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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진이 여동생 이아진을 데리고 나왔다. 잠옷 차림의 아진은 까맣고 작은 그림자 귀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빠. 그게 뭐야? 귀신? 귀신 아니야?”
“귀, 귀신 아니야. ‘위아’야. 기, 길가에서 헤, 매고 있어서. 데리고 왔어.”
“나쁜 애 아닌 거지?”
“으, 으응. 차, 착한 애야.”
“여기 뭔가가 있어?”
한수, 아진과는 달리 영안을 갖지 못한 이석진이 물었다.
“작은 그림자 같은 위아가 있어.”
“나도 보고 싶은데.”
“아, 자, 잠깐만. 부, 부적 가지고, 올게!”
한수는 얼른 방에 들어가 오로 석영지로 만든 빈 부적에 ‘일시적으로 영안을 트이게 하는 주술’을 그려 넣었다. 배리모스는 한수에게 여러 개의 주술을 알려 줬는데, 가장 먼저 알려 준 것이 이것이었다.
한수가 부적을 갖고 오자 이석진은 익숙한 듯 눈을 감았다. 한수는 이석진의 눈앞에서 부적을 흔들었다. 눈송이 같은 하얀 가루들이 이석진의 눈꺼풀에 스며들었다.
다시 눈을 뜬 석진은 정말 귀엽고 작은 그림자 위아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위아도 있구나. 신기하다. 안녕? 나는 이석진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끼웅!
“끼, 끼웅이야. 이, 이름.”
“형은 이 아이랑 말도 통해?”
“그, 그건 아닌데.”
한수는 이리 선인과 김도진이 이 위아를 ‘끼웅이’라고 부르는 걸 들어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석진과 이아진에게는 이리 선인을 만났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혹시라도 이리 선인이 자신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을까 봐. 그래서 그 희망이 지금은 잠들어 있는 배리모스를 거슬리게 만들까봐 영원히 함구할 생각이었다.
“부적 없이도 이런 존재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형이랑 아진이처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석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아진과 한수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석진은 어렸을 때부터 이 신비한 존재를 보고 싶어 했다.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었다.
이아진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는 진짜 귀엽다. 잡귀겠지? 만인사가 위아에는 갈래가 있다고 했잖아. 이 애는 잡귀 갈래인 게 분명해. 나는 다른 갈래들은 흐릿하게 보이는데, 잡귀나 잡신 계열만은 선명하게 보이거든.”
이아진이 끼웅이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끼웅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후다닥 한수의 손바닥 아래로 달려갔다. 고작 건드린 것뿐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눈물까지 퐁퐁퐁 쏟아 내고 있었다. 한수가 파르르 떠는 끼웅이를 소중하게 감쌌다.
“거, 겁이 많아.”
“진짜. 오빠랑 닮았어. 미안, 끼웅아. 이제 안 건드릴게.”
끼우웅….
이아진이 웃었다. 옆에서 이석진도 함께 미소 지었다.
셋은 떡볶이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 날씨가 좋다로 시작해서 이제 곧 바빠질 이석진의 촬영 스케줄, 새로 제작 주문한 한수의 의수, 이제 무당이 아니게 된 이아진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 등등 이야깃거리가 끊임없었다.
한동안 마주치기만 하면 울기만 했던 시간이 있었는데, 서로를 원망하며 독기 어린 말을 내뱉을 때도 있었는데, 배리모스가 잠든 덕분에 셋은 이제 한가한 시간에는 떡볶이를 함께 먹으며 웃을 수도 있었다.
그 악신이 눈을 뜨면 끝이 날 시한부의 행복이란 걸 모두가 알았지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 그들은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이 잡귀 말이야.”
떡볶이를 다 먹고 후식으로 체리와 배, 포도를 먹을 때쯤이었다. 이석진이 한수에게 꼭 달라붙은 채 포도 한 알을 갉아 먹는 끼웅이를 보며 말했다.
“분명 눈, 코, 입이 없는데 어디로 보고, 어디로 먹는 걸까? 아까는 어디에서 눈물이 나왔던 거고. 안구가 없다는 건 눈물샘도 없다는 뜻인데 대체 눈물이 어디서 솟아난 거야?”
“그, 글쎄….”
“이 아이가 먹은 떡볶이가 몸보다 더 컸단 말이야. 그게 다 어떻게 소화가 된 걸까. 배설은 어떻게 하지? 한번 안을 까서 소화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
끼, 끼웅!
끼웅이가 갉아 먹던 포도를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한수의 소맷자락으로 숨었다. 그것도 부족해 그림자로 변해 소매의 그림자 안에 스며들었다. 이석진이 감탄했다.
“방금 봤어? 그림자로 변한 거.”
“으, 응. 봐, 봤어.”
“아진이, 너는?”
“응, 봤어.”
이석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형이랑 아진이는 이런 신기한 광경 자주 봐서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나는 너무 신기한데….”
아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도 신기해. 근데 오빠처럼 소화 기관까지 궁금하진 않은 거지….”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어…?”
“우리는 사과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면 그냥 사과가 떨어졌구나, 하는 사람들이야. 오빠는 왜 사과가 아래로 추락하는 거지? 하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고. 결이 달라.”
“그림자로 변하는 건 사과가 떨어지는 거랑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 않아?”
