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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화마의 불길이 점점 식어 갔다. 다른 게 아니라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불길이 저절로 꺼지고 있었다.
도진은 힘이 빠진 화마를 놓아줬다. 화마는 방바닥에 납작한 떡처럼 눌어붙었다.
화마는 과거의 일이 너무 슬프고 끔찍해서 지금까지 외면하고 살았다.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서 과거의 일을 상기할만한 그 어떤 물건도 두지 않았다.
도진이 생각하기에 이건 정답이 아니었다.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마주해야만 해.”
도진은 화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철 의관은 왠지 그 말이 화마를 향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진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성큼성큼 방을 걸어 나왔다.
그는 안개가 가득한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마치 흰색 물감을 끼얹은 것처럼 자욱하게 낀 안개 속에서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관조자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
“오래전의 과거 때문에 현재를 헛되이 보내지 마세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부딪쳐야 해요. 외면하거나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요!”
“…….”
“과거 때문에 지금의 내 스승님을 슬프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목청 큰 장사의 외침이 마치 메아리처럼 온 의원, 아니, 산골짜기에 가득 찼다.
도진은 할 말을 모두 마치고서도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안개가 점차 흩어졌다.
희뿌연 세상이 제 빛깔을 찾아가고 곧 그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품이 남는 환자복을 입은 그자는 선이 얇고, 청초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이해자와 학문가, 약사가 성별은 제 맘대로 바꾸며 나타나도 한 번도 어린 모습을 하지 않았기에, 도진은 좀 당황했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오히려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만 살도 넘은 나이면서 이런 어린 모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증거로 느껴져서 마음에 안 들었다.
“안녕하세요, 관조자 님.”
“…….”
“처음 뵙는데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왜 그토록 어린 모습을 하십니까? 당신은 어린애가 아닙니다. 신체가 좀 더 성숙해야 성숙한 정신이 깃들지 않을까요?”
“자운이 그 모습을 좋아했어서 그래.”
도진이 어깨를 움찔했다. 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을 알려준 이리가 차분하게 신발을 신고 도진의 옆으로 걸어왔다.
‘나는 잘못한 거 없어!’라는 생각으로 도진이 어깨를 더욱 당당하게 폈다.
“관조자, 안녕.”
“…오랜만이에요, 선인님.”
관조자의 음성은 탁하고 음울했다. 목소리에 안개가 끼어 있다면 이런 목소리일 것이다.
“제 행동이 혹시 선인님을 슬프게 했나요…?”
“아니. 그러지 않았어.”
“그렇겠지요. 선인님은 항상 고요한 분이니까….”
체념 같은 어조에 이리는 담담했으나 도진이 발끈했다.
“아닙니다. 슬퍼하셨어요. 스승님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관조자는 도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선인님의 제자는 단챗방에서 보던 것보다 더 혈기 왕성하네요.”
“네가 핸드폰을 확인하긴 하는구나.”
“선인님… 그거 아세요?”
“뭘?”
“선인님의 제자는 얼마 전에 선인님이 없는 단챗방을 하나 만들었어요.”
이리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은 올해 들어 가장 당황해서 손을 마구마구 내저었다.
“아, 그게 아니라. 그때 복지관 일 때문에 만들었고 지금은 아무 대화도 안 하거든요? 아니, 씨. 관조자 님은 왜 나타나자마자 고자질해요? 지금 복수하는 겁니까?”
관조자가 작게 웃었다.
“이해자의 말이 맞네요. 지금까지 선인님의 곁에선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성격의 사람이에요.”
소년이 다가왔다.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소년을 보며 도진은 번개처럼 깨달았다.
이 소년의 모습이 스승과 닮았다는 것을.
마치 이리 선인의 어릴 적 같았다.
“신령들조차 내게 호통을 친 적이 없는데… 역시 장사란 특이한 이들이에요.”
“장사라서… 라기보다는 도진이가 원래 좀 개성이 강해. 그나저나 그동안 잘 지냈어? 여긴 지낼 만해?”
“네. 다들 절 배려해 주셔서 편안히 지내고 있어요. 선인님께서 종종 보내 주시는 과일도 잘 먹고 있고.”
“네가 버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선인님이 주신 걸 제가 왜 버리겠어요….”
관조자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 팔찌도 여전히 하고 계시네요.”
팔찌?
스승님이 항상 차고 다니는 까만 실팔찌를 말하는 건가? 도진은 여기서 왜 갑자기 능력 구속구인 팔찌가 언급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인님과 신령님. 밖에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얘기해요. 차와 약과를 더 준비해 올게요.”
철 의관이 둘을 불렀다. 기분이 좋은지 머리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화마는 여전히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고, 끼웅이는 작은 손으로 화마를 토닥였다.
이리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 관조자를 쳐다봤다. 관조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언뜻 보면 비웃음이었으나, 오랫동안 웃지 않아서 어색해진 것이라는 것쯤은 도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이렇게 오래 살았지만 과거와 마주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어요.”
“…….”
“외면하는 것으로는 이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가 없었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죠.”
