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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종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게 많았기에 둘은 다음 날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뭉종은 종 지름 5cm, 높이 8cm 정도의 작은 크기인데, 황금으로 만들어져 제법 무거웠다. 손잡이와 고리, 종 전체에 각양각색의 꽃들이 새겨져 있고, 종을 흔들면 청아하다기보다는 두웅- 둥- 묵직한 소리가 났다.
자는 사람 앞에서 이 종을 흔들면 자는 사람의 꿈에 들어갈 수 있다. 유지 시간은 30여 분. 더 길게 할 수도 있으나 그러려면 달빛과 햇빛, 이슬을 받는 기간도 길어져야 했다.
“꽃에 색부터 하나하나 넣어 줘야 해. 오색빛깔로 예쁘게.”
“아, 원래 색깔이 있는 꽃들이었구나. 염료도 당연히 우리가 만들어야겠죠?”
“응. 풀조미료 만들 듯이 만들면 돼. 백합, 산수유, 홍매화, 자주달개비, 검은박쥐꽃을 쓰고.”
“흑자리공 뿌리도 필요하겠네요.”
“도채리약도.”
도채리약은 염색용 이물인데,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섯 가지 재료가 필요했다.
도진이 메모지에 이리가 읊어 주는 재료들을 하나하나 써 내려갔다. 다 쓰고 나니 서른두 개나 되었다.
“역대 최다네요. 끼웅이 손도 빌려야겠어요.”
끼웅…….
끼웅이는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시키면 하겠다는 뜻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도진이 끼웅이를 덥석 들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로 나가서 다 구해 올게요. 오늘이랑 내일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다 구하지 않아도 돼.”
이리가 웃으며 도진의 손에 든 메모지를 가져갔다. 연필로 몇 개에 선을 죽죽 긋자 서른두 개에서 스무 개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보부상한테 살 테니까 이것만 구해다 줄래?”
“스승님…. 연필 쥐는 손 모양 너무 예뻐요.”
“…….”
“사진 한 번만 찍으면 안 돼요?”
도진이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이리는 난처했지만, 오늘과 내일 내내 바깥을 돌아다녀야 하는 제자를 위해 다시 연필을 쥐었다. 도진이 콧김을 내뿜으며 촬영했다.
“스승님의 손가락… 길고 하얀 손가락…. 하아.”
“…….”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래. 일은 잘하니까…….
제자에게 심부름을 시켜 놓고 이리 혼자 고객을 받으며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멋대로 대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로 보부상이었다.
새빨간 머리에 입술과 눈썹, 귀 등에 덕지덕지 착용한 피어스. 껄렁껄렁한 표정까지 양아치가 따로 없었지만, 단정한 셔츠와 슬랙스가 양아치 분위기를 중화했다.
“야, 이리. 나 왔다.”
“일단 이것부터 입어.”
이리가 대뜸 앞치마부터 내밀었다.
“너는 인사도 안 하고, 씨. 나 시켜 먹으려고 일부러 부른 거지?”
보부상은 툴툴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앞치마를 착용했다. 작업대 앞에 앉아 장갑을 끼는 손길도 매우 자연스러웠다.
“뭐 하면 되냐?”
“황금 사과 껍질부터 깎아 줘. 내가 말한 것 다 가지고 왔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보부상이 등에 멘 가방을 작업대 위에 올리고 이리가 주문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지 않은 배낭 가방인데, 다 꺼내고 나니 작업대를 한가득 채웠다. 신물인 ‘오동 복주머니’로 ‘입의 문’과 같은 기능을 가진 가방이었다.
“하늘꽃밭에서 방금 따 온 황금 사과야. 다 필요한 게 아니면 한 입 깎아 먹자.”
보부상이 황금 사과를 이리에게 던졌다. 황금 사과는 이리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이리는 허공에서 황금 사과를 이리저리 둘러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건 껍질뿐이니까 도진이 오면 같이 먹자.”
“그러고 보니 김도진 어디 갔냐?”
“심부름 보냈어. 재료가 좀 많아서.”
“여전히 네 말은 잘 듣네. 장사를 손에 쥐고 주무르는 건 너밖에 못 할 거다.”
이리는 ‘내가 주물러지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도채리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 보부상은 시키지 않아도 척척 생수를 붓고 적색구인 껍질과 불고양이 털을 섞었다.
“왕은 세 후보 중에서 김도진을 가장 높게 치는 것 같더라고. 저승의 혼령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현무의 다람쥐는 너무 소심하대. 김도진이 가장 담대한 성격이라 왕 자리를 잘 버틸 거다- 라던데. 김도진 그 녀석 콧대만 높아질까 봐 얘기하기 싫었는데 마침 자리에 없어서 말해 주는 거야.”
“왕이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오늘 아침. 내가 너 만나러 간다니까 그러더라.”
