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21화 (121/203)

그들이 있는 곳은 경남 합천군의 늪 생태공원으로, 오후 늦게 이곳에 도착해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리는 아예 해진 후에 오려고 했으나 도진이 또 이 근방의 데이트 코스를 짜는 바람에 조금 빨리 왔다. 율피떡도 데이트 중에 산 것이었다.

“하계는 지형도, 기후도 너무 혹독해서 악신조차도 못 살겠다고 뛰쳐나올 정도야.”

“그렇군요. 스승님, 그럼 뻥튀기 드실래요? 밤묵으로 만든 뻥튀기라는데.”

끼웅!

“너 말고, 스승님.”

“나는 괜찮아…. 도진아. 내 말 듣고 있지?”

“그럼요. 저는 언제나 스승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도진이 앞주머니의 끼웅이에게 뻥튀기를 조금 뜯어 주며 말했다.

“스승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계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약한 것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 갔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 하계에 있는 족속들은 혹독한 환경에 적응할 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먼저 시비 걸지 말고 잘 처신해라. 라는 거잖아요. 맞죠?”

정확한 해석에 이리가 헛웃음을 지었다. 도진이 스윽, 이리의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걱정 마세요. 제가 상황 판단 못 하고 아무한테나 시비 걸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그래. 믿을게.”

“‘장사의 본능’이 있으니까 약한 녀석한테만 시비 걸게요!”

“…….”

해석은 정확히 했으면서 해석에 따를 생각은 없는 듯한 제자에 이리는 걱정이 많아졌다.

끼웅. 낑.

뻥튀기를 더 달라고 조르는 어린 잡귀가 이리의 근심을 더 했다. 끼웅이는 그냥 이해자에게 맡기고 올 걸 그랬나….

그 사이 하늘에선 해가 산을 넘어가며 붉은 노을을 만들어 냈다. 껍질이 썩어 가는 나무와 탁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풀, 머리카락처럼 늘어진 수풀 사이를 배회하는 새들…. 늪의 구성원들 모두에게 붉은 노을이 공평하게 내리쬈다.

저 불타는 노을을 신호로 작은 생명들은 다른 곳에 비해 유달리 깊고 어두운 합천군의 밤을 준비할 터였다.

-오늘도 저희 공원을 찾아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공원 폐장 시간이오니 모두 안전하게 퇴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 크지 않은 공원이고 관광객도 별로 없는데, 폐장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방송을 듣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무시하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더 많았다. 주로 커다란 카메라를 가진 사진사들이었다.

“안녕하세요. 폐장 시간입니다. 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이제 곧 공원 문이 닫힙니다. 정리해 주세요.”

노란 조끼를 입은 직원들이 직접 대면해서 말한 후에야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겨서 떠났다. 직원들은 도진과 이리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도 폐장을 알렸지만 도진과 이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사람이 모두 떠난 후 도진이 은신술을 풀었다.

“이렇게 퇴장에 집착하는 공원은 처음이네요. 인간들도 여기가 밤에 특별히 더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나 봐요.”

“근처에 저수지도 있으니까 밤사이 사고가 난 게 한두 번이 아니겠지. 내려갈 준비하자.”

“네.”

둘은 벤치에서 일어나 늪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로 향했다. 데크 중간에서 그리 높지 않은 울타리를 이리가 한 손으로 짚고 넘어갔다. 늪 위에 선 이리가 어서 내려오라는 듯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은 이리처럼 늪 위에 바로 서는 대신 다리 위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를 늪에 던졌다. 그러자 손바닥보다 작았던 잎사귀는 마치 양탄자처럼 넓어졌다. 도진이 그 위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스승님도 여기 타실래요?”

“그래.”

네 명은 넉넉하게 탈 수 있는 공간으로 이리가 냉큼 올라섰다. 도진의 입꼬리가 치솟았다.

양탄자 잎사귀가 늪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푸드덕, 첨벙, 첨벙. 새와 개구리, 뱀 등 작은 생물들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이곳에 위아는 없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잔챙이 요물도, 잡귀나 혼령도, 요괴와 영물도 없다. 근처에 산이 세 개나 있는데 어느 곳에도 산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신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합천군을 떠나야 한다.

이유는 하나.

이 늪 한가운데에 하계의 문이 있기 때문이다.

하계를 출입하는 문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데 한국은 바로 이곳, 경남 합천군에 있다.

아마 하계의 족속들의 뚫어 놓은 개구멍이 여기저기 있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이곳 하나였다.

끼우웅.

“끼웅아, 안 돼.”

끼웅이가 주머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이리가 검지로 머리를 꾹 눌러서 다시 집어넣었다.

끼웅?

“이 근처는 위험해서 안 돼. 나갈 때까지 도진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 얼굴 정도는 내밀어도 되지만 그 이상은 빠져나오지 마.”

끼우웅….

끼웅이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겁이 많은 아이라 이리의 말을 철저히 지킬 터였다.

