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19화 (119/203)

119

두 사람은 함께 삼촌에게 가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오늘 처음 만난, 면접관과 면접자 사이인데… 개인사에 너무 개입하는 거 아닌가?

근데 만약 삼촌이 빚에 대해 속인 게 맞다면, 지수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위에는 아르바이트처 깐깐한 사장님들 말고는 아는 이가 없으니 둘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했다.

[외삼촌]

삼촌은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지수가 끊으려는 찰나에 전화를 받았다.

-어. 지수냐. 무슨 일이냐?

“안녕하세요. 삼촌.”

-그래.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건강은 무슨. 나이가 드니까 온몸이 쑤셔서 원.

삼촌이 기다렸다는 듯 엄살을 피웠다. 지수는 조금 들어주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뭐? 내일? …갑자기 왜?

“추석에 인사도 못 드렸잖아요. 작년도 그냥 지나갔는데 올해도 그냥 지나가기가 뭐해서 선물 좀 드리려고요.”

지수는 똑 부러지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미리 핑계를 만들었다.

-선물? 어떤 선물 말이냐?

예상대로 삼촌은 김칫국을 들이마셨다. 지수는 홍삼 농축액을 준비했다고 브랜드 이름까지 말했다. 삼촌이 좋아하며 약속을 잡았다.

내일 저녁 일곱 시. 장소는 식당이었다.

‘그 둘이 집 주소를 알아 오랬는데….’

머리를 굴렸지만 식당이 아니라 삼촌의 집에서 만나야 하는 핑계는 찾지 못했다. 결국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안녕하세요ㅎㅎ 저 오늘 면접본 최지수입니다

김도진직원님

ㅇㅇ

[나 : 내일 저녁 7시에 삼촌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지수는 식당 위치를 어플로 찍어서 보냈다.

김도진직원님

ㅇㅇ

[나 : 내일 오시는 건가요?]

김도진직원님

[나 : 그럼 내일 봬요ㅎㅎ]

김도진직원님

ㅇㅇ

꼭 집이 아니어도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답변 상태가 왜 이래.

김도진은 좀 이중인격 같았다. 사장님한테는 싹싹한 정도가 지나쳐 애교 있게 굴었으면서….

성의 없는 답문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키가 190cm도 훌쩍 넘어 보이는 잘생기고 부리부리한 성인 남자한테 뭐라 할 수는 없으므로 그냥 핸드폰 화면을 껐다.

씻고 집안일을 좀 하니 어느덧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수는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혼자가 되고 나니까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공부할 거면 엄마 앞에서 해서 좀… 칭찬도 받고, 좀 웃게 만들어 드릴걸.

늦게까지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한 시간쯤 지나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오늘 정신력을 크게 소모할 일들이 있긴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집중하려고 안간힘을 써 보는 그때였다.

어깨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포근한 이불로 감싸는 듯한….

시험공부 할 때 엄마가… 이불을 갖고 와서 등을 덮어 버리곤 했는데.

지수는 얼른 뒤돌았다.

하얀 연기 같은 게 등 뒤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내 수호령.

“엄…….”

지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신 매트리스에 널브러진 이불을 보다가 문제집을 덮고 매트리스로 뛰어들었다.

눈물이 나와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엄마일까?

만약 엄마면.

엄마라면.

이 말을 해야 한다.

날 지켜 주지 않아도 된다고.

죽어서까지 지켜 주지 않아도 된다고.

죽어서는 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란 말이야.

엄마는 분명히 천국에 갔을 테니까…. 응? 그곳에서는 양보해야 하는 딸 없이 치킨 원 없이 먹으면서 지내.

혼자 있는데도 누구에게 들릴세라 숨죽여 울고 있는 지수의 머리를 수호령이 가만히 쓰다듬었다.

* * *

“네…. 저녁에 일이 생겨서요. 아, 감사합니다. 네. 다음번엔 제가 대타할게요, 언니.”

지수는 알바 대타를 구한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삼촌이 사 주거나 대여점 사장님이 사 줄 것 같아서 많이 먹으려고 점심부터 굶었다.

김도진 직원과 이리 사장님은 이미 식당에서 음식도 시켜 놓고 있었다. 테이블에 한가득이었다.

상냥한 사장님이 상냥하게 웃었다.

“얼른 먹어. 배고프지?”

“배고픈 것까지 어떻게 아셨어요? 무당은 본래 그것도 알아요?”

“야, 너 들어오자마자 국밥에서 시선을 안 떼고 있었어.”

“도진아. 너도 좀 먹고.”

“네, 헤헤. 스승님도 드세요. 오랜만의 인간 음식이잖아요.”

스승님…? 오랜만의… 인간 음식?

“오랜만은 아니지…. 도희 생일날 많이 먹었잖아.”

“아, 맞다. 도희가 뭐가 제일 맛있었는지 물어봐 달랬는데.”

“다 맛있었는데 잡채가 참 맛있더라.”

“잡채. 잡채란 말이죠. 끼웅이도 잡채를 제일 좋아하던데. 약간 한국인의 입맛인가.”

끼웅이는 또 뭐야.

지수는 귀를 쫑긋쫑긋하며 국밥을 먹었다. 그런데 국밥 뚝배기 근처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미간을 좁히고 노려보자 검은 그림자가 팔 같은 걸 들어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아이가 끼웅이야.”

이리 사장님의 말에 지수가 눈을 깜빡였다.

“사, 살아 있는… 거예요?”

“응. 살아 있고, 너한테 인사하고 있어.”

“아…. 끼웅이야. 안녕.”

지수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남들이 보면 무슨 미친 짓인가 하겠는데….

‘어라?’

생각해 보니까 이상했다. 이 국밥집엔 손님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이 테이블을 주시하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김도진과 이리 사장님은 너무나… 너무나 외모가…! 도저히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는 외모인데…!

“네 삼촌이 왔구나.”

이리가 가게 문 쪽을 바라봤다. 지수도 뒤를 돌아보니 삼촌이 손부채질을 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삼촌, 여기요!”

“어, 그래. 지수야.”

똑 부러지는 청소년인 지수는 삼촌에게 이 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미리 구상했다. 한 명은 남자 친구고 한 명은 남자 친구의 형으로….

그런데 삼촌은 도진의 옆자리에 당연하다는 듯 앉고는 둘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이 녀석이, 삼촌 기다리지도 않고 밥을 먹고 있었어? 그런데 둘이서 먹는데 뭔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켜 놨냐?”

“…제 일행이 있잖아요, 삼촌.”

“일행? 어디?”

“안녕. 하세요.”

도진이 삼촌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삼촌은 그제야 도진을 발견한 것처럼 으어? 으어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지수 아는 사람인데 지수가 삼촌 만난다길래 따라왔습니다.”

“뭐? 뭐라고…? 아니, 잠깐. 대체 언제부터 앉아 있었….”

“삼촌, 무섭게 왜 그러세요? 처음부터 앉아 있었는데요.”

“뭐…?”

지수의 삼촌은 그 옛날, 밤새워 씨름하던 상대가 나무였다는 걸 알고 허망해했던 무수한 이들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도진이 그를 건들기 전까지 전혀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으나 조카 앞에서 너무 놀라기에는 면이 안 섰다.

“그, 그래. 그렇구나. 이 녀석 말도 없이 친구를 데려와….”

“친구가 아니라 아는 사람들인데요.”

“사람들? 이쪽 하나잖아.”

삼촌은 아직 이리는 발견하지 못했다. 지수가 의아하게 보자 이리는 미소 지으며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댔다.

‘와, 나 진짜 무당 할까.’

어제오늘 이어진 신기한 일들에 무당을 향한 꿈은 무럭무럭 커져 갔다.

도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우선 지수가 평화롭게 식사를 하게 했다. 지수는 고무줄 바지를 입고 온 보람이 있을 만큼 충분히 먹었다.

“더 먹지 왜? 파전 더 시킬까?”

“아뇨. 너무 배불러서 죽을 것 같아요.”

도진은 지수가 정말 배부르다는 걸 확인한 후에 본론에 들어갔다.

“지수 삼촌. 우리가 할 얘기가 있는데 말이야.”

지수와는 반대로 시종일관 움츠러들어 있던 삼촌이 움찔했다.

“이왕이면 그쪽 집에 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는데. 식당에서 쪽팔린 일 당하기 싫으면.”

“내, 내가 왜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여야 해?”

“그래. 맞는 말이지.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말해야겠군.”

도진이 팔짱을 꼈다. 반팔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더욱 도드라졌다.

“우리 지수 말로는 지수 어머니가 그쪽한테 돈을 빌렸다면서.”

“어, 어. 그래. 차용증도 썼다. 혹시 이것 때문에 오늘 만나자고 한 거냐? 지수야. 너는 뭔 말을 어떻게 전했길래….”

삼촌이 지수에게 화살을 겨누려 하자 도진이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미성년자 어린애 쳐다보지 말고 날 봐, 아저씨.”

“뭐, 뭐야? 어린놈이 말버릇이… 크흠.”

도진의 부리부리한 시선 앞에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혹시 내가 속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정말로 누나한테 삼천만 원을 빌려줬어. 누나 가게 차리라고. 지수가 필체도 확인했다.”

“삼촌, 차용증을 속였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수 어머니랑 조금 아는 사이인데, 삼천만 원 분명 다 갚았다고 들었거든?”

히끅, 삼촌이 딸꾹질까지 하며 크게 놀랐다.

놀라기는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삼천만 원을 다 갚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삼촌?”

지수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삼촌을 바라봤다. 삼촌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졌다.

“아, 아니야. 안 갚았어. 안 갚은 채 죽었다고. 내, 내가 설마 다 갚은 빚을 어린 조카한테 갚으라고 했겠어? 둘 다 오해하고 있어!”

“개소리하지 마.”

도진이 입술을 비틀었다.

“앞으로 너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진실만을 말해라.”

도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삼촌은 도진의 붉은 두 눈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기도식을 치른 후 선인 입문자에 들어선 도진은, 이리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인간 한 명쯤은 진실을 말하게 할 능력이 있었다.

“지수의 어머니는 네 돈을 다 갚았나?”

“누, 누나는 돈을 다 갚았어…!”

제 입으로 말해 놓고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도진이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자 벌벌 떨면서 입을 열었다.

120화.

5년 한도에 15%의 이율이었다. 다른 기관에서 대출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지수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차용증을 쓰고 욕심 많은 동생에게서 돈을 빌렸다.

다달이 잘 갚고 있음에도 하도 빚 독촉이 심해서, 지수의 어머니는 가게 영업시간을 늘리고, 휴일을 없애고, 식비에 제한을 두면서까지 열심히 일해 2년 만에 그 돈을 다 갚았다. 이자까지 함께 깔끔하게.

장례식에서 삼촌은 지수에게 넌지시 언급했다.

‘네 어머니가 내게 돈을 빌렸는데 말이다….’

‘네? 도, 돈을 빌렸다고요?’

16살. 어린 조카가 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안 삼촌은 다시 삼천만 원의 빚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잠을 쫓고, 허기를 견디면서 아등바등 갚은 삼천만 원을. 어린 자녀에게 똑같이 갚게 하기 위해.

“개자식.”

지수가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도진의 눈에서 벗어난 삼촌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지수를 바라봤다.

