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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97화 (9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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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화마가 사고를 쳐서 금척을 망가뜨리는 일이 수십 년을 주기로 몇 번이나 일어났다고 했다. 그 말은 이리 선인도 화마가 의원에서 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마의 자기혐오도 알고 있고, 화마의 병실에 거울이 없다는 사실도 알 텐데 이를 놔둔다는 건….

의원의 행위는 방치로 여겼던 도진이지만, 이리 선인이 그리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이 방법이 옳은 방법인가 보다’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도진이 이리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이리를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있으니까. 이리 선인이 틀린 선택을 할 리는 없다.

“…아오, 씨. 모르겠다. 일단 찾아야지. 야, 너는 저쪽부터 찾아. 나는 여기 항아리들부터 봐야겠어.”

끼웅. 낑!

“하여튼 겁 많은 녀석. 알았어. 같이 찾아.”

도진은 본격적으로 화마와의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우선 항아리들부터. 작은 항아리, 큰 항아리 뚜껑을 하나하나 열면서 뒤졌는데 간장과 된장 냄새만 된통 맞고 끝났다. 그다음은 뒤뜰과 앞뜰의 두더지굴과 토끼굴 안쪽까지 샅샅이 훑고, 참나무와 감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의 딱따구리집과 새 둥지 안쪽까지 살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약을 조제하는 곳에서 서랍장과 약 봉투 속을 뒤지고, 부엌의 솥뚜껑도 열어보고, 벽난로의 숯 더미도 뒤집어 보고. 혹시 다른 환자의 병실에 숨어 있나 해서 병실도 찾아보고 창고와 마구간까지 모두 훑었으나, 불덩어리의 꼬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소득 없이 시간만 흘렀다.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나.’

도진은 아무 데나 쭈그려 앉았다. 스승에게 성과를 보이지 못할 생각을 하니 몸이 힘든 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다.

“스승님은 이미 금척 다 고치고 기다리고 계실 텐데.”

끼우웅.

“그런데 왜 안개가 갈수록 심해지냐. 산골짜기라 그런가….”

끼웅….

“야, 너도 좀 적극적으로 찾아봐. 내 주머니에만 들어가 있지 말고.”

낑!

“건방진 자식이. 확 버려 버릴까?”

마침 주위에 쓰레기통도 있겠다…….

“…….”

도진은 뚜껑이 덮인 쓰레기통 다섯 개를 응시했다.

일반 쓰레기통, 플라스틱류, 종이류, 비닐류, 캔류.

그중에서도 일반 쓰레기통이 묘하게 다른 쓰레기통보다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실수로 친구들을 불태워 죽여 버린 화마가 숨을만한 곳.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자가 몸을 숨길만한 곳….

설마?

도진이 벌떡 일어나 쓰레기통으로 다가가 주저 없이 뚜껑을 열었다.

“…! ……!”

냄새나는 쓰레기 속에서 붉은 불덩어리가 겁먹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 * *

싫다는 화마를 억지로 끌고 이리를 찾아갔다. 도진의 예상대로 이리는 일찍이 금척 수리를 마치고 철 의원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이리 선인을 한번 보겠다고 환자들이 하도 기웃거려서 사람 없는 구석자리로 옮긴 상태였다.

“스승님, 저 왔어요! 화마 찾아왔어요.”

도진이 화마를 데리고 가자 이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수고했어. 일단 앉아서 차를 좀 마셔. 용화차 맛이 좋구나.”

“나, 나는 차는 됐소. 푸, 풀어 주시오.”

화마는 그 이리 선인을 봤음에도 다른 위아들처럼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피하려고 했다. 철 의관이 상냥하게 말했다.

“화마 환자분, 오늘 하루 종일 굶었잖아요. 와서 차랑 약과를 좀 드세요.”

“하, 하지만… 나는 그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참, 삼기나무의 이파리는 이리 선인님께서 ‘깃털 피리’로 재생시켜 주겠다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 그게 정말이오?”

“물론이죠. 제가 이리 선인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말이야. 그러니까 얼른 와서 앉아.”

화마는 매우 기뻐했다. 불길이 화르륵 불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 그래도 나는 먹을 자격이 없소….”

“아, 존나 답답하네. 땅 좀 적당히 파고, 들어가 앉아서 차나 처마시세요. 본래 배가 고프면 더 우울해지는 법이라고요.”

