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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04화 (10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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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는 이석진의 신체에 영향이 갈까 봐 주술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작은 잡귀를 살리는 게 급선무였다.

한수가 두 손가락을 모으고 허공에 점을 찍었다. 그 점에서부터 비스듬하게 선을 긋자 칼날 같은 바람이 배리모스에게 날아갔다. 배리모스는 고개만 쓱 돌려 피했고 바람이 거실의 TV를 깨뜨렸다. 한수는 곧장 손을 위로 쳐들었다. 배리모스의 위에 거대한 바위가 떠올랐다.

“자, 잡귀를 놓, 지 않으면, 이, 이 바위를 더, 던질 거야.”

“제법 묵직한 바위네. 여기에 깔리면 이런 몸뚱이는 바로 짓뭉개지겠는걸? 한번 던져 봐.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배, 배, 리모스. 제, 제발.”

“제발 뭐?”

“자, 잡귀를. 사, 살려 줘….”

“그럼 바위를 던지라니까? 이 몸뚱이인지 아니면 이 불쌍하고 가여운 어린 잡귀인지 선택을-”

배리모스가 말을 멈췄다. 그의 푸른 시선이 한수의 뒤쪽으로 향했다. 한수가 돌아보자 이아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눈동자에 두려움과 절망, 분노가 가득했다.

“…씨발.”

배리모스는 거칠게 욕을 내뱉고는 잡귀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한수가 얼른 주술로 바구니 형태의 공기 주머니를 만들어 끼웅이를 받아 냈다.

“구질구질한 새끼들. 가서 물이나 떠 와.”

배리모스가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다행히 잡귀에게 관심이 사라졌는지 언제부터 있었느냐, 왜 들였느냐 캐묻지 않았다.

악신은 리모컨으로 TV를 켜려고 했다가 TV가 부서진 것을 알고 또 한 차례 욕했다. 허공에 손을 휘젓자 부서진 파편들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하나로 뭉쳐졌다. 단 몇 초 만에 텔레비전이 원상 복구되었다.

한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언제 봐도 기함할 능력이었다.

과연 이리 선인이 배리모스를 능가할 수 있을까?

역시 부질없는 희망은 버리는 게 맞다.

“야, 내 말 안 들려? 물 떠 오라고!”

“아, 알았어. 바, 바로 떠, 올게.”

한수가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보고 있던 아진이 한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수가 끼웅이를 아진의 손에 넘겼다.

아까는 이 그림자가 몰랑몰랑하고 따뜻했는데, 지금은 차갑고 딱딱했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이 천적 앞에서 잔뜩 겁먹은 어린 동물 같았다. 아진은 경직된 끼웅이를 조심히 쥔 채 현관 복도로 향했다.

“미안해. 무서웠지.”

아진이 현관문을 조금 열어서 그 사이로 끼웅이를 내보냈다. 꽁꽁 얼어붙었던 끼웅이가 고개만 살짝 들었다. 아진은 어쩐지 표정이 보이는 것 같은 암인의 동그란 머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어깨를 조금 넘은 갈색 곱슬머리가 스르르 흔들렸다.

“이제 얼른 가.”

끼웅…….

“미안.”

아진은 재차 사과하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거실로 돌아오니 한수가 물병을 든 채 배리모스의 앞에 서 있었고, 배리모스는 긴 다리를 꼬고서 TV를 보고 있었다.

“빨리 깨어났네?”

“어. 누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더라고. 귀가 간지러워서 잠들 수가 있어야지.”

배리모스가 아진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너넨 내가 더 잤으면 좋겠지?”

“그걸 질문이라고 해?”

“도대체가 너는 겁을 낼 줄을 모르는군. 만인사도 떠났는데 뭘 믿고 이러지?”

“만인사도 떠났으니까 내 몸으로 와. 영안도 없는 우리 오빠 몸이 아니라!”

“지금 나한테 큰소리쳤어?”

“그래! 큰소리쳤다. 짜증 나면 내 몸에 와. 내 몸에 와서 나를 괴롭히란 말이야!”

“하…. 오냐오냐해 주니까 무서운 줄 모르고.”

“아, 아진아. 그, 그러지 마. 배, 배리모스. 참아. 미, 미안해. 아, 아진아. 드, 들어가자. 으, 응?”

배리모스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일어나자 한수가 얼른 아진을 말렸다. 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수가 없었다면 뭐라 더 쏘아붙였겠지만, 겁 많고 소심한 오빠의 심장의 안전을 위해 오늘은 이 정도로 하기로 했다.

아진과 한수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배리모스는 소파에 길게 드러눕고는 TV 볼륨을 크게 키웠다. 그러자 아진의 침실에서 베개를 후드려 패는 소리가 났다. 성질이 대단한 인간이었다.

“…정말 닮았어.”

혼자 중얼거린 그가 TV를 끄고 일어났다. 어둠에 휩싸인 한강에 보름달이 홀로 떠 있었다. 검은 수면과 하얀 달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시린 한기가 감돌았다.

음기는 충분히 모아 뒀다. 그러나 사역마를 잃은 건 정말 뼈아픈 일이었다. 역시 또 다른 사역마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계획대로 다음 단계를 진행해서….

