿔 주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도진은 이리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이제 보니 찻잔도 두 개뿐이었다. 여차하면 찻주전자째로 들이마실 작정이었는데 찰마 공주가 탁자 끝을 기다란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덩굴이 솟구치더니 도진의 앞에 찻잔을 하나 놔두고 다시 땅으로 들어갔다.
“…….”
도진이 찻잔의 흙을 털어 냈다. 차라리 찻잔이 없는 게 나았을지도….
“이리 선인, 80년 만이로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기도식 초대장을 기다렸는데 끝내 보내지 않으셨더군요.”
“찰마 공주. 우리가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듯합니다. 바로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섭섭하게 이러지 마십시오. 하계의 차와 다과가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성 들여 준비했습니다.”
찰마 공주가 한 손으로 넓은 소매를 갈무리하고 찻주전자를 들어 손수 이리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쪼르르 소리가 아니라 챙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도진이 보니 찻잔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가득했다.
‘와, 미친. 하계에서는 바늘을 우려 마셔…?’
“아, 전 괜찮습니다.”
도진이 얼른 차를 가로막으며 사양했다. 찰마 공주는 말없이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쪼르르-.
이번엔 연분홍빛의 찻물이 제대로 흘러나왔다.
도진이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스승님한테는 바늘을 따라 주고 자기는 찻물을 마신다고? 자기가 필요하다고 불러 놓고 시비 거는 거야?
찰마 공주가 먼저 차향을 음미하고는 한 모금 마셨다.
“이리 선인이 온다기에 수하에게 특별히 좋은 차를 내오라 일렀습니다. 하계에서만 자라는 달맞이 열매를 달인 차입니다. 드셔 보시지요.”
“그대와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싶지는 않으나 달맞이 열매라면 나도 들어야겠군요.”
이리가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자 바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꽃잎이 띄워진 연분홍빛의 향긋한 차가 되었다. 이리는 차를 홀짝이고는 향이 좋다며 칭찬했다.
“스승님….”
도진이 애처롭게 바라보자 이리가 웃으며 도진의 찻잔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연분홍빛 찻물이 차올랐다. 도진도 맛을 보니 정말 향이 좋고 달콤쌉싸래했다.
퉷.
돌연 맞은편의 찰마 공주가 쓰개 아래에서 뭔가를 뱉어 냈다. 뭔가 하고 보니 바로 바늘이었다.
스승님이 뭔가 신묘한 도술을 부려서 한 방 먹였구나!
도진이 헤벌쭉 웃었다.
“이리 선인, 다과도 드시지요. 하계에서는 아주 귀한 주전부리입니다.”
찰마 공주의 말이 떨어지자 빈 접시에 여치와 지렁이, 벌레 유충 따위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찰마 공주가 젓가락으로 지렁이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씹는 소리에 도진은 물론이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구경하고 있던 끼웅이도 치를 떨었다.
“…도진아, 먹자.”
이리 또한 젓가락을 들었는데 그 젓가락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접시가 아니라 이리와 도진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는 꽃잎 모양의 접시에 고운 빛깔의 화전과 금귤정과, 송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