“나, 나는 그게 아니라. 네가 돈을 잘 모을 수 있을지를, 훈련을, 사, 삼천만 원을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어. 학교 졸업하면… 이자와 함께 돌려주려고 했다.”

“졸업? 개소리하지 마세요. 나는 그 돈을 갚기 위해 학교까지 그만뒀어요.”

“네가 학교까지 그만둘 줄은 몰랐다. 정말이야.”

“우리 엄마는 과로로 돌아가셨는데.”

“그, 그건 상관없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네 어머니는 죽기 1년 전에 이미 돈을 다 갚았다고. 나 때문에 과로사 한 게 아니야…!”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개소리만 지껄이는 삼촌을 증오스럽게 쳐다보던 소녀가 식탁 위의 가위를 집어 들었다.

“이 쓰레기 새끼-!”

벌떡 일어나 가위를 휘두르려는 그때였다. 젖힌 손목이 무언가에 붙잡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홱,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손목에 무언가 흰 것이 아른거렸다. 흰 형체가…. 마치 이 행위를 말리는 것처럼.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어떤 희미한 손이….

“지수야. 네 수호령이 그런 짓은 하지 말래.”

이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는 이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위를 휘두르려는 생각이 없어졌다. 가위가 툭 떨어지자 손목을 붙잡았던 하얀 연기도 사라졌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삼촌은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각자 떠들고 있었다.

“성병철.”

도진이 그의 이름 석 자를 내뱉자 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수에게 받은 돈을 돌려주고. 앞으로 평생 연락 따위 하지 말아라.”

“아, 알았… 어. 그, 그렇게 할게.”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지 말거라. 견물생심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어린 조카가 홀로 남았을 때 보호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등 처먹을 생각이 먼저 든다면, 너는 인간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 네 일은 사후에 다시 심판받을 것이다.”

“…….”

병철은 평생을 탐욕스럽게 살았고, 이에 따라 험담도 자주 들었다. 귀신이 안 잡아가고 뭐 하는지, 죽어서 업보를 치를 것이라든지. 모두 비웃고 흘려 넘겼는데… 이 위압적인 사내의 말은 어째서일까.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영혼에 와서 박히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한 대 후려칠 것처럼 주먹을 꼭 쥐고 있던 도진이 돌연 엄숙했던 목소리를 바꿨다.

“스승님, 제가 이 새끼 줘 패면 저한테 실망하실 거예요?”

스승님이라니? 병철은 도진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곳에 곱상한 얼굴의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대, 대체 언제부터?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는 조카와 기이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으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곱상한 청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은 안 하지….”

“그렇죠? 덕이 사라지는 게 싫으셔서 말리는 것뿐이죠?”

“여기선 안 돼.”

“네. 스승님 눈앞에서 폭력을 저지를 생각은 없어요.”

스승이라는 청년에게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인 사내가 아까 지수가 떨어뜨린 가위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병철의 눈앞에서 가위를 힘껏 움켜쥐었다. 가위가 마치 순두부처럼 으스러졌다. 믿기 힘든 괴력이었다.

“조만간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 그때는 가위가 아니라 네가 으스러질 거야. 그 번들거리는 눈알일 수도 있고, 거짓말을 지껄인 이빨일 수도 있고, 탐욕을 부린 대가리일 수도 있고. 그건 그때 결정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말을 끝낸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으로도 너무 놀란 병철이 히익, 하며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된 심정이었다.

도진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병철을 힐끔 하고는 지수에게 턱짓했다.

“가자.”

“…네.”

지수와 청년 두 명이 식당을 나갈 때까지 병철은 의자 밑에서 덜덜 떨며 숨어 있었다.

“아니, 손님? 이보세요. 왜 의자 밑에 들어가서….”

식당 종업원이 이제야 발견한 듯 놀라며 다가왔다. 이 아저씨 뭐야? 이상한 사람인가 봐. 수군거림 속에서 병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기만 했다.

그날부터 며칠간 그는 이불 속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 가위는 무슨 마술 도구 같은 거였겠지. 덩치는 커다랗지만 결국엔 20대 초반에 불과한 어린놈이 진짜로 뭘 어쩌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밖으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남자가 찾아오지 않자 병철은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밤길을 혼자 걸을 때는 늘 두려움에 떨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영혼에 새겨진 공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그 서늘한 붉은 눈과 섬뜩한 협박이 떠올랐다. 주변에서 미친 거 아니냐 수군거리는 걸 들으면서도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조만간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라.’

‘네 일은 사후에 다시 심판받을 것이다.’

어린 조카에게 거짓말을 하고 돈을 편취한 죄로 그는 죽을 때까지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 * *

삼촌이 내게 거짓말했다. 우리 엄마는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돈을 갚았다. 나는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학교를 그만둘 필요도 없었다.

억울함과 배신감, 분노, 슬픔에 휩싸인 지수는 엉엉 울었다. 도진과 이리는 묵묵히 옆에서 기다렸다.

지수는 한참 후에 울음을 그쳤다. 식당을 나와서부터 계속 울기만 하느라 몰랐는데, 눈물이 멎고서야 여기가 차 안이라는 걸 알았다.

“다 울었냐? 눈물 참 많네.”

훌쩍거리던 소리가 멎자 운전석의 도진이 하품했다. 이리가 다정하게 웃으며 차 문을 달칵, 열었다.

“이제 내리자.”

“아… 네.”

지수는 얼결에 따라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냥 골목이었다.

“여, 여기 어디예요?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네 면접 보러 왔어.”

면접…? 내 면접? 이 시간에? 지금 저녁인데.

아니, 잠깐만. 나 지금 옷차림새도 그렇고 방금 울어서 얼굴도 엉망인데.

“잠깐만요. 시간을 좀 주세요, 사장님. 저 세수라도 할게요.”

“그러렴.”

세수를 하기 위해서는 세면대가 필요하고, 세면대는 화장실에, 화장실은 건물 안에 있다. 지수는 큰 건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좀 낡긴 했지만 10층은 넘어 보이는 빌딩을 발견했다.

“저 씻고 올게요!”

지수가 그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가 알아서 면접 장소로 가네요?”

“그러게.”

도진과 이리가 지수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 간다던 지수는 대리석이 반짝거리는 초호화 로비에서 부들부들 떨며 경악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허름했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너무 번쩍번쩍해서 얼어 버렸다.

“여긴 대체…?”

지수가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포도청이야. 네 면접을 진행할 곳.”

포도청은 영능력이 있거나 미리 허가받은 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 지수가 자연스럽게 입장했으니 취직의 제 1조건은 성공이었다.

지수는 일단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정신 좀 차리기 위해 찬물을 끼얹을 생각이었지만, 공기가 서늘하고 한기가 돌아서 따뜻한 물로 씻었다.

“이보게. 뭔가 따뜻한 기운이 퍼지고 있지 않나?”

“그러게. 한여름에 따뜻한 물 트는 사람이 대체 누구야?”

“떼잉. 누가 귀신들 드나드는 곳에 따뜻한 물을 틀어. 이렇게 배려심이 없어서야.”

화장실 칸 안쪽에서 짜증 섞인 대화가 들렸다.

…아니, 잠깐. 뭐가 드나든다고요? 귀신들이요?

지수는 그들이 나오기 전에 얼른 얼굴을 닦고 나왔다.

도진과 이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이는 도진과 비슷한 체격의 미남자였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많아 봐야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지수의 눈길이 멀찍이 서 있는 은발의 여자애에게 향했다. 차가운 얼굴에 무시무시하게 예쁜 그 애는 또래로 보였는데… 머리 위에 여우 귀가 쫑긋 솟아 있었다.

“선인님의 부탁이라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 내야지요. 마침 포도청에서 새 지부를 설립할 예정이니 그쪽으로 써 보겠습니다.”

스승님에 이어 선인님이라는 호칭까지 나왔다. 선인이라면 그… 신선 같은 거겠지? 무당은 신선이라고도 불리는구나.

지수는 끼어도 되나 싶어서 주춤거렸다. 그때 도진이 고개를 돌리고는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지수는 왠지 기쁜 마음에 얼른 그의 옆에 섰다. 수염을 기른 미남이 웃으며 물었다.

“이 아이입니까? 어려 보이는군요.”

“응. 이름은 최지수고 나이는 열여덟 살이야.”

“안녕하세요, 지수 양. 나는 전우치라고 합니다.”

“전우….”

“네, 그 전우치 맞습니다.”

전우치가 손을 내밀었다. 살면서 악수라는 걸 몇 번 해 본 적 없는 청소년 지수가 어색하게 악수했다.

121화.

전우치는 지수가 맡을 업무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계약 기간은 2년, 만약 2년 후에도 영안이 닫히지 않으면 상호 합의하에 연장할 수 있다. 엑셀을 이용한 문서 작업이 주 업무이며, 노트북은 이쪽에서 제공한다. 급여 월 200만 원, 근무 시간 주5일 오후 6시에서 9시, 휴가는 1년에 25개인데 반드시 전날까지는 말해 줘야 함. 기본적으로 재택근무지만 한 달에 하루는 회사로 출근.

획기적으로 좋은 조건이라 얼떨떨했다.

“평일 저녁 시간만 일하는데 월 200만 원을 준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포도청이 일하기에 참 좋은 곳이지요.”

전우치가 빙긋 미소 지었다. 도진은 어째서인지 쳇, 혀를 찼다.

‘저녁 시간만 일해도 되는 거라면 학교 다시 다녀도 되겠는데.’

지수는 학교 생각이 가장 먼저 났다. 하지만 이미 자퇴서를 냈다. 딱 일주일 전에 내버렸다. 조금 더 고민해 보라는 선생님에게 종이를 강제로 건네고 나왔다.

너무 아쉬웠다. 일주일만 더 참아 볼걸. 그때는 내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길 줄 몰랐지….

“지수야.”

이리의 부드러운 부름에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내일 선생님한테 다시 연락드려. 자퇴서를 서랍에 넣어 놓고 널 기다리고 계신단다….”

“아… 저, 아직 자퇴 처리되지 않은 거예요?”

“응.”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은 필요가 없었다. 이리 사장님은 이미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신묘한 일을 일으켰으니까.

지수는 너무 기뻐서 울 것 같았다. 아까 그렇게 실컷 울었는데도 눈가가 자꾸 시큰거렸다.

“그럼 다시 설명을 이어 가도 될까요?”

“아, 네!”

“새 지부를 한국 동쪽에 만들 생각인데 아직 정확히 선정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 내로 정하고 알려 드리지요.”

“네.”

“그리고 모든 이 모든 내용은 외부인에겐 기밀입니다. 이에 대해서 서약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네. 작성할게요.”

발설 금지 서약서를 안 쓰는 게 더 이상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귀신이 드나드는 곳이고 이 사람은 전우치니까….

“혹시 질문이 있습니까?”

“아뇨. 딱히…. 지금 생각나는 질문은 없어요.”

“생각나면 언제든 질문하세요. 앞으로 2년간 잘 부탁드립니다.”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우치가 손을 들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은발의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물론 그녀는 여우 요괴였다. 지수가 여우 요괴의 여우 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수 양과 가서 계약서와 서약서를 쓰고 오십시오.”

“네.”

여우 요괴가 고개를 까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지수는 허락을 구하는 듯 이리와 도진을 쳐다봤다. 도진이 손을 흔들었다.