임금님의 유일한 권속인 보부상은 진현계를 포함해 전 지역을 입장료 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세상을 방랑하던 도사였다. 선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진현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자유로이 온 세상을 누비다가 마침 인간계에 시찰 나온 왕과 만났다.
당시 진현계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문제로 불만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인간이 쓴 책, 저승에서 만든 거울, 극락에서 만든 도자기, 하늘꽃밭의 화초 화분이나 천지천해의 비단옷 등 갖고 싶은 건 많고, 살 덕도 충분한데 거래가 너무 까다로웠다.
이에 왕은 우연히 만난 껄렁껄렁한 젊은 도사에게 봇짐을 지고 전국을 떠도는 행상인 보부상이라는 직위를 주고, 제 권속으로 삼아 영생하게 만들었다. 보부상은 처음에는 동의 없이 권속으로 삼은 왕에게 화를 냈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을 것처럼 크게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은 본명을 버리고 보부상으로 잘살고 있다.
이리의 경우 이동이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꼭 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방문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보부상은 천지 사방팔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이리와 같은 ‘통로’ 능력은 없기에 주로 출입국장을 통해 다녔는데, 열 몇 시간씩 걸리는 거리도 지치지 않고 잘만 돌아다니는 게 이리는 조금 신기했다.
“아, 그리고 이 말도 했다. 김도진이 널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나쁜 일은 아니래. 과연 네 고요한 감정을 얼마만큼 흔들지 기대된대.”
이리가 이마를 꾹꾹 눌렀다.
“‘고요한 감정’ 얘기는 이제 좀 그만 듣고 싶어.”
“무슨 말이야?”
이리는 보부상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감정을 지나치게 억제함으로써 자연을 역행하고 있다’, 뭉용.
‘이리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왕.
‘선인님은 항상 고요한 분이니까’, 관조자.
‘그래도 사람이라고 감정에 변화가 있구나 싶어서’, 나비.
요 근래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들었던가. 이리의 투덜거림에 의외로 보부상은 웃지 않았다.
“네가 그렇긴 해. 감정 기복이 거의 없다, 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지. 사실인 걸 어떡하겠냐.”
“그만 듣고 싶다니까.”
이리가 눈살을 찌푸리자 보부상이 흠, 하며 턱을 쓸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누가 네 감정에 대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거든. 너는 짖어라. 나는 일할 테니. 이런 마인드잖아. 웬일로 신경을 써?”
“내가 그렇게 무심했어?”
“무심한 적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리 선인님. 오죽하면 사람들이 김도진이 선인님 짝사랑한다는 소식에 비웃음을 던지는 게 아니라 동정을 표했겠습니까.”
보부상의 놀림 가득한 존댓말에 이리는 닭살이 돋아서 팔을 쓸었다.
‘안녕하세요. 그쪽이 이리 선인이라고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
‘흠. 사실 제가 문하 선인이랑 친구 먹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문하 선인과 이리 선인이 친구라고 들어서요. 제가 선인님을 깍듯하게 대하면 족보가 무너질 것 같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시에도 이리에게 이렇게 무엄하게 대하는 자는 없었는데, 보부상은 아주 당돌했다. 그래서 이리도 흔쾌히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때 이후로 계속 말을 놓았기 때문에 보부상의 존대를 들으면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사실 네 고객들이 이리 선인은 다정하다고 할 때마다 대체 네 어디가 다정하다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 함께 포복절도해 주지도 않고, 함께 바닥을 뒹굴며 오열해 주지도 않고, 함께 쌍욕을 내뱉으며 분노해 주지도 않는 무정한 녀석의 어디가 다정하다는 건지.”
“이 얘기 그만하자. ”
이리의 입술이 조금 뾰족해졌다. 보부상이 희한하다는 듯 쳐다봤다.
“너 지금 삐쳤….”
지이잉- 타이밍 좋게 이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도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너네 짰냐,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보부상을 무시하고 이리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도진아.”
-스승님, 저 없이 잘 계세요? 너무 바쁘죠. 혹시 진상 고객 있으면 저한테 이르세요. 제가 영상 통화로 무시무시하게 화낼 테니까. 진상 고객 없어도 전화 거셔도 돼요. 참고로 저 지금 무지 잘생겼어요.
“무슨 일로 전화했어?”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우리 헤어진 지도 벌써 다섯 시간째잖아요.
“용건이 없으면 끊을게.”
-스승님! 꽃들 있잖아요. 꺾은 지 몇 시간까지 괜찮아요?
보부상이 이리의 대답을 가로챘다.
“다섯 시간이다. 넌 아직 이것도 모르냐?”
-뭐야. 보부상 형?
도진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그래, 나다.”
-아, 좀 조용히 있어요. 내 스승님 목소리 듣기도 바쁜데.
“이 건방진 자식이.”
-내 스승님이나 다시 내놔요. 스승님? 스승님?
저를 찾는 애타는 부름에 이리가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