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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나는 대여점 일이 바빠서.”
“그래. 네가 그렇지 뭐. 언제 또 기도식이나 한 번 더 열기를 바라야겠네. 그래야 궁을 리모델링할 거고, 그럼 나는 또 내 연회 참석을 조건으로 걸어야지.”
“…….”
“근데 두 번째 기도식이 열리기나 할까. 김도진이 엄청 질투할 거 아냐. 부리부리한 눈빛에 아주 질투랑 독점욕이 드글드글하던데.”
“나는 도진이 말고 제자를 들일 마음이 없어.”
“너는 예전에 전우치 때도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변했잖아. 네가 제자를 들였단 얘기에 진현계가 얼마나 난리 났는지 아니? 이리 선인도 사람이라고 감정에 변화가 있구나 싶어서. 그동안 누가 건드려도 파문조차 일지 않던 호수가 드디어 흔들리는구나 싶어서 말이야.”
이리는 제 감정이 유별나게 고요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싶었나 싶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장사의 힘이란 다른가 봐.”
씁쓸하게 중얼거린 나비가 문득 연못에 손을 넣더니 팔랑팔랑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흐트러트렸다. 수면에 작은 파동이 일면서 하얀 달이 일렁거렸다.
나비는 물방울이 튀는 대로 다 맞았지만, 이리는 넓은 소매로 물방울을 막았다.
머리칼이 젖자 나비는 오색빛깔 댕기를 끌렀다. 잿빛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리는 친구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지만 별다른 위로는 건네지 않았다.
“이제 가자. 활 다섯 발이야. 다 쏘기 전까지는 무조건 안 보내 줄 거야!”
“알았어.”
이리가 설핏 웃었다. 나비는 다시 손을 휘저어 세상을 밝은 낮으로 만들었다. 은은한 달빛 대신에 화창한 햇살이 연못을 내리쬐었으나 나비의 표정은 여전히 한밤중의 연못처럼 쓸쓸했다.
* * *
“와…….”
쟁반에 다과를 담고 상담실로 들어간 도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산 산신령 백액호가 어항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어항에는 정말 실한 크기의 황금 잉어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고객을 봤지만 어항에 담겨서 오는 고객은 처음이네요.”
“오랜만이군, 김도진. 그 약과가 바로 그 소문의 요리이기가 만든 것인가?”
“네.”
“갈 때 가져갈 테니 포장 좀 해 놓게.”
“참나. 오시자마자 심부름시키기 있습니까?”
“이제 익숙해질 때 되지 않았나.”
“사실 익숙해져서 이미 포장해 놨습니다. 갈 때 가져가세요.”
툴툴거려도 일은 잘하는 도진이 이리의 옆에 앉았다.
“스승님, 약과 좀 드세요. 이러다 고객들이 다 처먹겠어요.”
“도진아….”
“네, 말조심할게요. 좀 드세요.”
도진이 약과를 정성스레 잘라서 포크로 찍은 후 이리에게 내밀었다. 이리는 한숨을 내쉬며 그 포크를 쥐었다. 백액호가 피식 웃고는 동그란 어항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뽀글뽀글.
도진의 팔뚝만 한 튼실하고 큼직한 크기의 황금 잉어가 계속 입을 뻐끔거렸다.
끼우웅.
끼웅이는 상대가 어항 속에 있는데도 무섭다고 도진의 앞주머니에 숨어들었다. 도진이 혀를 쯧쯧 찼다.
이 황금 잉어는 백액호의 영역에 사는 요물인데, 요 근래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백액호는 안타깝게도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이리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이리 선인, 어떻게. 말을 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잠깐만.”
이리가 검지를 들어 황금 잉어의 이마를 부드럽게 두 번 토닥이고 손가락을 뗐다. 도진이 얼른 티슈를 꺼내 이리의 손가락을 닦았다. 이리는 제자에게 손이 잡힌 채로 말했다.
“이제 우리 모두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고민을 털어놓으렴. 대체 무슨 일이기에 요즘 먹이도 잘 안 먹고 울고만 있는 거야?”
“내 말을 알아듣겠소?”
황금 잉어가 뻐끔거리자 여든, 아흔 정도의 노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끼우웅?
의사소통이 되자 덜 무서워진 끼웅이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래. 모두 듣고 있어.”
“이것 참. 기가 막힌 도술이로군!”
백액호가 감탄하자 황금 잉어가 홱 몸을 돌렸다.
“오오, 신령. 내 얘기가 들리는가?”
“잘 들리네. 자네와 대화를 나눌 날이 올 줄이야.”
언어 체계가 달라 그동안 대화를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면서 백액호가 감개무량하게 어항을 감싸 안았다. 그사이 도진이 이리에게 속삭였다.
“스승님, 이 잉어분, 몇 살이에요?”
“200살 좀 넘었어.”
“아… 네.”
딴또리처럼 나이가 어려도 노인 목소리가 나올 때가 있으니 기대했건만 도진보다 한참 위였다.
백액호와 회포를 푼 황금 잉어는 어항 속에서 영차영차 뒤를 돌아서 이리에게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만나서 반갑소, 이리 선인. 나는 거울못에 사는 금서라고 하오. 산신령 덕분에 뵐 수 있어서 다행이오. 의사소통할 수단이 없어서 무조건 밥을 굶기를 잘했구만.”
