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08화 (10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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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조심 좀 해. 사람 다칠 뻔했잖아!”

“으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캐치볼을 하던 학생 둘이 후다닥 달려와 사과했다.

“사람한테 맞지 않도록 조심히 던지고 놀아라. 알겠냐?”

“네, 형님!”

“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녀석들이라 더 성질낼 수 없었던 도진이 공을 돌려주고 다시 앉았다.

“하, 씨. 어린 것들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어디까지 얘기했죠, 스승님? 저 스승님 다치는 줄 알고 너무 놀라서 까먹었어요.”

“어…….”

이리는 눈을 빠르게 두어 번 깜빡이다가 말했다.

“상대의 이상형이 22호와 정반대라서, 너희도 나름대로 열심히 뭔가 하고 있다고.”

“아, 맞다. 병약미를 위해서 지금 다이어트 시켜 놨거든요. 이해자 님이 자주 가는 미용실에 예약도 잡아 놨고, 도희한테 말해서 요즘 유행하는 남친룩도 선별해 놨고. 드라마랑 영화 보면서 병약미 넘치는 캐릭터 대사도 연구하고 있어요. 내일모레까지 완벽하게 시뮬레이션 돌려서 소개팅 내보낼 거예요. 제 첫 개인 의뢰 성공적으로 해낼 테니까 스승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도진이 주절주절거렸다. 이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안정을 찾은 잔챙이들이 뀨우뀨우 울며 이리의 손 밑에서 배를 발라당 까 보였다. 다시 쓰다듬어 달라는 뜻이었는데 이리 선인은 어째서인지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이리는 까만 실팔찌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스승님에게 일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어필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이리의 발개진 귓가는 눈치채지 못한 도진이었다.

* * *

저승사자 22호는 일주일간 극한의 다이어트를 했다. 보통은 다이어트를 하더라도 필수 영양소는 챙기는데, 22호는 어떻게든 병약해 보이고자 그조차 섭취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물을 마시고, 배가 아플 정도로 고프면 물을 마시고, 이러다 영원히 소멸하겠구나 싶으면 그때서야 양배추를 한 장 뜯어 먹었다.

저승의 구내식당 음식이 형편없었기에 다이어트도 어렵지만은 않았다. 소개팅 전날, 15kg을 감량하여 188cm에 73kg을 찍었다.

그에 맞춰 겉모습도 달라졌다. 짧은 머리칼은 도진이 빌려준 이물 ‘깃털 연고’를 바르자 요하 만큼 찰랑거리는 긴 머리칼로 자랐고, 이해자 신령이 소개한 미용실에서 옅은 갈색 머리칼로 염색도 했다. 하나로 묶은 머리를 몸 앞쪽으로 내리자 그린 듯한 ‘단명 헤어’가 탄생했다. 이러한 헤어스타일을 한 만화 속 인물은 늘 단명한다 해서 붙어진 이름이었다.

겉모습은 어떻게든 병약미청년스러워졌으니 이제 언행만 조심하면 되는 상황.

소개팅 전날, 둘은 대여점 정원에 모여 마지막 수련을 진행했다.

“어깨는 촘 더 움츠리고, 눈꺼풀은 내리까시고. 어허, 어디서 손에 힘을 줍니까? 힘없이 늘어뜨리랬죠!”

마지막 수련이란 바로 대여점 정원에서 병약미청년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누, 눈 최대한 내리깐 건데요.”

“그래요? 속눈썹이 왜 그렇게 짧습니까? 속눈썹 그늘이 드리워져야 하는데.”

“제 속눈썹은 평균 길이라고요!”

22호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실 도진은 이리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익숙해져 있어서 기준이 하늘을 찔렀다.

“본인 속눈썹이 이렇게 짧으면 진즉 말씀하시지. 당장 어디서 속눈썹 연장술을 받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안 짧다니까요!”

“아, 그럼 이런 스토리로 가시죠. 신체의 털이 빠지는 병이 걸린 설정으로….”

“그건 병약미가 아닌데요?”

“지금 목소리도 너무 우렁찹니다. 좀 더 미약하게. 목소리를 떨면서 다시 대꾸해 보세요.”

“그, 그건 병약미가 아닌데요?”

“조금 더 목소리 볼륨 줄이시고, 애처롭게 말해야죠.”

22호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그, 그근 븡윽므그 으는드으.”

누가 봐도 분노를 참는 말투였다. 도진이 팔짱 낀 채 건들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연기 정말 못하시는군요. 이래서야 짝사랑을 쟁취할 수 있겠습니까? 자, 끼웅이 시범!”

탁자 위에 앉아 있던 끼웅이가 갑자기 이마일 법한 부위에 손을 얹더니 가녀린 신음을 흘렸다.

끼우우웅….

“이렇게 내란 말입니다. 잡귀도 하는 걸 왜 못해요? ‘아아, 머리가 갑자기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서…’ 대사 읊습니다. 실시.”

22호가 이를 꽉 깨물었다. 확 엎어 버릴까 했지만 상대는 장사고… 짝사랑의 이상형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이 정도 수모는 참아야 했다.