그래, 우선 그곳으로 가자. 마경(魔境)도 아니고, 하계(下界)도 아니면서 이상하리만치 음기가 가득하다던 그곳에…….

잠들었던 시간 만큼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그가 세상에 태어난 단 하나의 이유였다.

* * *

끼웅이는 터덜터덜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경직됐던 몸은 좀 풀렸으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까 그자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밖은 역시 무서운 곳이다.

이제 어딜 가서 잔단 말인가?

대여점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 밤에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단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겨야 했다. 수리부엉이, 길고양이와 비둘기, 들쥐 등 위아가 아니더라도 위험한 동물은 많다.

끼웅이는 그나마 인간 곁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단지 입구의 불 켜진 경비실로 향했다. 쿨쿨 자고 있는 경비 아저씨의 몸을 힘겹게 타고 올라가 데스크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아까는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잘만 나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자네, 대여점의 조수가 아닌가?”

저번 달에 이물 반납 건으로 대여점을 찾았던 잼도리 고객이었다. 언뜻 보면 고양이처럼 생겼으나 사실을 네 발을 넓게 펼쳐서 하늘을 날 수 있었다.

끼웅! 끼우웅! 끼웅!

끼웅이가 창문에 몸을 비벼 댔다.

“허허. 왜 이런 곳에 있을꼬. 이보게, 창문은 통과하기 어려운 듯하니 문틈으로 나오게나.”

끼웅!

끼웅이가 굴러떨어지다시피 바닥에 내려와 허겁지겁 문틈을 기었다. 다행히 잼도리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왜 와 있는 건가?”

끼우웅…. 끼웅.

가출을 했는데, 이젠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밤이 너무 늦어서 위험해서 가지 못하고, 혼자서 울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뜻을 전한 끼웅이가 간절하게 잼도리를 바라봤다.

“저런…. 하긴 어린아이 혼자 밤길을 가기엔 대여점이 이곳에서 거리가 있긴 하지.”

끼웅….

“자, 내 등에 타게나. 내가 데려다주겠네.”

끼우웅!

잼도리가 끼웅이를 위해 자세를 낮춰 줬다. 끼웅이는 눈물을 흩뿌리며 올라탔다. 요괴가 하늘로 비상했다.

밤하늘의 노란 달,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이나 야경 같은 걸 구경했다면 좋았겠지만 끼웅이는 저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잼도리의 깃털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대여점 대문 앞에 도착했다.

“자, 다 왔네. 이제 들어가게나.”

끼우웅.

“고마워할 것 없네. 나도 대여점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 기회에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겠지?”

너무 잘 알았다. 악신한테 죽을 뻔했으니까.

“앞으로는 집 나오지 말고 잘 지내게나. 이리 선인에게 내가 도와줬다고 얘기해 주면 좋고. 하하하!”

잼도리가 네 발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끼웅이는 잼도리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대여점의 문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담벼락 밑에 가지런히 정리된 장독대와 달빛을 쬐고 있는 고즈넉한 정자. 항상 든든하게 대여점을 지켜 주는 상수리나무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자그마한 연못을 보고 있자니 또 왈칵 눈물이 나왔다.

끼웅!

헤드라이트 불빛을 반짝이는 용마에게 달려갔다.

[.·´¯`(>0<)´¯`·. ] 끼우우웅. [.·´¯`(>_<)´¯`·. ] 끼우우웅. 그렇게 울면서 해후를 나눈 후 드디어 대여점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켜져 있는 1층 작업대 위의 노란 불빛이 유난히 따스했다. 끼우웅!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내가 왔다고 소리쳤는데 반응이 없었다. 1층과 2층을 샅샅이 뒤져도 이리와 도진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날 찾으러 간 거야! 저 위험한 밖에서 날 찾고 있는 거야! 끼웅이는 둘에게 내가 돌아왔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또 나갔다가 괜히 길이 엇갈릴지도 모르고… 밖은 춥고… 졸리고… 들쥐랑 고양이랑 무서운 잡귀들이랑….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로 나가지 않기로 했다. 메모나 남겨 놓기 위해 작업대 위로 올라갔다. 끼웅!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종이가 구겨졌다. 그 종이는 바로 이리가 남겨 놓은 메모지였다. 안타깝게도 편지를 보지 못한 끼웅이가 낑낑거리며 연필을 들고 종이에 메시지를 남겼다. 온 힘을 다해 네 글자를 남긴 끼웅이는 그대로 엎어졌다. 끼웅……. 몸이 너무 피곤하고 졸리다. 이리 선인은 아기는 많이 자야 한다고 했는데 벌써 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끼웅이는 2층에 올라가지 않고 그냥 여기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러면 이리와 도진이 돌아왔을 때도 더 빨리 발견할 것 같았다. 끼웅이가 몸을 말고 연필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 이리와 도진이 도착한 건 끼웅이가 잠들고 한 시간 후였다. 어스름하게 동이 틀 무렵 정원에 진현계와의 문이 생기고, 이리와 도진이 나오자 바로 문이 사라졌다. “그냥 어련히 잘 놀다 왔겠죠. 뭐가 그렇게 불안하시다고.” 둘은 예정보다 일찍 대여점으로 돌아왔다. 이리가 갑자기 끼웅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백호 가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빨리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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