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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옆에 있어.”
-보부상 형이 귀찮게 하는 거 아니죠? 제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금방 갈게요.
도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 톤 올라갔다.
“오늘은 네 집으로 퇴근해.”
-스승님! 끼웅이가 물을 엎질러 가지고. 저 끊을게요. 이따 봐요!
전화 너머로 끼웅이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리다가 끊겼다.
보부상이 혀를 끌끌 찼다.
“이 녀석은 한참 더 공부해야겠다. 아직도 꽃 생기 유지 시간을 몰라?”
“도진이도 알아. 알면서 전화한 거야. 이 핑계로 목소리 듣겠다고.”
이리가 웃으며 말했다. 도진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을 때부터 짓고 있던 옅은 미소가 좀 더 진해진 상태였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고, 눈 밑에 도톰한 애교살이 만들어졌다. 양 입꼬리도 올라가 더욱 귀여운 얼굴이 되었다.
“야, 너….”
보부상이 이리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뭉용의 말이 맞네. 역시 장사가 던지는 돌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얼른 반죽이나 만들어 줘. 나는 이제 고객이 와서 일어나야겠어.”
“뭔 소리야. 아직 아무도 안 왔구만.”
보부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이리가 ‘이것 봐’라며 눈썹을 까딱했다. 보부상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 *
이틀 후, 이리와 도진은 박물관의 폐장 시간에 맞춰서 입장했다. 거울못으로 향하자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잉어가 저쪽으로 헤엄쳤다 이쪽으로 헤엄쳤다 하며 온몸으로 초조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을 발견한 금서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도진이 들고 온 어항을 기울이자 금서가 폴짝 뛰어올라 어항으로 쏙 들어갔다. 이리는 저번과 같은 도술로 금서와 언어부터 통하게 했다.
“금서, 안녕. 잘 있었어?”
“인사 나눌 시간이 없소! 얼른 출발하시오.”
살날이 하루 남은 금서가 폴짝폴짝 뛰며 재촉했다. 도진과 이리는 바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잠겨 있던 문은 이리가 손잡이를 붙잡자 자연스럽게 열렸다.
끼우웅.
불 꺼진 공간이 무서운지 끼웅이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리와 도진은 딱히 불을 켜지는 않고 대신 옆에 호롱불 하나만 띄운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기증관과 기증관 사이의 틈에 있소. 아, 바로 저곳이오.”
와가 잠든 곳은 금방 찾았다. 폭 20cm, 높이 2m 남짓한 틈에 몸 길이 2m의 지네가 쿨쿨 잠들어 있었다. 몸통이 두껍고 다리가 굵직한 튼실한 놈이었다.
“구석도 아니고 사람들 지나다니는 곳에서 자네요. 안 시끄럽나.”
도진이 어항을 내려놓았다.
벌써 울고 있는 금서의 앞에 이리가 쪼그려 앉았다.
“이 종을 네게 줄게. 세 번 울리면 와의 꿈속에 들어갈 거야. 30분 후에 또다시 세 번 종이 울리면 꿈에서 나오게 돼. 이해했지?”
“이해했소! 얼른 종을 주시오. 얼른 내 지네를 만나고 싶소.”
이리가 종을 꺼내 어항에 넣자 종은 손톱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금서가 지느러미로 서둘러 종을 울렸다.
두웅- 두웅- 두웅.
“이, 이렇게 울리면 되는 것이오? 그러면 나는 와의 꿈으로-”
금서는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 꼬르륵 잠들었다.
끼웅이가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어항을 톡톡 두들겼으나 황금 잉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스승님, 우리는 연못 구경이나 할까요?”
“30분 후면 깨는데 무슨 구경이야.”
“그럼 유물 구경해요. 여기 유물 많잖아요. 저 역사 공부도 하고 스승님도 옛 추억도 되새길 겸. 네?”
끼웅, 끼웅!
끼웅이도 기대감을 품고 주머니에서 거의 상체까지 빠져나왔다.
도진의 말대로 사방이 유물로 가득 찬 곳이긴 했다. 둘은 바로 지척의 기증관을 천천히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아아, 자네가 죽는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네가 죽는다니. 천년만년 나와 함께 살 줄 알았던 나의 잉어가 죽는다니!”
그 시각, 지네와 잉어는 연못가에서 이별의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금서는 물 밖에서도 세로로 설 수 있었고, 허공을 날아다닐 수도 있었다. 와 또한 물에 흠뻑 젖어도 멀쩡했다.
상대를 끌어안아도, 지네의 다리가 잉어의 비늘에 상처를 내지도 않았고, 잉어의 무게가 지네 등갑을 짓누르지도 않았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지금에서야 둘은 서로를 마음껏 끌어안았다.
“내가 수행을 더 열심히 했다면 잠들기 전에 자네의 수명을 미리 알았을 텐데.”
“내 지네야. 미리 안다고 무엇이 달라졌겠는가. 우리가 겪을 슬픔의 시간만 더 길어질 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짧은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우리는 180년을 함께했는데 고작 한 시간 만에 모든 인사를 마치라니 야속한 선인이로다.”