“쓰고 와. 너 집에 데려다줘야 하니까 어차피 우리 어디 못 간다.”

“네!”

지수가 얼른 여우 요괴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지자 전우치가 이리에게 근사한 미소를 선보였다.

“모처럼 오셨는데 올라가서 함께 차라도 드시지요.”

“그럴까….”

“아뇨. 그냥 여기서 기다릴 건데요.”

도진이 이리의 손목을 잡고 로비의 소파 쪽으로 향했다. 전우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갔다.

마주 앉은 세 명을 포도청의 직원들이 흘끔거리다가 전우치의 눈빛에 흠칫 놀라며 사사삭 사라졌다. 전우치가 보이는 것만큼 나긋나긋하기만 한 보스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끼웅.

제 직원들은 눈빛 한 번으로 쫓아내면서 대여점의 어린 잡귀에게는 손가락을 내주고 있었다.

“새 지부는 출입국장 근처에 세울 거야?”

“예. 최근 그곳에서 갈등이 자주 일어나서 말입니다. 아니면 대여점 옆에 지을까요? 선인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글쎄. 대여점 근처는….”

“우리 대여점 근처에 안 그래도 위아 많은데 포도청까지 오면 인간들은 못 살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선인님께 물었는데 말입니다.”

“스승님과 저는 한 몸이라서요. 얼마 전에 우리 사이가 하나로 인정받았거든요. 포도대장님도 오셨잖아요.”

전우치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굉장한 기도식이었지요…. 선인님이 그토록 신궁이셨을 줄은.”

“나는 왕이 신궁을 얘기하길래 혹시 너랑 대결시키려나 했어. 그래서 걱정했는데….”

도진의 얼굴이 표독스러워졌다.

“포도대장님, 당장 활쏘기 대결 가죠.”

“도진아.”

“저도 활에는 재능이 있으나 선인님의 제자와 대결할 정도는 안 됩니다.”

질투심에 눈이 먼 도진과는 달리 전우치는 겸양의 미덕을 선보였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도진은 뭔가 자신이 철없는 애가 된 것 같아서 입술을 오므렸다.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있을 생각이었다.

“선인님께서는 이토록 훌륭한 활 실력을 지닌 제자를 받으려고 저를 거절하셨군요.”

도진의 오므린 입술을 3초 만에 풀어 버리는 문장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스승님이 그쪽을 거절하다니요?”

“몰랐습니까? 나는 이리 선인님께 스승이 되어 달라고 수십 년을 쫓아다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흠모하고 있었으니까요.”

“……!”

이리가 이마를 덮었다. 도진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이리를 바라봤다. 이리가 난처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도진의 표정은 짧은 사이 다양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전우치를 거절한 스승님이 자신은 받아 줬다는 생각에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하더니… 나중에는 이 자식 아직도 스승님한테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라는 경계 어린 얼굴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겁에 질린 듯 낯빛이 새파래졌다.

“스승님은 내 스승님이에요.”

도진이 불안한 얼굴로 이리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도진아….”

“전 완벽하지 않지만… 부족한 면이 많지만 스승님은 절 선택했다고요. 그렇죠, 스승님?”

“그래.”

커다란 덩치를 작은 품에 구깃구깃 끼워 넣는 도진을 이리가 토닥였다.

“이건 의외의 반응이군요. 자기랑 비교가 되겠냐고 뻗대거나 앞으론 접근하지 말라고 성질을 부릴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전우치의 예상이 정확했다.

도진은 그 두 가지 중 후자의 반응을 보이려고 했다. 어쩐지 이리를 대하는 태도와 표정, 말투에서 존경심 그 이상이 언뜻언뜻 비치길래 뭔가 했는데…. 수백 년 전의 감정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리를 흠모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쁘다.

어떻게 내 스승님을 흠모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도 흠모한다고 제 입으로 말하니 이건 이것대로 최악이었다.

내 스승님에게 감정 갖지 말라고 테이블을 엎으려다가, 이리가 뭔가 찔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3의 반응을 보였다.

만약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였다면 이런 토닥임은 얻지 못했을 터였다. 오히려 한숨만 들었겠지.

‘역시 난 천재야. 전우치랑은 차원이 달라. 나만이 스승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히우웅… 끼웅이 뺨치는 우는 소리를 내며 작은 품 안에서 미소 지었다.

물론 이리는 제자의 생각을 모두 읽고 있었다.

* * *

“저기… 정말 감사합니다. 빚도 해결해 주시고… 일도 구해 주셔서요.”

지수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처음 인터넷에서 글을 읽고 전화할 때만 해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3천만 원의 빚은 사라지고, 돈도 돌려받고, 2년간의 일도 구하고, 학교도 다시 다니게 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쁜 언니랑 번호도 교환하다니….”

“뭐? 예쁜 언니라니 설마 여우 요괴 말이냐?”

“역시 여우였구나. 혹시 구미호예요? 진짜 이쁜 언니였는데, 구미호가 엄청 예쁘다면서요.”

“…….”

지수는 도진의 표정이 미묘해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전우치 사장님도 만나 보고. 너무 신기해요. 영안이 안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포도청에서 일하고 싶어요.”

“스무 살 되면 대학 가야지. 공부나 열심히 해라.”

“대학 다니면서 일도 병행할 수 있어요. 재택이니까.”

지수는 대학은 가야만 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너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게 내 소원이다’라고 말씀했으니까. 그래서 고등학교를 그만둔 후에도 공부만은 놓지 못했다.

“저기… 있잖아요.”

“어.”

“제 수호령 말이에요.”

지수가 제 옆을 흘깃했다.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이 수호령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사라져요?”

“…….”

“영원히 곁에 있을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어요. 언제까지… 제 옆에 있는지. 그것만 알려 주세요.”

지수는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다. 도진이 이리를 보길래, 지수도 이리를 바라봤다. 이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네 수호령은 보름 후에는 네 곁을 떠날 거야.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란다.”

“새로운 삶이라면… 환생이요? 저는 어머니가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랐는데.”

“지수야.”

단지 이름만 불렸을 뿐인데 지수는 마음속에 온기가 퍼지는 기분이었다. 슬픔과 우울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따스한 희망이 메웠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혼령들은 극락에서 평생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해도, 대부분 마다하고 윤회를 선택하더라고.”

“왜요?”

“그래야 내가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만날 수 있으니까.”

지수는 눈을 감았다. 그 수많은 혼령들의 심정을 너무나 이해했다.

나도… 만약 내가 먼저 죽었다면 천국에서 혼자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이 땅에 다시 태어나길 원했을 것이다. 이곳이 즐겁고 좋아서가 아니다. 이 땅은 추잡하고 끔찍한 곳이지만, 여기에 어머니가 있으니까. 날 먼저 보낸 어머니가 혼자 외롭게 남아 살아가실 테니까.

엄마도 같은 마음이겠지.

“지수야. 그러니까 보름 후에는 어머니를 잘 보내드리렴.”

“네…. 사장님.”

결연한 대답에 이리가 미소지었다.

122화.

“야.”

지수의 머리를 커다란 손이 쓱쓱 쓰다듬었다. 도진이 무게를 실어서 머리를 헝클이고는 말했다.

“내 번호 알지? 혹시 삼촌 새끼가 돈 안 주거나. 이상한 전화 걸면 나한테 바로 일러라. 경찰 말고 꼭 나한테 얘기해.”

“네, 도진 오빠.”

“그 일 말고도 뭐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하고.”

“네!”

지수는 도진과 이리에게 꾸벅 인사했다.

“정말 감사했어요.”

“됐어. 이제 고맙다는 말 그만해. 지금 대체 몇 번을 들은 건지. 얼른 들어가라. 내 스승님,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뒤도실 것 같으니까.”

“네.”

처음엔 더 나이 많아 보이는 도진이 이리에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게 신기하고 어색했는데, 딱 이틀 봤다고 그새 익숙해졌는지…. 그 호칭이 매우 어울리게 느껴졌다.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별하는 마음이 가벼웠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도진의 어깨에서 까만 그림자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아, 끼웅이도 안녕.”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화답했는지… 도진이 웃으며 어깨의 그림자를 톡톡 쳤다.

두 사람과 헤어진 지수가 타닥탁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반지하 방도 이제 곧 안녕이다. 포도청에서 인간 직원용 사택을 지원해 준다고 했으니까.

이제부터 더 바빠졌다. 학교 공부와 함께 엑셀 공부도 틈틈이 해야 한다. 낙하산으로 꽂아준 이리와 도진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업무를 완벽하게 해낼 것이다.

빠르게 도어락을 누르고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고 좁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희뿌연 게 화장실 앞에서 일렁거렸다.

‘지수야. 집에 오면 뭐부터 하라고 했지?’

“…손부터 씻으라고.”

흰 연기가 좀 더 진해지더니 마치 들어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웃고 있는 걸까?

“엄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니었다. 결코 괴롭고 힘들어서 우는 게 아니었다. 이 북받치는 감정은 그런 슬픈 표현과는 정반대의 표현이 붙어야 했다.

반가워서. 행복해서. 엄마가 너무 좋아서.

딸 혼자 두고 떠나서 얼마나 걱정됐겠어.

못된 놈한테 속아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속상했겠어.

그래서 이리 사장님과 직원을 만나자마자 냅다 일러바친 거겠지.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슬픈 일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행복하게 지내야만 한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를 보내 줄 것이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앞으로 1일 1치킨 할 거야.”

“…….”

엄마 죽기 전 닭 다리를 하나만 먹인 게 얼마나 한이 됐는지 모른다.

앞으로 보름.

질릴 때까지 치킨을 먹어 주겠어.

지수는 이 보름의 이별이 마냥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대여점으로 돌아온 이리와 도진은 지수에 대한 얘기를 나눌 새도 없이 뒷정리에 들어갔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 도진이 얘기를 꺼냈다.

“스승님. 최지수, 여우 요괴랑 연락하게 놔둬도 될까요? 지금은 교화 중이지만 범죄 전적이 있는 위아잖아요.”

이리가 스케줄표에 체크 몇 개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전우치한테 언질을 해 놔야겠어.”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자 도진이 빼앗았다.

“앞으로 포도대장한테는 제가 연락할게요. 포도청에 연락할 일 있으면 무조건 저 통해서 하세요.”

“도진아.”

“네. 제자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통보하더니 아예 이리의 핸드폰에서 전우치를 검색해 번호를 삭제했다. 그러고 빠르게 자기 핸드폰으로 전우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우 요괴가 최지수 번호 땄습니다

앞으로 주의 요망

포도대장

알겠습니다 ^^

“답장이 빠르네요. 핸드폰만 붙잡고 있나 봐요. 시간이 남아도는 게 분명해요. 우리는 이렇게 바쁜데 말이에요.”

“도진아. 질투는 어쩔 수 없지만 험담은 하지 말자.”

“제가 무슨 험담을 했다구….”

“내 눈 봐 봐.”

이리가 자꾸 험한 말을 하는 도진이 염려되어 쌓인 덕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이 쌓여 있었다.

정말 도진의 덕은 도진의 시도 때도 없는 험담에 적응되어서 잘 흩어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 그런데 너무 아쉬워요. 결국 알바생을 구하지 못했잖아요. 이 녀석이 조금만 더 영안이 뚜렷했다면 바로 채용했을 텐데.”

“그래도 미성년자가 일하기에는 좀 위험해서….”

