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이 형…. 죄송해요. 저 때문에 놀라셨죠…. 도희 누나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응? 뭘 미안해하냐. 사람이 놀라면 울 수도 있지. 이런 일로 사과하지 마.”
“감사합니다….”
쉽게 사과하고 쉽게 감사해했다. 도진이 생각하기에 이 거친 세상에서 쉽게 사과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뭔가 잔소리를 할까 했지만 보호자가 잠자코 있으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끼우웅.
서윤이 울음을 그치고 오자 끼웅이도 고개를 들더니 서윤에게 건너갔다. 이리가 구겨진 옷자락을 폈는데 여기에도 조그만 눈물 자국이 콕콕 박혀 있었다.
“끼웅아, 울지 마. 어떡하지. 나 때문에… 너무 놀랐나 봐요.”
“너 때문 아니야. 애가 본래 겁이 많아서 그래. 먹을 거 주면 돌아와.”
서윤이 현무가 따다 준 상수리나무 열매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끼우웅. 끼웅. 뀽뀽. 끼우우웅. 뀽.
끼웅이가 엉금엉금 서윤의 손바닥으로 기어가서 열매를 갉작거렸다.
“울든가, 먹든가 하나만 해라.”
도진이 자그마한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눈물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서윤이 그제야 웃음 지었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처럼 눈꺼풀에 촉촉한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다가 떨어졌다.
현무는 서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는지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 얕은 숨은 서윤만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두 신수가 천지천해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현무는 도진이 싸 준 간장 동이를 옆구리에 꼈다.
“이리 선인, 그간 고마웠소. 서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오.”
“나야말로 고마웠어. 서윤이가 정말 큰 도움이 됐어. 또 아르바이트하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
“저기, 그럼 저 다음 주에도….”
“시험공부는?”
“…….”
현무의 나직한 한마디에 서윤이 입술을 오므렸다.
“시험이 끝나면 오렴.”
이리가 서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현무가 손을 들어 정자 옆에 바람 한 줄기를 일으켰다. 구름과 물결 장식이 새겨진 나무 문이 나타났다.
“도진이 형, 핸드폰 감사해요…. 다음에 또 그 카페 가요…. 도희 누나랑 같이.”
“그러자.”
도진도 이리처럼 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윤은 이리에게도 인사했는데, 현무는 도진에게 딱히 인사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 ‘수고했다’ 정도의 뜻만 전했다.
현무가 서윤에게 손을 내밀고, 서윤이 그 손을 붙잡았다. 문을 건너려는 둘에게 도진이 말했다.
“그래. 원하면 끼웅이 데리고 가도 돼. 끼웅아, 잘 살아라. 안녕.”
끼웅? 끼웅! 끼웅!
그때까지도 서윤의 품에 안겨 있던 끼웅이가 깜짝 놀라며 바동거렸다. 서윤도 인식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며 얼른 끼웅이를 도진에게 돌려줬다.
두 사람이 문 너머로 넘어가자마자 문이 희미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둘은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스승님, 이 문 여는 도술은 무슨 술법이에요? 스승님의 ‘통로’랑은 다르죠?”
“소환술이야. 나중에 알려 줄게.”
“스승님이 나중에 알려 준다는 도술만 지금 아홉 개째예요.”
“다 간단한 도술이니까 하루 날 잡아서 배워 보자.”
하루 만에 되는 걸까? 이리의 기준으로 ‘간단’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도진은 그 전에 예습을 철저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스승님이 가르쳐 주실 때 한 번에 척척 해내서 칭찬받을 테니까. 뽀뽀해 달라고 해야지. 그 애정 행각 커플처럼 진한 키스는 못 받겠지만….
대여점으로 들어온 둘은 쌓여 있는 업무를 뒤로 미루고 일단은 차부터 마시기로 했다.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끼웅이의 얼굴을 닦아 주는 이리에게 도진이 차를 내밀었다.
“둘만의 시간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죠.”
어제저녁에도 서윤과 현무가 퇴근한 후 둘이서 차를 마셨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리도 오랜만인 것 같아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도진은 항상 이리가 좋아하는 온도에 딱 맞춰서 차를 내왔다.
“이따 마트 가실래요? 우리 찻잔 이제 딱 네 개뿐이에요. 현무 님이 엄청나게 깨 먹었어요.”
“안 그래도 현무네서 찻잔 주기로 했어. 내일 배송 올 거야.”
“미안하긴 했나 보네요. 서윤이도 겁이 많은데 현무 님도 어지간히 많은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스승님이 서윤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서도 휘청거리면 현무 님보다 더한 과보호 보호자가 되겠지만. 그럼 저는 아예 스승님 안고 다닐 거예요. 스승님이 쪽팔리다고 제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내려놓으라고 해도 계속 품에 둥기둥기하고 다닐 거예요. 어디 다치기만 해 보세요.”
