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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새벽 이슬조차 내리지 않은 새까만 밤, 작은 그림자가 대여점 중문 틈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좁은 틈을 낑낑거리며 빠져나온 암인은 동그란 보따리 더미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끼웅….
끼웅이는 현관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작심한 듯 몸을 돌렸다. 오늘따라 정원이 더더욱 넓어 보였지만 이미 각오한 바였다. 무거운 보따리를 지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때 대문 안쪽에 세워져 있던 밴의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끼웅!
끼웅이가 갓 잡은 생선처럼 폴짝 뛰어올랐다. 헤드라이트가 깜빡깜빡이자 끼웅이는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가 불 켜진 내비게이션에 달라붙었다.
[( •᷄⌓•᷅ )>?]
끼웅, 끼웅.
[(;´д`)ゞ]
끼웅웅! 끼웅. 끼웅.
[.·´¯`(>▂<)´¯`·. ] 끼웅. 끼우웅. 용마가 울면서 만류했으나 끼웅이의 결심은 확고했다. 끼웅! 암인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대로 미끄러져 차를 빠져나갔다. 반짝이는 헤드라이트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거대한 대문 앞. 빠져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대여점을 돌아봤다. 끼웅…. 전면 창 안의 따스한 노란 조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 아늑한 곳이었는데. 작업대 위를 굴러다니며 이리 선인과 손가락 놀이를 했던 기억, 이리 선인을 따라 두 손으로 자그마한 찻잔을 쥔 채 바깥을 구경했던 기억, 가구 틈으로 들어간 이물 조각을 솜씨 좋게 찾아 주고 이리 선인에게 칭찬 받았던 기억…. 끼웅이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하지만, 덩달아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이리 선인과 손가락 놀이를 할 때 김도진이 불쑥 끼어들어 엄지와 검지로 멀리 튕겨 버렸던 기억, 이리 선인과 차를 마실 때 김도진이 불쑥 끼어들어 손가락으로 튕겨 버렸던 기억, 이리 선인에게 칭찬받을 때 김도진이 불쑥 끼어들어 손가락으로 튕겨 버렸던 기억……. 끼웅…! 끼웅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장사의 행패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파란색 염색약을 묻혀 놓고도 뻔뻔하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잡귀 암인, 4월 17일생, 현재 나이 4개월. 김끼웅은 가출을 감행했다. * * * 안타깝게도 도진과 이리는 오후가 되어 가도록 끼웅이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진은 그렇다 쳐도 이리는 이미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필 천지천해로부터 급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저 살면서 장례식 가는 거 처음이에요. 까만 옷은 양복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우리 자주 가는 생활한복 집에 가자. 아, 오늘 일요일인데 문 열었나?” “전화해 볼게요.” 급한 연락이란 바로 백호 전 가주의 부고였다. 인간 사회의 부고와는 달리 위아의 부고는 슬프고 비통하고 비극적인 일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위아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죽고 나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저승에서 재판을 받는다. 재판 후에는 네 갈래 길이 있다. 1. 지옥에서 죗값을 치른다. 2. 극락에서 보상을 받는다. 3. 노동을 하며 덕을 쌓을 기회를 얻는다. 4. 윤회에 들어간다. 드물게 ‘진짜’로 죽는 경우도 있다. 아예 혼이 사라지는 것. 이런 죽음을 소멸이라 일컫는데, 태고의 선인들처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이상은 소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백호 전 가주는 덕을 많이 쌓은 어진 가주였다. 충분히 극락에서 보상을 누릴 수 있으나 그녀는 윤회를 선택했다. 불로불사의 기나긴 삶을 뒤로 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이 이어질 여행을…. 슬퍼할 일이 아니나 어쨌든 오랜 시간 살아온 천지신명으로서의 삶은 영원히 끝이 나 버린다. 윤회에 들어간 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므로 가족과 지인은 더없이 슬플 터였다. 도진은 고객들에게 취소 연락을 돌리고, 이리는 갑작스러운 부고에 놀란 지인들의 전화를 받아 주며 오전을 보냈다. 취소가 힘든 고객들도 있어서 급하게 시간을 당겨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두 시. 둘은 이제서야 위에 올라갈 준비를 했다. “스승님, 한복집 문 열었대요. 제가 조문 간다고 했더니 알아서 준비해 놓겠다네요. 오후에 간다고 했어요.” “응, 잘했어.” “옷은 해결됐고. 근데 저 장례 예절 같은 거 하나도 모르는데. 절 두 번, 상주한테 반절 한 번 맞죠? 그리고 막 국화꽃 같은 거 꽂고…. 고스톱 치고.” “절도 안 하고 고스톱은 안 쳐. 다만 백호 가문의 상징인 목화 꽃은 한 송이씩 전달하긴 할 거야.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옆에 서 있어.” “네.” “도진아, 이리 와 봐.” 도진이 쫄래쫄래 이리의 앞에 섰다. 이리가 미간을 좁힌 채 도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역시 천지천해에 들어갈 덕이 부족하구나.” “헉. 