“네 나이에 식음 전폐는 위험해. 다른 요물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 개구리나 두꺼비나…. 그들은 네 말을 알아듣잖아.”
“요 근래 인간들이 거울못의 개구리를 몽땅 치워 버리는 바람에. 아무튼 나도 힘들었소. 아무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역시 곡기를 견디는 건 힘들구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에 도진이 도술로 금서의 수명을 살폈다.
사흘 정도 남아 있었다.
“그래, 말해 보게. 금서. 대체 무슨 고민이 있는가? 설마 수명을 늘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런 종류라면 내가 이리 선인 볼 면이 없네만.”
“그럴 리 있겠소. 나는 인간으로서의 다음 생을 꿈꾸며 덕을 알뜰살뜰하게 모아 온 놈이요. 다만….”
황금 잉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기 방울이 포로록 피어올랐다.
“내가 선인을 만나고 싶어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 잠에 든 내 친구 와 때문이오.”
“와?”
이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백액호가 설명했다.
“지네를 말하는 것이로군. 본래 요물이었는데 지금 소영물 단계를 밟고 있소. 지금은 잠들었는데 아마 한 달 후 영물이 되어 깨어날 것이오.”
“지네랑 친구였다고…?”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이리가 놀라자 도진이 물었다.
“왜요? 지네랑 잉어가 친구이면 안 되나요? 혹시 천적 관계?”
“그게 아니라 지네는 보통 물을 싫어하거든. 연못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는 애들인데 용케 친구가 됐네.”
황금 잉어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지금까지 내내 축 처져 있었는데 이리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와가 요물로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소. ‘와’라는 이름도 내가 지어 줬지. 친구가 된 지 이제 180년이 되었군.”
저보다 까마득히 더 산 산신령도 이리에게 말을 높이건만 금서의 말투는 다소 편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도진만 뾰로통할 뿐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생각이 짧은 요물들은 본래 이리에게 말을 놓는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서로 어떻게 대화했습니까? 산신령님조차 금서 님 말을 못 알아듣잖아요.”
“어려서부터 같이 지낸 덕분에 와가 우리 말을 깨우쳤다네.”
마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동생을 자랑하는 듯한 말투였다.
“지네는 금방 자라 나보다 더 높은 존재로 성장했소. 그러나 그 녀석은 소영물이 된 후에 근방을 떠나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았소. 오히려 인간이 다니지 않는 밤에 위험한 연못가까지 내려와 나를 등에 짊어지고 바깥 공기를 쐬게 해 주곤 했소. 우리는 박물관의 구석구석을 누볐고, 서로의 모든 대소사를 함께하며 살아왔지.”
처음에는 그때를 회상하는 게 즐거운 듯 어항 속에서 계속 꼬리가 살랑거렸지만, 나중 되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듯 쓸쓸한 눈빛이었다.
“사실은 우리가 늘 사이좋게 지내진 않았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와도 나도 참 다혈질이거든. 쉽게 흥분하고, 충동적이고, 독선적이고, 속도 좁은 놈이오.”
“…….”
“그동안 정말 많이도 다퉜소. 우리가 싸울 때면 마치 절연할 것처럼 크게 싸운다오. 온 박물관 요물들이 다 알 정도지. 하지만 반드시 계절이 변하기 전에 화해했소.”
이리는 여기까지 듣고, 금서가 어떤 이물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녀석의 다리를 두 개나 동강 낸 적도 있었고, 그 녀석이 내 지느러미를 반절이나 뜯은 적도 있었지. 너무 살벌하게 싸우다 보니 주변 위아들이 뜯어말릴 정도였소. 드디어 누구 하나 죽기로 작정을 한 줄 알았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소. 하지만-.”
금서는 마치 너무 억울한 사람이 울분을 토하듯이 힘겹게 내뱉었다.
“우리는 반드시 화해했단 말이오…!”
“…….”
“이리 선인.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운 채로 계절을 흘려보낸 적이 없었소. 계절이 지나기 전엔 반드시 화해했소. 와는 목숨을 걸고 위험한 물가에 왔고, 나 또한 목숨을 걸고 두꺼비의 등에 타서 바깥나들이를 했소. 우리는 언제나 화해했단 말이오….”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도진 또한 금서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보름 전 나와 와는 크게 다퉜소. 연못가에 떨어진 목백일홍 꽃잎을 서로 내 것이라 우기다가 꽃잎은 인간에게 빼앗기고 우리의 우정에는 금이 갔다오.”
황금 잉어는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듯 어항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와는 박물관 2층으로 돌아가 잠에 빠져 버렸소. 평소라면,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후에 와는 일어날 테고. 우리는 여름이 지나기 전에 화해했을 테니까, 그랬을 테니까. 나는 잠에 드는 와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소. 그런데 내가….”
그런데 이 황금 잉어는 자신의 수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리 죽음은 불시에 닥치는 것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소? 나와 와는 180년을 다투고, 화해하고 그렇게 지냈소. 그런데 어찌 이 시기에, 이렇게 싸운 채로 내 생이 끝나야 한단 말이오.”
금서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죽음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다.
화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