“우리한텐 그거나 그거나야…. 그냥 그림자로 변할 수 있게 태어난 존재구나 할 뿐.”
이아진이 열심히 설명했으나 이석진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한수가 나직하게 웃자 이석진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예, 예전 생각이 나서…. 너, 너는 예전부터 호, 기심이 많았어.”
“맞아. 옛날부터 그랬지. 한수 오빠랑 내가 우리가 본 것들을 스케치북에 그리면 오빠는 ‘몸 전체가 단단한 각질판에 둘러싸여 있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 질량을 무시하고 부유하는 거야?’, ‘몸 빛깔을 순식간에 바꾼다는 건 발광 단백질을 가졌다는 뜻인데 어떻게 신경 세포가 없는 식물이 발광 단백질과 상호 작용하지?’ 그때 나는 다섯 살이고 한수 오빠는 열 살이었는데 어떻게 알겠냐구.”
“그, 그걸 기억하는 것도 대, 대단해.”
“나는 다 기억해. 더 말해 줄까?”
아진은 긴 머리카락이 걸리적거리는지 하나로 묶으며 과거 이석진의 행패를 하나하나 고발했다.
더 건드리지 않을 것처럼 보여서 끼웅이가 스르르 몸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매를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시무룩한 암인을 보고 한수가 암인이 먹던 포도알을 앞까지 대령했다. 끼웅이가 좋아하며 달라붙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오빠가 과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진의 말에 웃으며 듣고 있던 한수가 움찔, 몸을 굳혔다.
실제로 이석진은 과학자가 꿈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눈을 한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러나 악신이 빙의하면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과학자라는 꿈은 물론이거니와 평범했던 일상도 완전히 무너졌다.
악신은 이석진의 몸을 병들게 만들었고, 더 많은 관심을 위해 이석진을 배우가 되도록 만들었고, 직업뿐만 아니라 모든 걸 조종했다. 이석진에게 빙의한 채로 선한 이를 타락시킨 후 절망 어린 얼굴을 보며 비웃는다거나, 사람들을 꼬드겨 맘껏 음기를 섭취했다.
이석진은 배리모스가 빙의했을 때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연예계에는 이석진이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데 거부하는 바람에 정신이 이상하게 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선후배, 친구, 연인을 사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악신에게 시달리며 보낸 세월이 벌써 15년째였다.
“형, 한수 형.”
이석진의 부름에 한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나 과학자보다 배우 일이 더 마음에 들어.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계속 배우 일을 할 생각이야. 그러니까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돼.”
“하, 하지만….”
“그리고 사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업보잖아. 나는 동정받을 자격도 없어.”
“아, 아니야! 그, 그렇지 않아. 너, 너는 그때 어렸고. 내, 내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다, 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그 산에 가자고 했어. 내 잘못이야.”
“아니, 아니야. 내가. 내가 건드려서…!”
아진이 포크를 탁, 내려놨다.
“우리 서로 자기 탓이라고 하는 거 그만하자. 다 그 악신 잘못이지 우리는 죄 없어.”
지금까지 그들 사이에 금기어나 다름없었던 ‘악신’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두 남자는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끼웅이가 포도를 먹다 말고 분위기를 살폈다.
“우리는 셋 다 어렸고 제대로 된 보호자도 없었어. 뭔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상자가 있고, 주위에 말리는 어른이 없다면 어린애들은 당연히 상자를 열려고 하지. 그 상자에 악신이 봉인되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난 이제 우리 스스로를 탓하는 게 지긋지긋해. 다 악신 때문이야. 다 배리모스 때문이라고!”
“아, 안 돼…!”
한수가 벌떡 일어났다.
“귀, 귀신은 자, 자기 얘기를 하면 나, 나타난 댔어. 이, 이제 그만. 그만, 말해야, 해.”
아진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알았어. 미안. 너무 화가 나서 흥분했어.”
순순히 인정한 아진은 좀 쉬어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걸음걸이가 불안정했기에 이석진이 얼른 일어나 동생을 부축했다.
끼웅….
끼웅이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한수를 보고는 새 포도알을 도로록 굴렸다.
“나, 나한테 주는 거야?”
끼웅.
“고… 고마워.”
한수가 포도를 입에 넣고 한두 번 씹다가 그대로 삼켰다. 울음이 올라오는 탓에 울음과 함께 삼켜 버린 것이다. 눈물로 인해 눈앞이 흐린데, 왜 과거의 기억은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한수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했다.
* * *
보육원 뒤쪽에는 보름산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산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주 옛날, 돈 많고 힘 있는 양반 가문이 이 산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짓고 일대를 호령하며 살았다고 했다. 이석진이 ‘얼마나 옛날인가요?’ 물으면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수와 석진, 아진은 보름산을 제집 뒷마당처럼 누볐다. 학교에 다니려면 산을 가로질러서 다녀야 했고, 보육원에는 아이들 수에 비해 가지고 놀 장난감이 언제나 부족했다. 반면 보름산에는 신기하고 귀여운 존재들이 많았다.
이석진은 비록 그 존재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한수와 아진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며 꼭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는 ‘위아’라는 명칭을 몰랐기에 그들을 귀신이라고 불렀다. 동물처럼 생겼건, 식물처럼 생겼건, 사람처럼 생겼건 무조건 귀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