“그런가요. 최지수 말로는 우리 구인글이 인터넷에 퍼졌다고 하던데, 다음 기회가 또 있겠죠?”

“분명 있을 거야.”

“하지만 다음 제자는 없을 거예요. 이리 선인의 제자는 영원히 저뿐입니다.”

“…….”

한동안 자기가 전무후무한… 유일한 제자라는 걸 계속 어필하겠구나.

어쩔 수 없었다. 도진은 질투도, 집착도 많은 아이니까.

내 제자가 이러는 건 어쩔 수 없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전우치를 타박해야 할 문제였다.

스케줄표에 마저 체크를 하고 이제 자러 가자 말하려는데 대여점 전화가 울렸다.

“제가 받을게요. 네, 대여점입니다!”

밤중이라 전화 받는 음성에 조금 노기가 어려 있었다.

“…네? 누구시라고요? …아, 네.”

도진이 화들짝 놀라더니 전화기의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이리 선인은 곁에 있는가.

낮고 묵직한 음성에 이리 또한 조금 놀랐다.

“아…. 듣고 있어. 무슨 일이야?”

-…대여점에서 직원을 모집 중이라고 들었소.

“맞아. 알바생을 구인 중이야. 왜?”

-…아르바이트를 해 보고 싶다고 해서.

“…….”

‘누가?’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건 이는 천지천해의 5대 현무, 현흔.

그가 아르바이트를 대리 지원시키는 이는 요즘 품에 끼고 사는 어린 하늘다람쥐, 현서윤일 것이다.

거물 알바생의 등장이었다.

21. 하늘다람쥐 서윤

“갑작스러운 부탁으로 곤란했을 텐데 수락해 줘서 고맙소.”

“아니야. 우리도 아르바이트생을 찾고 있었거든. 안으로 들어가자.”

이리가 대여점 안으로 안내했다. 현무는 제 옷자락을 꼭 쥐고 달라붙어 있는 자그마한 소년을 토닥이며 이리의 뒤를 따랐다.

끼우웅?

도진은 가장 끝에 있었는데, 끼웅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 쟤가 알바생이야.”

끼웅. 끼우웅.

“안 돼. 알바긴 한데 존나 거물이니까 텃세 부리면 너 쫓아낸다.”

끼우우…….

끼웅이에게 엄포를 놓은 도진은 스스로에게도 ‘텃세 부리면 X된다’를 되뇌었다.

진현계 4대 왕 후보이자 현무 가문이 애지중지하는 하늘다람쥐 신수, 현서윤. 겉모습은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아이는 실제로도 열대여섯 하는 어린 신수였다.

어린 나이에 신수가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천지천해에서는 서윤을 자기네 가문으로 끌어들이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윤은 주저 없이 현무의 품을 선택했다.

아이가 자란 곳이 하필 하계의 족속들이 가득한 곳이라, 아무도 아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하계의 족속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왔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발견하고 구해 준 이가 바로 현무 현흔.

서윤에게 현무는 은인인 것이다.

도진에게 이리가 은인인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 도진은 현무가 그 많은 알바처들 중에서 대여점에 도움을 청한 게 뿌듯했다.

애지중지하는 제자를 맡길 사람으로 이리 선인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는 거니까.

현무와 이리가 응접실 소파에 앉자 도진은 얼른 차와 주전부리를 내왔다. 도진이 따라 주려고 했지만, 현무가 거절하고는 서윤에게 직접 차를 따라 줬다. 살짝 냉기를 퍼뜨려 마시기 좋게끔 식혀 주는 모습에서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꼬마 애도 아니고 이 정도면 사춘기 청소년인데 과보호를 저렇게….’

기분 나쁘지 않을까, 하고 보니까 서윤은 조금 상기된 채 현무가 다 식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보호에 기분 나쁘기는커녕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이해가 안 되네. 나라면 가만 안 있을 텐데.’

도진이 10대 중반일 적 이리가 뜨거운 차를 식혀서 줬다면 ‘나는 뜨거운 차도 벌컥벌컥 들이켤 수 있어요. 애 취급하지 마세요!’라면서 찻주전자째로 단번에 들이켰을 터였다.

“천지천해에는 별일 없어?”

“백호 전 가주의 장례식 이후로는 평화롭소. 늘 그렇듯이.”

“다행히 죽음이 유행하지는 않았네.”

“아직은 그렇소. 인간계는 어떠하오?”

“인간계는 늘 다사다난하지.”

“평화로운 뜻으로 알아듣겠소.”

현무와 이리는 도진이 내온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서윤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미어캣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워낙 눈망울이 맑고 동그란 데다가 체구가 자그마해서 진짜 소동물처럼 보였다.

‘뿌리가 하늘다람쥐라고 했지. 다람쥐가 겁이 많았나. 그런데 하늘다람쥐면 날 수도 있나?’

도진은 동물보다 위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하늘다람쥐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

서윤과 도진의 눈이 딱 마주쳤다. 서윤이 화들짝 놀라며 무릎으로 테이블을 쳤다. 찻잔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으앗!”

도진이 얼른 팔을 뻗어서 간신히 찻잔을 구했다. 서윤이 울상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서윤, 다친 곳은?”

세상에서 가장 냉정해 보이는 은청발의 사내가 서윤의 두 손과 얼굴을 살폈다. 찻물 한 방울이 손등에 튄 걸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티슈로 조심스레 닦았다.

123화.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도진 님께서 뜨거운 찻물에 손이 데셔서….”

“도진이는 이 정도 온도에는 화상 입지 않는단다. 걱정하지 마렴.”

반면 이리는 도진의 손을 걱정하지 않았다.

도진은 역시 이리가 저를 과보호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믿음직스러워하는 편이 좋았다. 입가가 헤벌쭉 올라갔다.

“저는 뭐 끓는 물을 퍼부어도 아무렇지 않거든요. 이 정도면 미지근하다 싶을 정도. 아, 김끼웅. 바닥에 떨어진 걸 왜 핥아?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다. 고객들 앞에서 부끄럽게, 쯧.”

끼우웅…….

도진이 바닥에 흘린 차를 증발시켰다. 끼웅이가 슬퍼하면서 테이블로 돌아왔다.

수습이 끝나고 이리가 서윤에게 어린 고객들 대할 때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서윤아. 대여점에서는 주로 고객 응대를 하게 될 거야. 방금 도진이처럼 차와 주전부리를 내오거나, 전화 받고 상담 예약을 잡거나, 상담이 끝나면 배웅하는 일.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열심히 할게요.”

“믿음직스럽구나. 그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부탁할게.”

“…3일만요?”

서윤이 실망한 듯 어깨가 내려갔다.

“일단 3일만 하고 우리가 바쁠 때 도움을 요청할게. 어쩌면 네가 우리 일이 질려서 더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있어.”

“아, 아니에요. 저는 열심히… 열심히 일할 거예요!”

“그래. 든든하네.”

이리가 서윤에게 다정하게 미소 지어 주고는 현무에게 말했다.

“현무. 서윤이는 우리가 잘 보살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가 일하는 동안 나도 여기 머무르겠소.”

“…….”

“…….”

이리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현무가 눈을 부릅떴다. 푸른 눈에서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단호함이 드러났다.

“방금도 찻잔을 엎지른 것처럼 아이가 운이 좋지 않아 자주 다치곤 하오. 일하는 동안 옆에 있겠소.”

“으음….”

“방해가 안 되게끔 조용히 아이 옆에만 있겠소.”

“그래…. 그렇게 해.”

옆에서 아이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과보호하는 보호자가 부끄러운 청소년기… 로 보이지만, 현무에게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같이 안 계셔도 돼요’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아이도 현무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알바생이 아니라 그냥 고객이라고 생각해야겠구나.’

도진은 사흘간 자주 덜렁거리는 녀석의 뒤치다꺼리할 생각을 하니 암담해졌다.

* * *

“대여점에서 또 직원을 들였는가? 이번 직원은 자네와는 다르게 매우 귀엽구만.”

“정직원은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아르바이트생이란 게 뭐더라? 직원이랑 다른 말인가?”

“그게 그거이긴 합니다만 저는 정규직으로 계속해서 일하고, 저 녀석은 단기로 일한다는 차이가 있죠. 스승님이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들어가기나 하세요.”

도진은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에 몇 번째인지 모를 답변을 하며 대여점 안쪽으로 안내했다.

서윤이 이곳에서 일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되었다. 그동안 고객들에게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하는 건 좀 짜증 났지만… 서윤이라는 알바생의 존재는 도진의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대여점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왜 빌려주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한테는 ‘우운 사전’이 꼭 필요하네!”

상담실에 고객을 들여보내고 정원으로 나온 도진이 멈칫했다. 말 대가리를 한 진상 고객 하나가 자그마한 알바생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 진상 고객 같은 경우….

“이미 대여 중이라서요….”

“먼젓번 대여한 자한테 반납하라고 하면 되지 않은가!”

“기, 기간이 많이 남았는데….”

“아, 그 기간 그냥 얼른 끝내 버리게. 자네 이 대여점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나는 벌써 300년째 여기 단골 고객-.”

곧 울 것 같은 아이에게 쏘아붙이던 말 대가리 고객이 뒤통수부터 목 뒤와 척추까지 들이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말을 멈췄다.

“…….”

돌아보자 은청색 장발의 무시무시한 사내가 칼날 같은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말 대가리 고객은 그가 현무라는 사실은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치의 지배자라는 걸 느꼈다.

“아, 알겠소…. 그, 그럼 다음에 오겠소….”

말 대가리 고객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더니 대문 밖으로 줄행랑쳤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던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문단속을 했다. 현무가 손에 찻잔을 쥔 채 아이를 조용히 지켜봤다.

‘역시 훌륭한 조합이란 말이야.’

도진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 같은 일이 사흘 동안 벌써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무조건 이물을 달라고 바락바락 신경질 냈을 진상 고객들이 현무의 살벌한 눈빛 한 번에 얌전한 고객이 되어서 줄행랑치는 게.

서윤을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현무 덕분에 진상이 줄어들고 있다…!

도진은 묵은 스트레스가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서윤이 오늘로 알바를 끝마친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나 더 일해 달라고 매달릴 생각은 결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 끝나서 다행이었다. 하루만 더 일했다가는 반드시 저 하늘다람쥐가 크게 사고 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열심히는 하는데… 맑은 눈망울에 ‘열심열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긴 한데…. 몸이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건지 엄청 덤벙거리고 잘 넘어져서….

“으앗!”

생각하기가 무섭게 서윤의 비명이 들렸다.

대여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서윤이 마침 문틈으로 기어 나오던 끼웅이를 발견하고 피하려다가 발이 꼬인 것이다. 도진은 빠르게 달려가 아이를 부축할 수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아…!”

내내 아이를 주시하던 현무가 찻잔을 내팽개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도진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저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조심해라. 다친 곳은?”

“어, 없어요…. 감사해요. 현무 님.”

아이는 다치지 않았지만 찻잔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디 가려고 했지? 데려다주겠다.”

“저기, 제가 제 발로 걸을게요.”

“내가 데려다주마.”

“…그럼 주방까지만.”

“주방에는 왜. 배가 고픈가?”

“상담실 고객님에게 차를 타 드리려고요….”

“그래. 알았다.”