관조자가 먼저 철 의관에게 걸음을 옮겼다. 끼웅이가 호기심이 들었는지 기웃거리다가 관조자가 손을 뻗자 허둥지둥 화마의 불덩어리 밑으로 숨었다. 상체만 숨겨서 까만 발 두 개가 뿅 나와 있었다.
관조자의 까만 눈에 얼핏 물기가 어렸다.
‘구름은 처음에는 그를 무서워했으나 나중에는 마음을 열었어.’
도진은 관조자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쉽게 짐작했다. 이리는 관조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진에게는 뒤통수만 보여서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스승님.”
도진이 이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자가 힘들게 신령님을 끌어왔으니 그 뽕을 뽑으셔야 해요. 지금까지 못 만났던 만큼 실컷 얘기해야 한다구요. 멍때릴 시간이 없어요. 자, 얼른요!”
도진은 이리를 아프지 않게 잡아끌었다. 그래, 알았어. 이리가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선인과 신령이 마주 앉았다. 오백 년만의 일이었다.
* * *
예상보다 더 늦은 시간에 대여점으로 돌아왔다. 도진은 스승님과 신령을 화해 아닌 화해하게 했다는 사실에 자아도취 해서 코가 거의 하늘로 솟구칠 지경이었다. 씻고 나오자마자 이리에게 달라붙어서 칭찬을 요구했다.
“관조자 님이 생각보다 말이 많더라고요. 수다 떨고 싶어서 오백 년이나 어떻게 참았을까요.”
“그러게. 나도 그 녀석이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어.”
“이제 알게 되셨네요. 바로 저 덕분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스승님은 그대로 의원을 나오셨겠죠. 관조자 님이 수다스럽다는 사실도 모른 체 말이에요. 화마도 과거를 극복할 수 없었을 테고요. 제가 진짜 큰일을 했어요.”
“맞아. 고마워.”
“고마우면 여기 뽀뽀 좀 해 주세요.”
이리는 정말로 도진에게 오랜만에 뽀뽀를 해 줄 마음도 있었는데, 도진이 가리킨 ‘여기’는 뺨이나 이마가 아니라 입술이었다. 너무 욕심내는 바람에 뽀뽀 받지 못하게 된 도진이었다.
“뽀뽀는 어렵고 조만간 도술을 하나 알려 줄게. 비상술(飛上術) 늘 배우고 싶었지.”
“도술은 됐고 뽀뽀해 주시면 안 돼요?”
“도진아…. 내가 네 기저귀를…….”
“기저귀 백만 번 갈았으면 뭐 해요. 어차피 우리는 곧 연인이 될 텐데. 이물의 예언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도진이 이리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로 양팔을 뻗었다. 졸지에 의자와 도진 사이에 갇히게 된 이리가 주욱 미끄러져 내려오려고 하자 도진이 한쪽 무릎을 들어서 의자의 방석에 올려놨다. 정확히 이리의 허벅지 사이였다.
“지, 지금 뭐 하는…!”
이리가 황급히 몸을 바로 앉았다. 태고의 선인은 늘 여유롭고 노련한 사람이지만 이런 쪽에서는 항상 제자에게 패배했다.
도진이 붉은 기가 도는 눈에 노골적으로 음욕을 담고서 이리를 바라봤다. 제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이리는 양손을 들어 접근을 막았다. 어깨에 살포시 얹은 손에 도진의 웃음이 진해졌다.
“스승님, 귀 좀 빨개졌는데요.”
이리가 얼른 손으로 귀를 가렸다. 도진의 말대로 뜨끈뜨끈했다. 도진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웃었다.
“계획대로 되어 가는군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이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아, 이물한테 우리가 연인이 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언제 연인이 되는지를 물었어야 했는데.”
“도진아. 좀 비켜 줘….”
“스승님, 예언 이물 또 다른 건 없나요? 날짜를 확실히 하고 싶어요. 그래야 기념일에 맞춰서 반지도 제작하죠. 네?”
“김도진.”
이리가 오랜만에 이름 석 자를 내뱉으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도진은 도리어 짜릿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다리 사이에 와 있는 무릎과 그 무릎을 따라간 이리는 정말로 당황했다. 끼웅이라도 근처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늘 외출이 힘들었는지 일찍 잠들었다.
어쩔 수 없이 도술을 사용하려던 이리가 문득 멈췄다.
“도진아.”
“네에, 스승님… 하아.”
“이제 말해.”
“뭘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참고 있는지요?”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잖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고민하고 있었지.”
“…….”
“외면하는 건 네 스타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얘기해.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도진의 능글맞고 음흉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양팔을 거둔 도진은 한 대 맞은 얼굴로 이리의 앞에 섰다. 어쩐지 허망해 보였다.
“스승님이 계속 제 고민을 모른 척하실 줄 알았는데…….”
“네 성격상 결국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해서 굳이 꺼내지 않은 거야.”
“그런 거였군요….”
도진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이리는 가만히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아도 결국 제자는 입을 열 테니까. 그게 도진이었다.
“기도식 날….”
스승의 예상대로 도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도식 날 임금님이 저를 불러 뭐라고 했는지 털어놓는 동안, 이리는 손목의 팔찌만 매만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