“스승님, 끼웅이가 우리 일행이라는 걸 하계 애들도 알 텐데 설마 잡아먹으려고 들까요?”

“자기보다 약해 보이면 무조건 먹으려고 할걸. 내가 화가 나서 당장 소멸시켜 버린다고 해도 그래, 그래라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할 애들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군요.”

“그게 하계 족속들의 특성이지.”

“찰마 공주는 도움이 필요하면 대여점에 찾아오거나 다른 데서 만나면 되지 왜 자기 구역으로 부르고 그런대요.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 건가. 안타깝지만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들이 하계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찰마 공주의 전언 때문이었다.

사흘 전, 이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이는 찰마 공주 본인이 아니라 대리인이었다.

-선인님. 지금부터 찰마 공주님의 전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말해.’

-이리 선인. 인간 퇴마사가 하계의 족속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인간 관리는 그대의 영역이 아니던가요? 그대의 소홀함으로 하계의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사흘 후 만나서 얘기하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대리인은 그 말을 전하고는 공손한 인사 후 전화를 끊었다. 도진으로서는 이리를 탓하는 말투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리는 이게 찰마 공주의 성격이라 했다.

“기선 제압은 아니야. 회의 주간이 아닐 때 찰마 공주가 중간계로 오는 건 규율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일부러 우리를 부른 거지.”

“이리 선인이 하계에 들어가면 일이 안 커지고요?”

“나는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으니까 문제없어. 마경(魔境)만 아니면 돼. 그곳은 선인 출입 불가 지역이거든.”

이리가 이렇게 말해도 도진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전 찰마 공주 마음에 안 들어요. 퇴마사는 인간이라지만 퇴마사를 뒤에서 조종하는 악신, 헤게르미? 아니, 뭐더라. 배리모스는 하계의 존재잖아요. 자기가 관리 못 한 건 쏙 빼놓고 스승님만 탓하고. 그러고도 왕이라 할 수 있냐고요-.”

“이제 그만해. 하계의 문이 바로 앞에 있어.”

이리가 도진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도진은 다른 게 아니라 이리의 손가락이 제 입술에 닿는 바람에 망부석이 되었다.

하계의 문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진이 탁한 색의 안개 속으로 손을 뻗자 그제야 거친 표면의 나무 문 하나가 만져졌다. 도진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껍질 같은 것이 콧날에 닿고 있는데 역시 보이지는 않았다.

“신기하네요. 보이진 않는데, 만질 수는 있는 문이라니. 혹시 스승님한테는 보이세요?”

“지금은 안 보이는데, 도술을 사용하면 볼 수 있어. 웅녀가 만든 문이란다. 이제 들어가자.”

이리는 끼웅이가 도진의 주머니에 잘 숨어 있는지 확인한 후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고요한 밤을 가로지르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와… 냄새.”

하계에 처음 발을 내딛는 도진의 첫마디였다.

당연하게도 하계는 중간계와 아주 달랐다.

멀리서 용암을 내뿜는 화산, 밤인지 낮인지도 구별되지 않는 새카만 하늘, 푸욱푸욱 발이 빠지는 끈적끈적한 대지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

여러 특징적인 점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머리까지 띵하게 만드는 매캐한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하긴 하네.”

이리조차도 미간에 실금을 그었다. 도진이 벌레를 쫓듯이 양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도술을 펼치자 그제야 좀 살 만해졌다.

“진짜 유황불 지옥이 따로 없네요…. 인간들이 하계를 보고 와서는 저승인 줄 착각하고 그런 묘사를 했나 봐요.”

“저승 말고 지옥 중엔 이렇게 생긴 곳이 있긴 해. 여기보다 좀 더 끔찍하지만….”

“전 완전 착하게 살 거예요. 죽지도 않을 거지만.”

끼우우웅.

“끼웅이는 그냥 놓고 올 걸 그랬나.”

도진이 주머니 바깥으로 끼웅이를 토닥였다.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어린 잡귀가 고통스러움에 길게 울었다. 이리가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제야 주위의 끔찍한 냄새가 사라지고 울창한 숲속에 있는 듯 상쾌해졌다. 도진의 도술이 부채질이라면 이리의 도술은 공기 청정기를 겸한 에어컨이었다.

“조금 더 걷다가 마중 온 이가 없으면 그때 통로를 사용해야겠어. 일단 걷자.”

“네.”

‘걷자’고 했지만 사실 걷지는 않고 문밖의 잎사귀 양탄자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그 위에 올라탄 채 움직였다. 바닥이 진흙탕처럼 움푹 빠지는 데다가 크고 징그러운 벌레들이 기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끄흐흐흐. 이리 선인이다…. 끄흐흐.’

‘크륵. 이리 선인이 이곳엔 웬일이지?’

‘옆에 있는 인간은 무엇인가…. 크크크. 이리 선인의 간식인가?’

하계의 위아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주로 원혼과 요괴였고 드문드문 악신도 있었다. 생긴 모습은 이무기 형태가 많았다.

도진이 고개를 숙여 이리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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