그럼 저 장례식 못 가요?” 천지천해도 진현계와 마찬가지로 들어가려면 일정량의 덕을 내야만 했다. 진현계와 단순 비교하면 1/100 정도로 적은 양이기는 했지만, 도진은 기도식에서 모아 둔 덕의 대부분을 소진했기 때문에 부족했다. “조문객 명단에 네 이름을 쓰라고 하면 돼. 장례식 한정으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덕은 받지 않으니까.” “다행이네요. 놀랐잖아요.” “곧 죽는다고는 했는데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어. 알았다면 너한테 미리 수행을 시켰을 텐데.” “전 가주께서 소천하실 걸 알고 계셨어요?” “본래 저번 달에 잠든다고 했는데, 우리 기도식 때문에 미뤘거든. 어차피 미루는 김에 가을이나 겨울에 떠날 거라더니 일찍 가 버렸구나.” 도진은 순간 율도국에서 돌아오던 배 안에서 염라대왕과 이리가 ‘백호’, ‘장례식’을 운운했던 게 떠올랐다. 그게 이 얘기였던 것이다. ‘선인의 제자가 된 것을 축하하네. 앞으로 옆에서 잘 보필하도록 하게.’ ‘네, 감사합니다. 백호 님.’ 기도식 때 본 백호 전 가주는 곧 죽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웃음이 많고 인자한 할머니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게 오랜 시간 쌓은 덕으로 아주 좋은 환생처를 구해 놓고 여행을 떠날 생각에 그렇게 웃으셨던 것 같기도 했다. “다들 항상 죽겠다고 말한 시기보다 일찍 떠나네.” “다들이요?” “응, 다들…….” 도진은 지금 이리가 태고의 친구들을 회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위로를 건넬까 했으나 이리의 눈빛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그래서 오히려 도진이 조금 외로워졌다. “아, 맞다.” 도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끼웅이는 어떡하지?” 끼웅이의 존재를 잊고 있던 도진 또한 덩달아 아, 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끼웅이는 덕이 없다시피 해서 기도식 날에도 이해자가 하루만 권속으로 만들어서 겨우 들어갔다. 천지천해의 입장료 또한 있을 리 만무했다. “이해자 신령님한테 또 권속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신령들은 장례식에 못 가. 천지신명의 장례는 인간의 장례와는 다르게 조문객을 적게 받거든. 아까 통화했는데 시왕과 칠성신, 오방장군도 모두 안 온다고 하더라고. 나는 갈 신령이 셋뿐이니까 데려갈까 했는데 강림도령도 월직차사와 일직차사를 안 데리고 간다고 해서….” “잠깐만요. 저는 가도 되는 거예요?” “너는 내 제자니까.” 도진은 약간 ‘이리 선인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저승시왕’보다 대단한 건가라는 혼동이 왔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더 대단한 타이틀이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임금님은요? 설마 임금님도 안 오세요?” “임금님은 오실 거야. 4대 백호와는 정겹게 지내던 사이셔서.” “그럼 오늘 물어보면 되겠네요.” “뭘?” “왕을 붙잡고 말씀하세요. ‘대체 왜 내 하나뿐인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딴 말을 해서 애를 골치 아프게 만드느냐. 나한테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애매모호한 표현 말고 직관적인 표현으로 설명해라’!” “음….” “음, 하실 때가 아니에요. 저도 그렇지만, 스승님도 저한테 티는 안 내려고 하시면서도 계속 신경 쓰고 계시잖아요. 이 까끌까끌한 가시를 뽑아낼 기회라니까요.” 도진의 말대로 이리는 ‘감정의 결여’를 계속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도진은 몰랐지만, 이리는 이 말을 최근 들어 거듭해서 들었으니까. 뭉용 또한 비슷한 말을 했었다. ‘선인님은 감정을 지나치게 억제함으로써 자연을 역행하고 있습니다.’ 뭉용의 말은 이리가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이고, 임금의 말은 아예 감정 자체가 일부 비어 있다는 뜻이라 같은 듯 달랐다. “나한테 말하기가 껄끄러워서 너한테 말한 걸 텐데 내가 그걸 되물어도 될지 모르겠네. 왕이 민망해할 거야.” “뭐 좀 민망하겠지만 물어보면 대답해 주시겠죠. 무시할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단순하지는 않단다. 그리고 나는 네 생각만큼 이 감정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주위에서 난리라서 피곤할 뿐이지.” 도진이 눈썹을 기울였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제가 피곤하세요?” “그 뜻이 아니었어. 아무튼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끼웅이를 누구한테 맡길지 생각하자. 산신령 중에 한 명한테 맡길까?” 도진은 끼웅이고 백호고 뭐고 이리의 감정에 대해서나 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스승의 맑은 얼굴에 정말로 피곤함 한 줄기가 비친 것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가 뭐 며칠 자리 비우는 것도 아니니까요. 오늘 갔다가 내일 올 테니까 끼웅이는 대여점 지키라고 하죠.” “혼자 잘 있을지 모르겠네.” “용마도 있잖아요. 둘이 친해서 괜찮을 거예요. 오히려 부모님 출장 갔을 때 아이들처럼 신날걸요.” “그럼 다행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 끼웅이 얼굴을 못 본 것 같아.”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나 본데. 제가 찾아볼게요.” “그럼 난 전화 좀 하고 올게.” “네.” 이리가 핸드폰을 들었다. 도진은 이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끼웅이를 찾으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