현무가 아이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저 모습도 사흘 동안 다섯 번 반복됐다. 찻잔이 벌써 다섯 잔 깨졌다는 뜻이다.

덤벙거리는 서윤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냉철해 보이는 현무가 대여점의 찻잔을 다 깨 먹고 있었다.

현무는 서윤이 어딜 가든 따라다녔다. 다 식은 찻잔을 들고, 냉엄한 표정으로. 서윤이 주방으로 가면 주방으로, 정원으로 나가면 정원으로. 다시 상담실로 들어가면 상담실로…….

오죽하면 현무가 낳았나?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끼우웅…….

자길 보고 놀란 서윤에게 놀란 끼웅이 흐물흐물 도진에게 기어와 신발 위에 엎드렸다. 도진은 혀를 쯧쯧 차고 끼웅이를 앞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조금만 참아. 오늘로 끝이야.”

끼우웅….

끼웅이 주머니 안에서 편한 자세를 취하며 잠들었다.

피곤할 터였다. 서윤이나 끼웅이나 간덩이가 없다시피 해서 서로가 서로를 보고 놀라는 일이 반복되고 있으니까.

진상 고객 퇴치용으로는 좋은데 끼웅이나 대여점의 찻잔을 생각하면 오늘이 마지막이라 다행이었다. 도진은 현무가 버리고 간 찻잔 잔해를 수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 님. 식사… 하러 오시래요.”

“아, 그래.”

정원에서 오동 화로를 돌보던 도진에게 서윤이 조그맣게 말했다. 현무가 서윤의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기기 때문에 도진과 이리도 덩달아 세끼를 챙겨 먹게 되었다.

오동 화로의 불을 적당히 지펴 두고 대여점 안으로 들어가자 주방에 이리와 현무가 앉아 있었다. 도진은 얼른 이리의 옆에 앉았고, 서윤도 현무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식탁 위에는 도토리묵, 도토리묵밥, 도토리잡채 등으로 아주 건강한 식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현무 가문에서 매끼 조달하는 식단이었다.

끼웅!

냄새를 맡았는지 깨우지 않아도 일어난 끼웅이가 급하게 미끄러져 내려와서는, 미니어처 그릇에 담긴 손톱만한 도토리묵을 깨물었다.

찹찹찹.

가장 윗사람이 아닌 가장 아랫것이 먼저 음식을 들면서 식사가 시작됐다.

“골고루 먹어라. 도토리묵만 먹지 말고. 고기도 먹고, 야채도.”

현무가 서윤의 그릇에 부지런히 반찬들을 날랐다.

“스승님. 골고루 드세요. 와, 이 잡채 존, 엄청 맛있네요.”

도진도 이리의 그릇에 잡채를 날랐다.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도진아, 내가 알아서 먹을게. 반찬 올려 주지 않아도 돼.”

“서윤이도 군말 없이 주는 대로 먹는데 스승님은 더 어른이시면서 왜 마다하세요. 서윤이를 닮아 보세요.”

“뭔가… 경우가 다르지 않아?”

“똑같아요. 그냥 제가 드리는 거 맛있게 먹으면 돼요.”

서윤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선인님도… 편식하세요?”

“…….”

현무가 대답을 잘하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아니. 편식 안 한단다. 도진이가 주는 대로 맛있게 먹을게.”

이리는 성장기 신수의 건강을 위해 도진이 올려 주는 반찬을 군말 없이 먹었다.

“현무네 가문에서는 늘 이렇게 채식을 합니까? 육류는요? 다람쥐라서 안 먹나.”

“육류는 일주일에 두 끼 먹는다. 그리고 서윤은 다람쥐가 아니라 하늘다람쥐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늑대거북과 바다거북도 비슷하다고 하겠군.”

늑대거북이라는 게 있어…? 호기심은 바로바로 풀어야 하는 도진이 당장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그냥 거북이였다. 내친김에 다람쥐와 하늘다람쥐도 검색했다. 과연 일반 다람쥐와는 다르게 생겼고, 생각보다 훨씬 귀여웠다.

124화.

“저는 본래 도토리묵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젓가락으로 집기 어려워서. 그런데 현무 가문분들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탱탱해서 젓가락에 흐무러지지도 않고 입에서 쫄깃쫄깃하게 씹혀요. 양념장도 맛있고. 우리 대여점 간장도 진짜 맛있거든요. 그런데 현무 가문분들 간장도 아주 맛있네요. 이따 가실 때 우리 간장 좀 싸 드릴까요?”

도진은 현무가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서윤에게 대할 때 말고는 냉정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예상과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많이 짜지 않다면.”

“염도는 현무 님 간장이랑 비슷하니까 괜찮을 겁니다. 이따 한 동이 드릴게요.”

“고맙군. 그럼 이제 식사에 집중하면 좋겠군.”

“아, 네.”

현무가 눈짓으로도 양해를 구해서 도진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현무는 아이 교육상 식사 중엔 대화를 금지했다. 도진의 경우에는 본가에서도, 대여점에서도 밥 먹을 때 떠드는 편이라 좀 어색했지만 높으신 거물 고객님과 거물 알바생에게 맞추기 위해 참았다.

식사를 마치면 반드시 다과 시간을 가졌다. 이때는 마음껏 수다를 떨어도 됐는데 대화를 주도하는 이는 당연히 도진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열다섯, 열여섯쯤이라고?”

“아, 저. 생일 지나서 열여섯이에요.”

사실 서윤은 열여섯 치고는 체구도 작고 훨씬 어려 보였다. 도진은 도희 열여섯 살 때를 떠올렸다. 서윤은 열여섯 살의 도희보다 한 10cm는 더 작은 것 같았다.

“생일이 언제였는데?”

“9월 18일이었어요.”

“18일이면… 일요일이었어? 말을 하지. 생일 선물 줬을 텐데.”

“괜찮아요….”

서윤이 수줍게 양 뺨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찻잔을 쥔 손가락은 내내 꼼지락거렸다.

“현무 님이 생일 선물은 뭐 주셨어? 널 워낙 애지중지하시니 엄청난 걸 주셨을 것 같은데.”

“그게….”

서윤이 옆자리의 현무를 힐끔거리더니 수줍은 듯 조그맣게 말했다.

“제가 생일 선물 대신 인간계에서 아르바이트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아, 그래서 대여점에 온 거구나. 그런데 왜 하필 인간계야? 천지천해에는 알바 자리 없냐?”

“있는데… 한번도 인간계에 내려와 본 적이 없어서…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아하.”

“그리고… 사실 이리 선인님과 도진 님에 대해 들었거든요. 도진 님도 생일 선물로 대여점 정직원을 시켜 달라 했다고…. 그래서 따라 했어요.”

도진이 활짝 웃었다.

“우리가 좋은 선례를 남겼군! 스승님, 이것 보세요. 우리 덕분에 작고 여린 하늘다람쥐가 용기를 냈다고요.”

“그래. 도진아.”

“우리 선례를 또 하나 남겨 봐요!”

“뭐?”

“이제 사제 지간을 한 단계 발전시켜서 연인지- 읍…. 읍읍!”

이리의 금언령에 도진의 말문이 막혔다. 도진이 이리의 어깨를 부여잡고 호소했지만 이리는 조용히 외면했다. 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현무는 눈을 내리깐 채 차를 마셨다. 끼웅이는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라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진은 스승의 금언령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일전에 퇴마사와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날 이리가 건 금언령을 푼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풀지 못했다.

아주 긴박한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발동되는 것인데, 이리가 위험하다거나 한 상황이 아니라면 긴박하다고 느끼지 못하니 당연했다.

눈빛으로 간절히 호소해도 못 본 척하던 이리는 고객이 오고 나서야 금언령을 풀어 줬다.

도진은 찻주전자의 물을 끓이며 한탄했다.

“이 자유 민주주의 시대에서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게 하고. 표현의 자유 어떻게 된 거야. 스승님은 내 표현의 자유에만 엄격하셔.”

끼웅끼웅.

“닥쳐. 김끼웅. 네가 뭘 알아.”

끼….

“입 다물라니까, 이게.”

도진이 끼웅이의 머리를 움켜쥐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때 서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도진 님….”

“엉?”

“제가… 제가 차와 주전부리를 가지고 갈게요. 도진 님은 화로를 돌보셔야 하니까….”

이 소심한 하늘다람쥐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눈동자가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도진은 흠, 하면서 빈 찻잔 두 개를 서윤에게 내밀었다.

“그래. 나야 고맙지. 방금 온 고객은 아주 뜨겁게 타다 드려야 된다.”

“네…!”

“그리고 말 놔도 돼. 네 살 차이밖에 안 되잖아. 도진이 형이라고 불러.”

“마, 마, 마, 말…. 말을… 놓.”

“그럼 부탁한다.”

“네…. 네, 도진이 형….”

서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진이 찻잔를 붙잡고 버티는 끼웅이를 잡아들고 일어났다. 막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으앗’하는 작은 비명과 쨍그랑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뻔했다. 서윤이 뜨거운 찻주전자의 물을 따르다가 손을 삐끗한 것이다. 그리고 저 ‘쨍그랑’은 현무가 찻잔을 내던지는 소리고….

지금 시각은 오후 한 시. 앞으로 다섯 시간 동안 몇 개가 더 깨질지 두려워지는 순간이었다.

“도, 도진이 형.”

정원에서 오동 화로를 돌보고 있던 도진을 서윤이 불렀다.

“왜? 간식 타임이래?”

“아뇨…. 고객 때문에 심부름시킬 게 있다고 선인님이 부르셨어요.”

“그래? 알았어.”

“아, 화로의 불은 꺼 두라고 하셨어요.”

외출해야 하는 일인가 보다. 도진은 화롯불을 끄고 잿더미를 치웠다. 그동안 서윤이 쭈뼛쭈뼛 구경했다. 그래도 자기도 오동 화로를 돌보고 싶다는 얘기는 안 해서 다행이었다.

상담실로 향하자 고객과 현무가 앉아 있었다. 이리가 도진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서윤에게도 말했다.

“서윤아. 너도 여기 앉아.”

“네? 아… 네!”

서윤이 현무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상기된 얼굴로 옆에 앉았다. 현무의 경우에는 서윤 곁의 벽에 기대서 있었다. 새로운 찻잔을 쥐고….

“이자들이 나를 도와줄 이들인가?”

고객이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는 보기 드문 산도깨비 고객으로, 여타의 커다랗고 흉측한 산도깨비와는 다르게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랗고 파란 털북숭이 모습이라 귀여웠다.

보통은 이렇게 귀여운 외양이면서도 나이는 수십 살, 수백 살이기 일쑤인데 실제 나이도 어리다는 점이 도진의 마음에 들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넘었다고.

처음 도깨비가 대여점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놀랐다. 도깨비는 독립심이 강해서 웬만해서는 이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고객은 아주 특이한 케이스였다.

“도진아, 서윤아. 이 고객 이름은 ‘털복숭이’야. 털복숭이야, 큰 쪽이 도진, 작은 쪽이 서윤이야. 인사하렴.”

“안녕하신가?”

“안녕하십니까, 털복숭이 님.”

“아, 안녕하세요…!”

셋에게 서로 인사시킨 이리가 사연을 설명했다.