이리가 작게 웃었다.
“안타깝네. 나는 다칠 일이 없어서.”
“솔직히 말하면 예전엔 조금 아쉬웠거든요. 스승님이 너무 강해서 제 보호가 필요 없다는 게. 그런데 며칠간 서윤이랑 함께 있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스승님, 제 간덩이 보호해 주셔서 감사해요.”
“서윤이가 들으면 울겠구나.”
“걔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 안 하죠. 김끼웅, 너도 절대로 고자질하지 마.”
끼웅.
끼웅이는 서윤이를 다시 만나자마자 바로 이르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마트는 가요. 찻잔이 아니더라도 살 거 많아요. 티슈도 다 떨어졌고, 주방 세제도 사야 되고, 김치도 새로 담가야 하고.”
“김치가 벌써 다 떨어졌어? 1년 치를 했는데….”
이리는 겨울이 되면 이해자와 보부상을 불러 김장을 했다. 도진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벽돌담 밑에 늘어진 장독대 중 하나가 바로 김치 항아리였다.
“초반에 고객한테 너무 많이 나눠 줘서 그래요. 입도 늘었는데 그걸 깜빡하고. 마트 가실 거죠?”
“그래….”
생각해 보면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도진이 대여점에서 살다시피 하며 하루 세 끼를 먹으니 김치가 금방 동나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엔 이해자 님이랑 보부상 형 부르지 말고 우리끼리만 김장할래요? 알콩달콩하게.”
“그러자. 1년에 두 번이나 시킬 순 없으니까.”
“끼웅이도 도희한테 보내 놓을까요. 그날은 우리 둘이서만 김장 데이트를 하는 거예요.”
끼웅!
끼웅이가 이리의 손가락을 덥썩 붙잡았다. 자길 버리지 말라는 행동에 이리가 끼웅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김장 데이트라니…. 세상에 그런 데이트가 어디 있어.”
“하.”
돌연 도진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세상에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데이트 코스가 얼마나 많은데 김장 따위에 데이트라는 단어를 붙여야 한다니. 하지만 저는 김장이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둘만 있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인 거예요. 스승님은 모르시죠.”
도진이 오늘 다녀온 카페부터 시작해 온갖 데이트 코스를 읊으며 이리에게 어깨를 비벼 댔다.
“알바생 구하면 꼭 일주일에 세 번 데이트 해요. 알겠죠?”
“일주일에 세 번은 너무 많지 않아?”
“우리 지금까지 못한 게 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 된다고요!”
도진의 강한 선포에 이리가 그래, 하며 웃었다. 이제 이리는 이 정도에는 당황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도진의 세뇌 작전이 먹혀 가고 있었다.
“연락 또 안 오려나. 왜 저번에는 최지수 일 끝나자마자 전화 왔잖아요. 이번에는 서윤이 같은 거물 말고 좀 하찮으면서 일 빠릿빠릿하게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지이잉- 기다렸다는 듯 이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대여점 전화가 아니라 이리의 직통 핸드폰이 울린 건 오랜만이었다.
[찰마 공주]
이름을 확인한 두 사람이 눈을 끔뻑였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고 도진이 더듬더듬 말했다.
“설마 다음 알바생은… 하계의 찰마 공주…?”
“설마….”
설마, 라고 말은 하지만 타이밍이 타이밍인지라 통화를 누르는 이리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22. 찰마 공주
“천 년 전 ‘하루 전쟁’ 이후 하계의 족속들은 대부분 하계로 돌아갔어. 하지만 하계가 워낙에 살기 안 좋은 곳이라 몰래몰래 다른 지역에 뿌리내린 존재들이 많아. 특히 저승과 인간계가 그들을 많이 수용했지.”
“천지천해에도 있다면서요. 서윤이 괴롭힌 놈들.”
“천지천해에 있는 존재들은 저승과 인간계에 비하면 10%도 안 돼. 하늘꽃밭은 3%고.”
“극락이랑 진현계는 0%겠네요.”
“극락은 아예 없지는 않아. 진현계는 0% 맞지만.”
“저라도 살생을 서슴지 않는 사이코패스 종족을 이웃으로 두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진현계는 절대 들여보내서는 안 되죠. 그나저나 스승님, 떡 좀 드세요. 밤 속껍질로 만들었다는데 되게 맛있네요.”
“…난 괜찮아. 너 먹어.”
이리는 도진이 건네는 율피떡을 사양했다. 이미 한 개를 먹은 후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