“그리 말하지 말게. 이리 선인은 친절하고 인자한 분이네. 이리 선인 덕분에 자네와 내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 것 아니겠나.”
금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와의 마음을 이해했다. 영원한 이별을 앞뒀으니 무엇이든 다 원망스러운 것이다. 금서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네는 이제 영물을 앞두고 있는데도, 분명 나 없이 홀로 잘 살아갈 텐데도 자네를 두고 가는 심정이 편치가 않게.”
“나도 마찬가지일세. 부모도 없이 천애 고아인 내가 이렇게 자란 건 모두 자네 덕분이네. 그동안 자네에게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하네. 특히 마지막의… 민둥머리 물고기라는 말만은 안 했어야 했는데.”
금서의 아가미가 잠깐 씰룩거렸다.
“그런 말 말게. 나도 자네에게 몸만 큰 돈벌레라고 했었지 않나.”
와의 더듬이가 잠깐 움찔했다.
“…그래도 자네를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 잉어라고 말한 건 심했지.”
“…나도 자네를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벌레라고 말했던 건 심했네.”
“…….”
“…….”
평소에는 이런 비난 후에는 서로를 죽일 기세로 싸웠지만, 이제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나의 민둥머리 물고기.”
“나의 몸만 큰 돈벌레.”
서로에게 던진 비난이 진심 어린 혐오가 아니라는 건 서로가 더 잘 알았다.
둘은 좋았던 추억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긴 시간을 함께한 만큼 추억도 많았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다투었던 일조차 이제 와 생각하면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이었다.
두웅-.
종이 한 번 울렸다.
“나의 지네야. 종이 두 번 더 울리면 나는 꿈에서 깬단다.”
“시간이 벌써 이리 흘렀는가? 너무 짧네. 너무 가혹하네.”
금서는 며칠 동안 마음의 정리를 했지만, 와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정말로 내가 눈을 떴을 때 자네가 없단 말인가? 거울못을 구석구석 뒤져도 자네를 볼 수 없단 말인가?”
“부디 행복하게 살게나. 나의 지네야.”
“이제 내가 영물이 되고 나면 자네와 좀 더 먼 곳까지 여행을 떠나려 했건만. 어찌하여….”
“자네라면 영물을 넘어서 신령도 될 수 있을 걸세. 자네는 정말 열심히 수행해 왔으니까. 나도 자네의 옆에서 같이 수행할 걸 그랬네. 괜히 윤회 같은 건 택하지 말 걸….”
두웅-.
두 번째 종이 울렸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환생을 위해 많은 덕을 모아 왔지.”
“그렇다네.”
와의 붉은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금서는 우느라 앞이 희뿌연 상태라 눈치채지 못했다. 와는 긴 더듬이로 금서의 비늘을 만지작거렸다.
“아아…. 자네. 정말 많은 덕을 모았구만.”
와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금서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다음 생 같은 건 생각하지 말 걸 그랬네. 자네와 조금 더 길게 지내도록 나도 수행을 할걸. 아아. 잘 지내야 하네. 건강하게…. 연못의 잉어들과 목백일홍나무도 지켜 주고…. 잘 자라서 박물관의 수호 신령이 되어 주게….”
“…….”
하염없이 울면서 작별 인사를 내뱉는 금서를 와가 조용히 내려다봤다.
세 번째 종이 울리기 전에 선택해야만 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선택이었다.
* * *
30분이 지났다. 짧은 구경을 끝내고 돌아온 이리와 도진 앞에서 황금 잉어가 눈을 떴다.
“아아…….”
금서가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호한 감탄사를 흘렸다.
이리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이리는 차마 말도 맺지 못했다.
도진은 이리가 놀라자 덩달아 놀랐다. 설마, 설마 와가 정말로 금서의 덕을 가져갔나? 금서가 와에게 덕을 준 걸까? 얼른 금서의 남은 덕을 확인한 도진이 입을 쩍 벌렸다.
금서의 덕이 300년으로 불어나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덕이 이렇게 많아졌어요?”
“와가 나한테 덕을 강제로 안겼소….”
금서가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제 곧 명을 다하는 잉어는 하염없이 울면서 말했다.
나의 친우가… 한 달만 더 자면 영물이 될 나의 지네가 내게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라고 자신의 덕을 이만큼이나 떼어다 줬소. 이제 와는 앞으로 백 년을 더 자야 하오.
우리는 다음 생에 만나지도 못할 텐데. 만난다 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그 녀석이 다시 덕을 쌓으려면 또 기나긴 시간을 수행해야 하는데.
내 다음 생을 위해. 서로 만나지도 못할 내 다음 생에서 더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나는 어찌하면 좋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이오….
이런 녀석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란 말이오.
죽음이란 너무 야속하오….
내 친우를 잘 돌봐 주시오. 가끔가다 들러서 건강하게 잘 있는지, 그리움에 악몽을 꾸지는 않은지 살펴 주시오. 부탁하오. 이리 선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선인께 부탁하는 것 말고는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