“털복숭이는 최근에 근처로 이사 왔는데, 아직 지리를 익히지 못했다고 해. 어디에서 도토리묵과 시루떡을 파는지, 어디에 산수유꽃과 복사꽃이 피고 어디에 시내가 흐르는지, 어디에서 인간 아이들이 자주 모여 노는지 하나도 모른대. 그래서 도진이 네가 이 근처에 데리고 다니면서 알려 줬으면 좋겠어.”

“가이드를 하란 말이군요. 어렵지 않죠. 그런데 서윤이는 왜요?”

“서윤이도 앞으로 대여점에서 종종 일하게 될 테니까 지리를 익혀 놓으면 좋겠지. 우리가 자주 가는 마트랑 한복집부터 알려 줘.”

도진은 이리의 깊은 뜻을 헤아렸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서윤이에게 인간계에서 재미있는 것들을 잔뜩 경험시켜 주라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과보호 보호자는?

도진이 설마 현무도 데리고 다녀야 하는가 싶어서 현무를 슬쩍 쳐다보자 현무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서윤이를 부탁한다.”

“아, 네. 맡겨 두세요.”

“혀, 현무 님은… 가지 않으세요?”

서윤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이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확인하자 현무는 서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상한 데에 한눈팔지 말고 김도진의 말을 잘 들어라.”

“네…. 현무 님. 어디 가지 마시고… 저 기다려 주실 거죠…?”

“당연하지.”

서윤이가 현무의 품에 와락 안겼다. 현무는 서윤의 등을 토닥였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작별 인사를 끝낸 서윤이 털복숭이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도진은 테이블 밑을 더듬었다.

끼우우웅!

“내가 가면 너도 가는 거야. 이제 좀 포기해라.”

끼우웅…!

외출하라는 이리의 말이 떨어진 순간부터 테이블 밑에 숨은 끼웅이를 집어 든 도진이 털복숭이에게 던졌다.

“털복숭이 님, 걔 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있어 주세요.”

“알겠다. 이것은 잡귀인가? 귀엽군. 먹어도 되는가?”

끼우웅!

“안 됩니다. 그냥 붙잡고만 있으세요.”

“아쉽군.”

푸른 털뭉치가 입맛을 다시며 끼웅이를 푸른 털 속에 집어넣었다.

끼우우.

끼웅이가 털 속에서 얼굴을 쏙 내민 채 이리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도진이 시야를 가렸다.

“현무 님, 도희라고 제 친동생인데 서윤이보다 한 살 많아요. 이쪽 세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요. 불러도 될까요?”

“그래. 부르거라.”

“옙. 그리고 하나 더. 서윤이 여벌 옷 있습니까? 이런 본격적인 한복은 밖에서는 잘 안 입거든요.”

“아, 그건 제가 해결할게요…!”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가. 도진이 바라보자 서윤이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값비싼 비단옷이 현대 한국인의 교복 형태로 바뀌었다.

“인간계에서 제 또래들은 이런 옷을 자주 입는 것 같아서….”

“맞아. 정확해. 오늘 주말이긴 하지만.”

“아…. 다른 옷으로 바꿀까요?”

“괜찮아. 상관없지. 그런데 그건 둔갑술이냐? 아니면 도술?”

“도술이에요….”

“엄청나네. 나도 배우고 싶다. 이따 알려 줘.”

“아, 네…!”

하늘다람쥐 신수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칭찬을 들어 기쁜 마음이 주변인에게 전해졌다.

125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다녀올게요….”

“이리 선인, 안녕히 계시오.”

끼우웅….

네 명이 대문을 나섰다. 이리가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내렸다. 현무의 시선은 서윤의 뒤통수에 못 박혀 있었다.

“현무. 그렇게 걱정돼?”

“선인도 며칠간 보아서 알겠지만 워낙 잘 다치는 아이라서.”

“그 아이 옆에 있는 애가 장사야. 너보다도 빠르게 대처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차나 마시자.”

애들끼리 놀러 보내고 어른들은 정원의 정자에 앉았다. 이리가 쪼르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고풍스러운 무늬의 찻잔을 바라보던 현무가 말했다.

“이리 선인, 내일 가문에서 찻잔을 보내올 것이오. 극락에서 수입한 특등품 도자기 찻잔이니 내가 깨뜨린 값은 충분히 할 것이오.”

“안 보내도 되는데 극락 도자기라면 안 받을 수가 없네. 고마워.”

이리는 장난스레, 이 찻잔도 깨뜨려도 된다고 덧붙였다.

현무의 냉랭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리는 차의 온도가 적당하게 식기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현무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불쑥 내뱉었다.

“선인의 말이 맞소. 서윤이는 왕 할 그릇이 아니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다면 선인의 생각이 맞다고 해두지.”

“서윤이는 어떻게 만났어? 어린 신수는 정말 흔치 않은 존재잖아.”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소.”

현무는 이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지천해에서 보는 하늘과는 매우 다른 풍경이었다. 천지천해의 하늘에는 높은 산들이 둥둥 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보려면 하늘에 섬처럼 떠 있는 산 중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야 했다.

현무는 가슴이 답답한 날이면 업무를 내팽개치고 훌쩍 궁을 떠나 산에 오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훌쩍거리며 울고 있던 어린 하늘다람쥐를 만났다. 털 사이로 피가 언뜻 보여서 다친 곳을 봐 주기 위해 다가가자 기겁을 하더니 다른 봉우리로 대뜸 뛰어내려 버렸다.

실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후로 술래잡기 끝에 하늘다람쥐를 손에 넣었다. 손바닥에 가득 차지도 않는 자그마한 녀석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현무는 그 미약한 온기와 안타까운 떨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데려와서 상처를 치료해 줬는데 한동안 인간 모습을 하지 않았소. 하늘다람쥐 모습으로 침상 밑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더군. 도토리 하나라도 먹이기 위해서는 나를 포함해 모두가 침실을 나가서 기다려야 했소. 그게 한 달이나 계속되었소.”

“한 달이나…? 하계의 족속들이 어지간히 괴롭혔나 보구나.”

“하계의 구역을 방치한 내 잘못이었지.”

현무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는 5대 현무가 된 지 1,500년째로, 무료함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천지천해는 대략 5천 년 전 초대 신수들 넷이 모여 만든 세력이다. 그 넷을 사방위신이라고 부른다.

사방위신은 천지신명이다. 즉, 뿌리가 없이 스스로 태어나며, 태어나자마자 갈래의 가장 마지막에 다다르는 존재.

그들은 각자의 구역을 다스리다가 또 다른 사방위신이 태어나면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는다. 그리고 후계자가 어느 정도 컸을 때 자리를 물려준다.

5대 현무인 현흔도 그렇게 가주위에 올랐다. 그는 지금까지의 현무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다스렸고, 이제는 가주 자리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물려줄 현무가 태어나지 않았다.

자연히 현무는 불로불사의 존재들을 위협하는 무서운 병마인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해마다 하계의 족속들이 모여 사는 구역에 시찰을 나가던 걸 그만둔 이유도 이 때문인데, 하필 이 시기에 어린 영물이 신수가 된 것이다.

“서윤이 괴롭힘당한 데에는 가주의 숙명을 방임한 내 탓이 크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서윤을 구해 준 것도 너잖아.”

“그 반대라오…. 이리 선인. 나를 구해 준 이가 바로 서윤이지.”

그 작은 하늘다람쥐의 행동 하나하나가 현무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애달픔.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즐거움.

머리가 새빨개지는 분노.

심장을 움직이는… 사랑스러움.

현무는 서윤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서윤을 경계하던 가문 사람들도 작고 귀엽고 겁 많은 하늘다람쥐를 금방 과보호하게 되었다. 서윤의 경우, 현무 이외에 이들에게는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는데 현무는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보좌가 조언하더군. 임금 후보로 활동하면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등록하게 됐소. 올해가 가기 전에 사퇴할 예정이니 선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구나. 실제로 좀 변했어?”

“전혀.”

현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김도진의 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군.”

“우리 도진이가 대단히 활동적이긴 해. 하지만 너무 겁이 없는 편이라 나는 도진이 서윤을 좀 닮았으면 좋겠어.”

이런 말은 절대로 도진 앞에서는 못 하겠지만. 이리가 덧붙이며 웃었다. 현무도 얼핏 미소를 띄웠다.

“김도진은 좋은 왕이 될 것이오. 겉으로는 거친 성정을 지닌 것 같으나 속을 뜯어보면 다정한 면모가 있더군. 서윤이 그제와 어제, 잠들기 전까지 김도진이 소문과는 달리 얼마나 다정한지 재잘거렸소.”

“천지천해에 소문이 어떻게 나 있길래…. 아, 아니야.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강림도령과 도술 대결을 하고, 염라대왕과 팔씨름을, 소 장군과는 맨손 격투를 하더니 나중에는 임금님과 신경전까지 펼쳤다. 아주 담이 세고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도사이자 장사로 소문이 나 있을 것이다.

문득 이리가 시선을 느끼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현무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김도진이 선인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게 사실이었더군.”

“…….”

“소문으로는 이리 선인이 매몰차게 거절하고 있다던데, 곁에서 지켜보니 달랐소. 선인께서는 제자의 마음을 받아 줄 작정이오?”

이리가 뻐근한 목을 삐걱삐걱 돌리며 일어났다.

“아…. 나 할 일이 있어서 들어가 볼게. 오늘도 작업할 게 산더미….”

“줄행랑치는 것이오?”

“일 도우라고 하기 전에 그냥 조용히 쉬고 있어….”

“으음.”

이리가 다 마신 찻잔을 들고 정자를 떠났다.

현무는 사흘간 서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피곤할 터라 그냥 쉬게 둘 생각이었다.

이리는 찻잔을 개수대에서 씻으면서 생각에 빠지고, 작업대 앞에 앉아 장갑을 끼면서 또 생각에 빠졌다.

곁에서 지켜보니 소문과는 달랐다고?

뭐가 어떻게 달랐기에 마음을 받아 줄 거냐는 질문까지 하는 거지?

현무에게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지만…. 영원히 답을 모르고 싶었다.

현무는 서윤에게 애달픔, 즐거움,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이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도진이 힘 조절을 못 해서 낑낑거릴 때는 애달팠고, 다 큰 도진이 애교 부릴 때는 크게 웃기도 했고, 도진이 다쳤을 때는 한순간 머릿속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심장을 움직이는 것.’

최근에 몇 번 심장이 쿵 내려앉거나, 제게도 느껴질 만큼 빠르게 뛴 적이 있었다.

이리는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무조차 저리 말할 정도면 이제 모른 척하기도 어려운 감정이었다. 이러니 도진이 요즘 들어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 좋은 변화다 이러는 게 아니겠나.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모른 척하려는 생각이었다. 물에 흠뻑 잠겨도 웃으며 넘어갈 작은 파도가 아닌, 너무 큰 해일이었으니까.

* * *

“서윤이구나아. 만나서 반가워. 도희 누나라고 불러. 근데 네가 열여섯 살이라고? 그럼 중3인데 더 어려 보이는데. 중3들이 얼마나 크고 시커먼데 너는 뽀얘 가지고. 보송보송하고.”

“도희 누나도 어려 보이세요.”

“참나. 어린애가 비위 맞출 줄도 아네.”

도희가 으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남자 친구랑 데이트하러 나왔다가 도진의 부름에 남자 친구를 버리고 바로 달려온 도희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옷차림과 반대로 행동은 털털하고 호탕해서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오빠, 털복숭이? 털복숭이라는 도깨비는 어디 있어? 끼웅이는? 끼웅이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하고 싶은데. 나도 잠깐만 보여 주라. 응?”

