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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은 유진의 이상한 취향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22호는 앞으로도 계속 식단을 유지하며 병약한 척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진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도진에게 술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도진은 대여점에 일찍 돌아가고 싶었지만,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기뻐하는 클라이언트와 술 한잔하고 퇴근하는 연출을 이리에게 보이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도진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영원히 짝사랑만 했을 겁니다.”
그냥… 짝사랑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이제 곧 새 연인이 탄생할 것 같아 기대되는군요. 22호 님.”
도진은 속마음을 숨기고 빙긋 웃었다.
둘은 서로에게 술을 따라 주고 함께 잔을 부딪친 뒤 한 번에 마셨다. 어차피 취하지 않지만 분위기를 내고자 하는 건배였다.
끼웅?
끼웅이가 호기심을 보이며 술잔을 핥았다.
끼우웅!
맛이 없어도 심하게 없었다! 잡귀는 배신당한 듯 폴짝 뛰고는 테이블을 이리저리 굴렀다.
“미성년자는 노담, 노술 몰라? 너는 이거나 마셔.”
도진이 끼웅이용으로 시킨 복숭아 음료를 술잔에 따랐다.
끼우웅.
복숭아 음료의 맛을 알고 있는 끼웅이 다급히 달라붙어서 춉춉춉 핥아 마셨다.
“도진 씨, 우리 고작 200살 차이인데 말 편하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말 놓고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요.”
“그럼 나야 좋지.”
바로 수락한 도진이 덧붙였다.
“그런데 형, 나 사실 일호랑 서로 말 놓은 사이야.”
“그랬어?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했나. 그럼 내가 형이라고 불러야겠군. 도진 형.”
진현계 족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두 사람이 일주일간의 고군분투기를 떠들었다. 그 고군분투기가 오늘, 대성공의 결말을 맞이했으므로 활기가 넘쳤다. 조도가 낮은 주점 조명에도 보일 만큼 22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짝사랑 난이도가 엄청나게 빡셌어. 하지만 결국 이뤄 냈지. 도진 형 덕분이야.”
“난이도가 빡세다고 해 봤자 뭐 나보다 빡셀까.”
“왜. 너는… 아.”
22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자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야. 내 짝사랑 상대 알아?”
“이리 선인님이시잖아. 처음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형이랑 같이 시간 보내면서 진실이라는 걸 알았어. 빡세도 너무 빡세. 나 같으면 포기했다.”
“젠장. 나비 선인님은 소문을 퍼뜨리려면 짝사랑이 잘 성사되고 있다는 것까지 퍼뜨리시지 좀. 그 소문 때문에 기도식 때 다들 날 불쌍하게 보고 갔어.”
“잘 성사되고 있다고?”
“그래. 내 기준으로는.”
“…어쩌다가 선인님을 좋아하게 된 거야?”
“너는 어쩌다가 유진 님을 좋아하게 됐는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똑같은 질문으로 받자 22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맞아. 감정의 조화는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지. 아무튼 힘들겠어. 짝사랑 상대를 보지 못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짝사랑 상대와 하루 종일 함께하는 것도 고역 아닌가?”
“나는 스승님이랑 함께하는 게 좋아. 고역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말하다 보니 보고 싶네. 이만 일어날까.”
“우리 여기 온 지 10분 지났어. 진정해.”
“잠깐 영상 통화 좀 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도진이 핸드폰을 꺼냈다.
끼웅!
이리 선인과 전화하려는 걸 알아챈 끼웅이가 허둥지둥 도진의 어깨로 올라갔다. 이리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화면에 작고 하얀 얼굴이 떠오르자 도진이 헤벌쭉 웃었다.
“스승님.”
-응, 도진아.
“스승님. 저 일 잘 끝냈어요. 성공했어요. 이제 곧 저승에 또 하나의 연인이 탄생할 거예요.”
-정말 다행이네. 성공한 거 축하해. 거긴 어디야? 술집?
“네. 22호가 고맙다고 술 사 준대서 마시고 가려고요.”
-끼웅이는 집에 보내지. 아직 어리잖아.
“걱정 마세요. 술 안 먹여요. 이것 보세요.”
도진이 복숭아 음료를 잠깐 비치고는 다시 제 얼굴을 담았다.
“끼웅이한테는 달달한 주스 시켜 줬어요.”
-잘했어.
끼웅. 끼우웅.
-그래. 끼웅이도 일주일 동안 수고 많았어.
“스승님, 22호가 그러는데 제가 스승님을 짝사랑한다는 소문이 전 세계에 퍼졌대요.”
전 세계라는 말은 안 했는데, 22호가 중얼거렸지만 도진은 무시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요? 당연히 안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겠죠? 절 불쌍하게 여기고 있겠죠? 한 치 앞만 보는 바보 같은 사람들.”
-도진아. 22호랑 즐거운 얘기 나누고. 시간이 늦었으니까 바로 집으로 퇴근해. 나는 지금 화로 보는 중이라 끊을게.
“스승니임, 화로 작업은 제가 가서 한다니까요.”
-안녕.
도진이 애교 섞인 말투로 붙잡았지만 이리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도진은 이리가 이럴 줄 알았기에 통화가 끊기자마자 평소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돌아와 화면을 껐다.
“도진 형, 나 대할 때랑 이리 선인님 대할 때랑 언행이 달라도 너무 다른 거 아니야? 혹시 이중인격이야?”
“맞아. 나는 내 스승님께는 다른 사람이 돼. 착하고 귀여운 도진이야.”
도진이 비아냥을 당당하고 뻔뻔하게 받았다. 22호가 하하하 크게 웃었다.