“아아, 머리가 갑자기 어지럽고….”

“다시!”

“아아, 머리가 갑자기….”

“다시!”

해가 지자마자 시작된 도진의 혹독한 조교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병약미 훈련이 정원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대여점 고객들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선인님, 김도진과 저승사자가 뭘 하는 중입니까? 저승사자가 큰 잘못을 했습니까?”

“선인님, 선인님의 제자가 미친 모양입니다. 제가 대신 직원 하면 안 되나요?”

“이리 선인, 저승사자를 고문하고 있소? 진현계 왕 후보 자리를 두고 드디어 저승과 전쟁을 시작한 거요?”

그때마다 이리는 난감하게 웃으며 개인 의뢰 중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대여점의 마지막 고객이 나간 후에도 22호는 말투 하나 완벽하게 교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계속 말투만 연습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이제 동작 들어가겠습니다.”

“동작이라면…?”

“김끼웅, 시범.”

도진과 똑같은 자세로 건방을 떨고 있던 끼웅이가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시범을 보였다.

약속 상대를 만나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천천히 다가가다가 갑자기 이마에 손을 얹으며 쓰러진다. 그러고는 놀란 상대에게 한 떨기 백합 같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늘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이봐요. 그림자 잡귀잖아요. 표정이 전혀 안 보입니다만.”

“마음의 눈으로 보세요.”

“…….”

22호는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손목 각도가 틀렸잖아요. 다시.”

“쓰러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다시.”

“좀 더 아련한 표정을 지어야죠. 속눈썹 그늘을 드리우면서… 아, 속눈썹이 짧았죠. 미안합니다.”

22호는 이쯤 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인어 공주처럼 쓰러져 있던 그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평생 거칠게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병약미청년 흉내를 내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도진 씨가 직접 해 보세요!”

도진은 눈썹을 씰룩이더니 하, 하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짝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난쯤은 극복해야죠. 나라면 수백 번, 수천 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 보라니까요?”

22호가 재차 도발하자 도진이 팔짱을 풀었다.

“정 원한다면 시뮬레이션을 돌린다고 생각하고 완벽한 시범을 보여드리죠. 여기 앉으세요. 22호 님이 유진 님이라고 생각하고요.”

도진이 피크닉 테이블을 가리켰다. 22호가 하얀 의자에 앉자 도진은 멀찍이 이동했다.

22호는 나름대로 유진 입장에서 연기하며 상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도진이 투명 문을 열면서 입장했다.

“이럴 수가…!”

22호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김도진은 키 193cm, 몸무게 87kg, 아직도 성장 중인 장사인데, 들어오는 발걸음이나 문을 여는 손길, 내리깐 눈꺼풀과 살짝 벌린 입술 등이 너무나도 병약해 보여서 당장이라도 부축하고 싶게 만들었다.

도진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다가,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손바닥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아, 오랜만에 햇살 아래에 섰더니 머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옆으로 천천히, 마치 슬로 모션을 건 것처럼 아련하게 쓰러졌다.

“김도진 씨!”

22호가 얼른 일어나 도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부축했다. 육중한 바위를 든 듯 무거웠지만 환자를 내팽개칠 수 없어서 참았다.

“괘, 괜찮습니까? 너무 오래 소리 박박 지르고 화만 내서 어지러운가 봅니다. 그러니까 좀 성질 좀 작작 부렸어야죠. 솔직히 이건 업보입니다.”

그때 김도진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연기하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

도진의 연기에 홀딱 몰입했던 22호는 그의 연기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자신의 두 팔이 불쌍해져서 바로 힘을 뺐다. 뒤로 쓰러져야 마땅하나 도진은 쓰러지지 않았다. 엄청난 코어 힘으로 아무렇지 않게 버티면서 계속 자기처럼 메소드 연기를 하라고 잔소리를 늘여놓는 그때였다.

끼우웅!

끼웅이의 외침에 도진과 22호가 고개를 돌렸다.

“스, 스승님!”

도진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리가 차와 주전부리를 들고 오다가 못 볼 꼴을 봤다는 얼굴로 서 있었던 것이다.

“어…. 그, 음. 열심히 해. 화이팅.”

“스승님! 오해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저 새끼랑 스킨십 따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도진이 돌아서는 이리를 급히 따라갔다. 졸지에 저 새끼가 된 22호가 사제 지간의 대화를 구경했다.

“오해인 거 당연히 알지… 계속 수련하렴….”

“당연히 아시는 분이 왜 저랑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데요?”

“아니, 그냥…. 네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왠지 병약한 다른 사람 같아서….”

“저 도진이에요. 안 병약해요. 스승님의 김도진이에요.”

도진이 이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리는 도진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비스듬히 돌렸다. 도진은 크흑, 비탄 어린 탄식과 함께 소리쳤다.

“젠장.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게 하나도 없이 다 완벽하게 해내서 스승님을 어색하게 만드는 건지…! 왜 처음 해 본 연기조차 완벽하냔 말이야…!”

22호는 피크닉 테이블을 김도진에게 던져 버리고 저승으로 튀고 싶었지만, 유진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참았다. 짝사랑을 이루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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