“눈 감아.”

도희가 빠릿하게 눈을 감았다. 도진은 손바닥으로 도희의 왼쪽 눈꺼풀을 가렸다가 뗐다.

“이제 눈 떠.”

도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기대감으로 눈이 반짝였다. 도희는 서윤이 안고 있는 푸른 털뭉치를 발견하고 우와아아아 감탄했다.

“보인다, 보여. 털복숭이. 진짜 털북숭이야! 그쪽이 털복숭이라는 손님이죠?”

“안녕하신가, 인간. 나는 손님이 아니다. 고객이다.”

“아, 그래요. 고객님. 그리고 끼웅이도 안녕.”

끼웅.

끼웅이가 도희의 손가락으로 건너왔다. 추석 때 이미 인사를 나눴기 때문에 도희를 겁내지 않았다.

주변에는 잡귀나 잔챙이들이 몇 있었지만 도희의 눈에는 털복숭이와 끼웅이만 보였다. 도진이 다른 녀석들을 무서워할까 봐 딱 두 녀석만 보이게 한 것이다.

“호들갑 그만 떨고 이 근처 안내나 해. 너 친구들이랑 만나면 뭐 하고 노냐?”

“그냥 뭐. 옷 사고 밥 먹고 영화 보거나 코노 가고. 아, 요즘은 예쁜 카페나 빵집 탐방이 유행이야. 좋았어, 오늘은 빵집 탐방하자.”

“이 근처지?”

“어디까지가 근처인데? 지하철로 30분 거리는?”

“털복숭이 님, 괜찮으십니까?”

털복숭이는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30분까지는 괜찮다.”

“좋았어. 가자! 나를 따르시오!”

도희가 팔을 번쩍 들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126화.

도희는 우선 시장으로 향했다. 털복숭이에게 가장 중요한 묵 맛집을 알려 주고, 그다음은 떡 맛집에 가서 시루떡을 하나씩 먹었다.

근처 아이들이 다니는 초중고등학교를 보여 주고, 이 근방 아이들의 만남의 장소인 공원과 이 근방 아이들이라면 모두가 가 봤을 코인 노래방을 차례차례 소개했다.

안타깝게도 털복숭이가 좋아하는 시냇물은 없지만, 대신 백화점 앞마당의 예쁜 분수는 있었다. 털복숭이가 물을 보자마자 몸을 담고 싶어 해서 잠깐 쉬는 시간을 가졌다.

분수대에서 첨벙첨벙 헤엄치는 털복숭이와 반대로 끼웅이는 도희의 손에 달라붙어서 오들오들 떨었다. 김도진이 저를 분수에 집어 던지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실제로 도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끼웅이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끼웅, 끼우웅.

“응? 아, 그래. 끼웅이는 물을 싫어하는구나. 언니랑 오빠랑 같이 앉아서 기다리자.”

도희가 끼웅이를 데리고 분수대와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도희와 힘겨루기를 할 수 없는 도진은 쳇, 혀를 찼다.

“김도희. 걔 여자애 아니야.”

“뭐 어때. 남자애도 아니잖아. 서윤아, 너도 여기 와서 앉아.”

“아, 네…. 으앗!”

서윤이 후다닥 달려가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작은 돌부리에 걸려서 휘청거렸다. 도진이 얼른 팔을 뻗어 서윤을 지탱했다.

“감사합니다….”

“현무 님이 널 왜 안고 다니시는지 알겠네.”

“아, 안아 주실 필요는 없어요….”

“나도 안을 생각은 없어.”

도진은 서윤이 바로 설 수 있게만 해 주고 팔을 회수했다. 서윤은 이번엔 조심조심 천천히 걸어서 도희의 옆에 앉았다.

“둘 때문에 사람들이 다 여기 쳐다보네. 오빠 그거 시선 흩트리는 도술 같은 것 좀 써라.”

“왜? 너 관심 좋아하잖아.”

“이 정도 관심은 부담스러워.”

도진은 어깨를 으쓱하고 도술을 사용했다. 내다 꽂히던 시선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도희는 이제 좀 살겠다며 다리를 벌렸다.

“다소곳하게 좀 앉아. 서윤이 좀 봐. 얼마나 얌전하고 보기 좋냐.”

“어차피 아무도 나 안 보이는데 뭐 어때. 서윤아. 이제 메모지랑 펜 좀 내려놓고 사람 구경 좀 해. 뭘 그렇게 쓰는 거야?”

“근처 지리를 익히느라고요….”

서윤은 계속 메모지와 펜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추후에 또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만약 그때 외근할 일이 생긴다면 지리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김도희와는 다르게 모범생 스타일이야. 누가 더 어린지 원.”

도희가 왈왈 짖기 전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타일이 뭔가요?”

“모범생 타입이라고.”

“타입…?”

“카테고리.”

“그렇게 설명하면 어떡하냐. 하여튼 불친절한 티 내고 있어. 서윤아. 타입이라는 건 유형과 부류를 뜻해. 그러니까 네가 모범생 유형이라는 거지. 모범생이 뭔지는 알지?”

“네. 그런데 사실 제가 공부는 잘 못하는데…. 성적은 맨날 하위권이에요….”

도희도 놀랐지만 도진도 놀랐다.

“천지천해에 학교가 있나?”

“인간계 같은 학교는 없는데 사방신 가문 아이들은 모여서 수학(修學)을 하거든요. 매달 시험을 보는데… 저는 세 번이나 낙제 점수를 받았어요….”

떠올리자 우울한지 서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서윤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도진은 애가 고생이구나 싶었다.

“너희 세계나 우리 세계나 공부란 힘들구나….”

도희가 서윤의 어깨를 토닥이기 위해 손을 들자 서윤이 화들짝 놀랐다. 누가 봐도 맞을까 봐 놀란 모습이었다. 도희는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다는 듯 손으로 제 머리칼을 추스르고 다시 내렸다.

“그… 현무라는 분이 너 막 혼내시고 그래?”

“아, 아니에요. 현무 님은 제 성적을 묻지도 않으세요….”

“그럼 됐네. 우리 나이 학생들은 노술노담 하면서 건강하고 건전하게 자라면 돼.”

“노술노담이 뭔가요?”

“모르면 모른 채로 있는 게 낫겠어. 저기 봐. 서윤아. 분수대에 무지개 떴어.”

“와아…….”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소박하게 떠오른 무지개는 작지만 아름다웠다.

도희가 곧장 사진을 찍었다. 도진도 핸드폰을 꺼냈다.

“제법 볼만하네. 스승님한테 보여 드려야지.”

“저기…. 도진이 형, 저도 그거… 핸드폰 가질 수 있나요?”

“가질 수야 있는데 천지천해에서는 안 터질걸.”

“그냥 사진 찍는 용도로 쓰려구요….”

“아, 그래. 만들어 줄게. 가자!”

도진이 당장 일어났다. 그는 분수대에서 잘 놀고 있는 도깨비를 끄집어냈다. 푸른 털복숭이는 물에서 건지자마자 보송보송해졌다.

“왜, 왜 건졌느냐? 깜짝 놀랐다.”

“실컷 놀았으니 이제 이동하자고요.”

“무슨 말인가. 방금 물에 들어왔는데…!”

털복숭이가 바동거렸지만, 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산도깨비에게 어찌 이리 무엄한가! 호통치던 산도깨비는 복사꽃 구경이나 가자는 도진의 말에 금방 얌전해졌다.

서윤은 괜히 자기 때문에 빨리 이동하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털복숭이의 털을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일사천리로 핸드폰을 만들어 서윤에게 건네고, 다시 탐방을 이어 갔다. 동네를 모두 헤집은 후에는 도희가 늘 가 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다며 지하철을 타고 20분을 더 가야 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거기서도 카페에 바로 들어간 게 아니라 사방을 돌아다녔다.

포토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은 후 한 사람당 한 장씩 나누고(끼웅이는 못 받았다), 아무 방탈출 카페나 들어갔다가 하필 공포 테마라 서윤이 기절하기 전에 탈출을 포기하고 나왔다(끼웅이는 들어가자마자 기절했다).

마침 누가 기타 치면서 거리 연주회를 하기에 그것도 좀 듣고(도진이 바구니에 끼웅이를 집어넣어서 끼웅이가 삐졌다), 인형 뽑기 기계에서 도희가 서윤이에게 다람쥐 인형을 뽑아 줬다(도진이 끼웅이를 기계 안에 넣으려고 해서 끼웅이가 울었다).

“야, 카페 간다고 여기 오지 않았냐? 카페만 빼고 모든 곳엘 가네.”

“알았어. 지금 막 가려고 했거든.”

드디어 카페 앞에 당도한 일행은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했다. 언제 다 기다리냐며 툴툴거린 사람은 도진밖에 없었다. 털복숭이는 사람 구경하느라, 끼웅이는 도희랑 노느라, 그리고 서윤은 천지 사방에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바빴다.

일행을 한 번씩 찍고, 자기 얼굴도 찍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잡귀와 요물들을 찍고, 파란 하늘과 녹색 가로수, 벗겨진 아스팔트 바닥과 보도블록 사이에 핀 잡초 따위를 카메라에 담았다.

‘현무한테 보여 주려는 거겠지?’

도진은 현무가 잡귀와 요물 따위보다는 잡귀를 찍은 사진 구석에 박힌 서윤의 손가락이나, 가로수를 찍은 사진 구석에 비친 서윤의 옷자락에 더 관심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냥 놔두었다.

대신 그는 핸드폰을 꺼내 다양한 배경과 다양한 각도로 셀카를 찍었다.

스승님은 나를 가장 좋아하실 테니까!

슬슬 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도희가 메뉴판을 가져왔다.

“우리 미리 메뉴 골라 놓자 서윤아, 새콤하면서 끝맛이 씁쓰래한 게 좋아, 아니면 달달하면서 구수한 게 좋아?”

“아, 저는 초코칩 프라푸치노 휘핑 올려서 부탁드려요.”

도희의 배려 가득한 물음에 서윤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스타일’과 ‘타입’이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휘핑 올린 초코칩 푸라푸치노를 파는 천지천해가 어떤 곳인지 도진은 점점 알 수 없어졌다.

줄 선지 30분 만에 내부에 착석했다. 운 좋게도 바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분위기가 괜찮은 카페였다. 커피 냄새와 빵 냄새가 조화롭게 풍기고, 배경 음악으로는 클래식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테이블과 의자는 원목이었는데, 의자마다 도톰한 방석을 깔아놓았다.

“카페 괜찮지? 여기가 요즘 제일 핫한 곳이야. 포토존도 되게 잘 꾸며 놨어. 서윤아, 사진 찍자. 털복숭이 님도요.”

도희가 일행을 데리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도진은 앉아 있고 싶었지만 덜렁대는 서윤이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따라다녔다. 실제로 서윤은 몇 번이나 포토존에 넘어질 뻔했다.

자리로 돌아와 커피와 빵을 먹었는데 향도 좋고 맛도 괜찮았다.

“야. 이런 카페 있으면 진작 알려 줘야지.”

“알려 주면 뭐. 오빠가 이런 델 다니게?”

“앞으로 스승님이랑 자주 다닐 거야.”