“형, 진짜 재미있는 사람이었네. 좋았어. 혹시 나중에 임금님 자리 두고 선거 시작하면 형한테 투표한다. 그 염병 커플한테는 비밀이야.”
“고마운 말이긴 한데.”
도진은 핸드폰에 달라붙어 울고 있는 끼웅이를 털어 냈다.
“투표 같은 거 안 해. 스승님이 진현계 왕은 투표로 안 뽑는다고 하셨어.”
“아, 그래? 그럼 어떻게 뽑아?”
“스승님도 모르신대.”
“그게 뭔 소리야? 이리 선인님이 모르면 세상 누가 알아?”
22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처음 들었을 때 도진의 반응도 이와 비슷했다.
‘왕 선출 방식을 모른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임금님이 몇 대 임금님이지?’
‘3대요.’
‘맞아. 초대 이래로 아직 왕이 두 차례밖에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선출 방식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어.’
‘지금까지는 어떻게 뽑았는데요?’
이리의 설명으로는 이렇다. 초대 왕은 태고의 선인이었다. 그자는 자연스럽게 왕이 되어서 태초부터 1만 년 전까지 긴 시간을 다스리다가 당시 유행을 따라 영면에 들기로 결심했다.
부랴부랴 왕 후보들을 모집하니 무려 스무 명이 넘었다. 1년간의 유세 활동 후 공정성을 위해 투표로 뽑기로 했는데, 그 1년간 하나둘씩 각자만의 이유로-‘임금님이 되면 귀찮을 것 같아서’, ‘가족이 생겨서’, ‘여행하고 싶어서’, ‘건강이 안 좋아져서’, ‘마음이 바뀌어서’-후보에서 내려가더니 즉위식이 열릴 때쯤에는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당연히 그 한 명이 2대 왕이 되었다.
2대 왕도 5천 년간 진현계를 다스리다가 이제 막중한 책무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왕위에서 내려오겠다고 선언했다. 다양한 갈래에서 왕 후보를 모으니 열 명쯤 되었다.
2대 때와 마찬가지로 1년의 유예 기간을 뒀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일하기 귀찮아졌다’, ‘나는 부족할 것 같다’, ‘몸이 아프다’ 등 다양한 이유로 한둘씩 사퇴하더니 마지막 날에는 딱 한 명만 남았다.
그자가 3대 왕, 바로 지금의 임금님이었다.
“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누가 협박이라도 한 게 아니고서야.”
도진의 설명을 들은 22호가 도진도 가졌던 의심을 내뱉었다.
“협박도, 정신 조종도 없었대.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대. 신기한 일이지. 그래서 이번에도 자연스레 한 명만 남지 않을까 하시더라고.”
“그래서 일호 님이랑 홍연이 대놓고 염장 짓을 한 거구나. 투표가 아니니까 우리한테 잘 보이지 않아도 됐던 거야. 젠장.”
22호는 일호와 홍연의 연애질이 대단히 싫었던 모양인지 계속 그 사안을 언급했다.
“도진 형은 절대로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가서 꼭 임금님이 돼. 그래서 저승에서 연애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만들어 줘.”
“그러면 너도 연애질 못 하는데?”
“아, 맞네. 취소할게. 아무튼 절대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가서 임금님이 되라구.”
“당연하지. 왕 되면 당장에 뜯어고칠 규율이 몇 개인데. 절대 포기 안 해. 무조건 왕이 될 거야.”
도진이 이를 박박 갈았다.
그는 절대로 이전의 후보들처럼 사퇴할 마음이 없었다. 반드시 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리 만물 대여점의 과중한 업무부터 어떻게든 덜어 내야지.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이 더욱 부리부리해졌다.
이 결심에 반전이 있을지 없을지 아직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19. 오랜 친구
나비 선인의 궁궐은 언제나 화려하다. 기도식이 끝난 후 원래의 수수하고 고즈넉한 곳으로 돌아온 이리의 들꽃궁과는 달리 나비의 궁궐은 매일매일 기도식인 듯 호화로운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연회가 거의 매일 열리는 탓이다.
게다가 오늘 연회에는 이리 선인도 온다는 소식에 다들 눈에 띄는 화려한 복장으로 왔다. 이리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그래서요, 선인님. 제 궁에 상수리나무를 심을까 해요. 대여점에 있다는 아주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본떠서요.”
“제 용마도 이리 님과 같은 색으로 바꾸고 싶어요. 이리 님의 용마는 무슨 색이에요?”
“선인님은 주로 뭘 드세요?”
“이리 선인님, 이게 요즘 인간계의 옷차림인가요? 생각보다 진현계랑 비슷하네요.”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죄다 이리의 곁에 몰려들어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이리는 선인들 사이에서도 전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리가 하는 건 죄다 따라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이었다.
“선인님, 그 팔찌는 어디서 사셨어요?”
한 명이 이리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이리는 손을 굳이 빼지는 않았다.
“이건 인간의 몸을 유지하게 해 주는 이물이야.”
“와아아. 정말 신기하네요. 어디서 딱 선인님께 필요한 이물이 탄생했대요?”
“그러게.”
“정말요. 어디서 찾으셨어요?”
대충 넘어가려고 했는데 끈질기게 물었다. 이리는 이 검은 실팔찌 이물을 어디서 찾았는지를 떠올렸다.
‘이리. 이게 너한테 필요할 거야.’
손바닥 위에 올려진 팔찌.
생각해 보니 그때는 이런 형태가… 아니지 않았나? 그때의 기억을 좀 더 선명하게 떠올리려는데 어째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