“그럼 알려 줘야지.”

이리 얘기를 꺼내자 도희는 당장에 찾아 놓은 카페 목록을 도진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자기 몫의 차를 다 마시고 빈둥빈둥 앉아 있던 털복숭이가 물었다.

“이리 선인이 카페도 다니는가?”

“요즘엔 좀 시간 여유가 생겼습니다. 복지관에서 나름대로 일을 받아 가고 있거든요.”

“아, 시간이 되느냐고 물은 게 아니다. 이리 선인은 사람 많은 곳을 안 좋아한다고 들어서 말이다.”

“안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피하시는 쪽에 가까워요. 스승님은 워낙에 사람을… 모든 생명을 좋아하셔서. 세상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분이죠.”

“으음. 하긴 그렇기에 이 긴 시간 동안 대여점을 운영하는 거겠지.”

털복숭이는 끙차, 하고 일어나더니 도진을 향해 꾸벅했다.

“김도진. 그대가 이리 선인의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아, 네…. 뭐. 네. 저야말로 스승님이 곁에 있어서 다행인데요.”

도진은 이 갓 태어난 도깨비가 무슨 이리 선인의 부모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게 어이없었지만 덩달아 고개를 꾸벅했다.

127화.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벌써 가시게요? 조금 더 놀다 가시죠.”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집 정리를 더 해야 한다. 나는 잘 찾아갈 수 있으니 너희는 놀다 가거라.”

“이 동네는 전체적으로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마음에 든다. 역시 대여점 근처를 터로 선택하길 잘했군.”

도진 생각에는 앞으로 털복숭이가 백화점 앞 분수대에서만 눌러살 것 같았다.

“김도희여, 오늘 안내는 고마웠다. 그대의 앞날에 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여점의 잡귀 조수와 새로운 아르바이트생도 건강하거라. 그럼 이만.”

산도깨비가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털복숭이가 사라지자마자 도희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오빠, 쟤 나랑 나이 비슷하다며. 원래 위아들은 말투가 고풍스러워?”

“그런 편이지. 그리고 ‘쟤’라고 하지 마. 저래 보여도 영물보다 높은 갈래에 위치한 분이니까.”

“영물이 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나.”

도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도진이 작게 웃는 서윤을 힐끗했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갈래는 신수인 서윤이었다. 털복숭이도 서윤을 어린애 취급하긴 했지만, 산도깨비란 원래 선인에게도 존대를 하지 않는 족속들이라 그런 것이고. 만약 오늘 함께 돌아다닌 고객이 산도깨비가 아니라 신령이나 혼령이었다면 내내 서윤을 깍듯하게 모셨을 터였다.

일행은 좀 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가기로 했다. 본래 위아들과 만나면 도진이 대화를 이끌어 가는데, 오늘은 도희가 있기 때문에 도진은 과묵한 보호자 흉내를 냈다. 도희는 서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천지천해란 곳에서는 동물 모습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지? / 주로 인간 모습을 한다.

동물 상태일 때도 대화가 통하는지? / 인간 말이 가능하기 때문에 대화할 수 있다.

개랑 원숭이는 정말로 사이가 안 좋은지? / 얼마 전에는 서로 전쟁 선포를 해서 사방신 가문이 겨우 말렸다.

“현무 님은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아…….”

잘 대답해 주던 서윤이 입술을 모았다.

“아, 미안. 내가 이상한 질문을 했나?”

“아니에요, 누나…. 괜찮아요.”

서윤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현무 님과는 1년 전에… 천지천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만났어요.”

이들에게 깊은 속사정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사실 그날. 서윤은 죽으려고 했다. 하계 족속들의 계속된 괴롭힘에 지쳐서.

죽기 전 천지천해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갔던 이유는 이곳을 다스리는 현무 가문을 한 번이라도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왜 하계의 존재들을 방치하는지.

이곳의 왕은 나를 버린 건지.

그렇게 성군이라는데 어째서 내게는 손길을 뻗지 않는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가장 높은 곳에 서면 보일까 해서 올라갔다.

“처음 보는 순간 현무 님이라는 걸 깨닫고 도망갔는데… 계속 쫓아오셨어요.”

처음엔 무서웠다. 원망하는 마음을 들킨 게 아닌가 해서. 침상 밑에 숨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은청발의 사내는 서윤이 마음을 열기까지 그저 묵묵하게 기다려 줬다. 사연을 알게 된 후에는 진심 어린 사과도 해 줬고…. 하계의 족속들도 완전히 치워 줬다. 그 점이 제일 고마웠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영물들이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너는 만난 게 아니라 잡힌 거구나. 좋겠다. 나도 하늘다람쥐 잡아 보고 싶은데.”

“죄송해요…. 신수는 천지천해를 제외한 곳에서는 본연의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들어서….”

“왜? 사람으로 치면 목욕탕 아닌 곳에서 나체인 거랑 비슷한가?”

나체라니. 서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서윤 대신에 도진이 말했다.

“‘인간으로 치면’이라는 비교는 무의미해. 문화가 다른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라.”

“알았어. 진짜 귀여울 것 같은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저… 별로 안 귀여워요.”

서윤이 끼웅이의 동그란 배를 쪼물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새빨개진 귀가 이미 귀여웠다.

끼우웅. 끼웅.

그 와중에 끼웅이는 등도 만져 달라고 몸을 뒤집었다.

“너 지금도 엄청 귀여워. 너는 뭐 궁금한 거 없어? 인간 세계에 관해 물어보면 다 대답해 줄게.”

“아, 노담노술이 뭐예요?”

“모르는 게 낫다고 했지. 다른 거 물어봐 봐.”

“그럼… 저기에서 인간 두 명이 하고 있는 행위가 뭐예요?”

도희와 도진이 고개를 쭉 빼고 서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길거리에서 어떤 커플이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미친.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곳에서 뭐 하는 짓이야?”

“그래. 열여섯 살이면 너도 알 때가 되었지.”

오빠와 동생의 반응이 정반대였는데 보수적인 쪽이 오빠고, 개방적인 쪽이 동생이었다.

도희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오빠. 스로 끝나는 다른 단어도 아니고 고작 키스잖아. 그렇게 정색할 필요 있어?”

“키스라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깊은 애정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위야. 저렇게 공공장소에서 전시하듯 가볍게 내보일 짓이 아니란 말이다.”

“첫 키스 못해 본 사람답네.”

“너는 해 봤다는 거야?”

“중딩 때 한 살 연하남이랑.”

“어떤 씨발 새끼… 아직도 연락해? 어디 살아? 번호 내놔.”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분위기에 도희는 놀리듯 혀만 메롱 하고는 알려 주지 않았다. 서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스란 게 뭐길래 이런 반응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라면 현무 님과도 해 보고 싶었다.

“김도희. 빨리 말 안 해?”

“아, 오빠. 오버하지 마. 걔 지금 중3인데 뭘 어쩌게. 그리고 나도 걔도 흑역사였어. 잊고 싶은 과거란 말이야.”

“기억해 둬. 키스는 성인이 된 후 사랑하는 상대와만 하는 거야. 앞으로 3년 동안은 남자랑 신체 접촉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알았어. 남친 사귀어도 뽀뽀도 안 할게. 좀 진정해.”

“거짓말인 거 다 알아. 주술 건다.”

“왜! 주술은 반칙이지. 청소년기에 너무 옥죄면 더 엇나가는 거 몰라?”

“서윤이의 반이라도 닮아 봐라. 애는 이렇게 의젓하고 얌전한데 너는 왜 이렇게 발랑 까졌어?”

현무 님과 입 맞추는 상상을 하고 있던 서윤이 깜짝 놀랐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도 도희와 도진은 이 하얗고 말간 아이가 그런 상상 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끼웅…….

유일하게 눈치챈 끼웅이만 고개를 저었다.

서윤은 천지천해에 살면서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견원지간의 싸움 때문에 이런 말다툼이 익숙했다. 남매간의 싸움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며 찍어 놓은 사진들을 훑었다. 이제 이 앨범에 현무 님의 사진도 담을 생각을 하니 얼른 대여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때 빵도 하나 포장해 달라고 할까? 이 말차크림 크루아상은 현무 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배시시 웃을 때였다.

빠앙…!

바깥에서 자동차 경적이 크게 울렸다. 카페 사람들이 “뭐야?”, “사고 났어?”, “깜짝이야” 하며 술렁거렸다. 도진과 도희도 싸움을 멈추고 밖을 내다봤다.

웬 아저씨 하나가 운전석에서 고개를 빼 들고 커플한테 뭐라 큰소리치고 있었다. 사고는 아니고 그냥 너무 진한 애정 행각 중인 커플이 꼴 보기 싫어서 경적을 울린 것 같았다.

“아, 존나 놀랐네.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이 민폐를….”

도희가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깜빡했다.

“왜 그렇….”

도진이 도희가 보고 있는 것을 쳐다봤다가 똑같이 눈을 깜빡였다.

끼웅….

끼웅이도 동참했다.

셋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새하얀 털의 작고 귀여운 하늘다람쥐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 * *

도진은 도희를 보내고 곧장 대여점에 돌아왔다. 도진의 손에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하늘다람쥐를 보고 이리도 놀랐지만 현무는 대경실색했다.

“괜찮다. 자동차 경적이었을 뿐이다. ”

삐이삐이.

“자동차 알지? 부릉부릉.”

삐이이.

“괜찮다. 아무도 널 해치지 않는다. 저길 봐라. 상수리나무에 열매가 가득 매달렸구나.”

현무가 하늘다람쥐를 품에 안고 다독이면서 정원을 돌아다녔다.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럽고 자상해서 서윤은 그 따뜻함에 도리어 눈물이 나는지 계속 훌쩍거렸다. 본래 중간계에서는 수화가 금기시되는지라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독임을 받으니 더 울컥했다.

그 모습을 이리와 도진이 정자에 앉아 지켜봤다. 이리의 품에서는 끼웅이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끼우웅. 끼웅. 끼웅.

“서윤이가 많이 놀라서 그래. 아픈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끼우웅.

“그래, 그래. 끼웅이도 너무 놀랐어. 서러웠어.”

이리가 끼웅이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리의 등 뒤로 팔을 쭉 뻗고 옆에 앉은 도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자동차 경적에 놀란 것 이상으로 울잖아요.”

“애들이란 남이 울면 같이 우는 법이니까.”

“저도 울면 스승님이 달래 주시나요?”

“너는 애가 아니잖아.”

“그렇죠! 저는 애가 아니죠. 이따위 일로 울지 않습니다.”

어른스러움을 인정받은 도진이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런데 도진아.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손가락에 매달고 오면 어떡해. 품에 꼭 안았어야지.”

“내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람은 스승님뿐이라서요.”

“…….”

“그리고 서윤이 안고 왔으면 현무 님도 싫어했을걸요. 아, 눈물 그쳤나 봐요.”

현무가 하늘다람쥐를 조심스럽게 상수리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하늘다람쥐는 곧 교복 입은 소년으로 변했다. 멀리서 봐도 확연히 알만큼 눈가가 붉었다. 운 티가 많이 나는 아이였다.

현무가 부끄러워하는 서윤이의 등을 다독이며 정자로 다가왔다. 현무의 가슴팍에 하늘다람쥐의 눈물 자국 두 개가 콕콕 박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