도진이 불덩어리를 끌고 와 철 의관의 옆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이리의 옆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빈 찻잔이 두 개 있었다. 이리가 두 찻잔에 차를 쪼르르 따르자 도진이 냉큼 제 앞의 것을 호록 마셨다.

“스승님, 헤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죠.”

끼우웅.

끼웅이도 어기적 기어 나왔다. 이리는 허공에서 끼웅이용 미니 찻잔을 꺼냈다. 쪼륵, 차를 따르자 끼웅이가 몹시 목이 말랐던 듯 허겁지겁 마셨다.

“이곳저곳 찾아 헤매던 모양이던데 잘 찾았네. 어디에 있었어?”

“이분이 글쎄 쓰레기통 안에 있더라고요. 냄새가 심해서 오는 길에 연못에 좀 담그고 왔어요.”

“연못?”

“연못?”

이리와 철 의관이 동시에 반응했다.

철 의관은 찻잔 속 찻물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화마를 위해 눈을 가려주고 있었다.

“연못이라니… 환자분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데요.”

“아, 수면에 비치는 얼굴 때문이라면, 안개가 심하게 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다행이네요. 놀랐습니다.”

철 의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개가 꼈구나….”

이리가 중얼거리며 창문을 바라봤다. 창호지를 바른 창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에서는 안개에 휩싸인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 이제 차 다 마시고 나면 관조자 님 보러 가요. 저 빼고 벌써 본 건 아니죠? 저는 스승님의 하나뿐인 제자고 특별한 관계니까 꼭 관조자 님에게 소개해 줘야 해요.”

“그건 어렵게 됐어.”

“네? 왜요?”

“관조자가 나와의 만남을 꺼리고 있어서….”

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 듣고 있던 철 의관이 말했다.

“바깥의 안개는 관조자 님이 만들어낸 안개입니다. 지금은 선인님의 얼굴을 보기 힘드니, 이대로 돌아가시라는 뜻으로요.”

“…….”

도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가 철 의관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도진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5년도 아니고, 50년도 아니고 500년.

500년 만의 만남이다.

이리 선인이 관조자에게 줄 거라고 대여점 텃밭의 신선한 과일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라고 한다고?

도진이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저는…….”

“도진아?”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도진이 벌떡 일어났다.

“거울을 없애는 건 정답이 아니에요! 그저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요.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기만 하면 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도진은 철 의관의 곁에서 눈을 가린 채 차를 마시고 있던 화마의 뒷덜미를 냅다 잡아들었다.

“이, 이봐요! 지금 뭐 하는…!”

“으아아, 살려 주시오!”

끼우웅!

난리가 난 와중에 이리는 가만히 제자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봤다.

도진은 한 손으로 화마의 덜미를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방의 협탁 위에 엎어져 있던 거울을 끌어당겼다.

“잘 봐. 이게 당신 얼굴이야!”

도진이 화마의 앞에 거울을 들이댔다. 으아아, 화마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꼬옥 감았다.

“이봐요. 환자 괴롭히면…!”

철 의관이 도진에게 덩굴을 뻗으려다가 이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철 의관은 불안해하면서도 일단 덩굴을 집어넣었다.

“눈을 뜨고 보라고.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이 어떤지 보란 말이야!”

도진의 외침에 화마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러나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을 기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거울 속에는 붉은 불덩어리 요괴가 있었다. 주변으로 황폐해진 숲이 보였다. 엄청난 화력에 순식간에 타들어 간 시체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떡을 먹고 술을 마셨던 이들이 새카맣게 탄 채 연못 주위에 널려 있었다.

“으… 으으… 으으으…….”

다시 발작하려는 모습에 철 의관이 불안하게 이리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리는 그의 제자가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으으……. 저… 저 끔찍한 붉은 요괴가… 친구들을… 내, 내 친구들을…!”

화마의 불길이 솟구치는 순간 도진은 빠르게 도술로 불길을 억제했다. 그리고 오히려 화마를 꽉 안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고 다시 거울을 봐! 거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똑똑히 보란 말이야!”

도진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화마가 머리가 아픈 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자꾸 거울을 보라고 하는가?

거울 속에는 내 친구들을 죽인 끔찍한 요괴가 있는데.

왜 그 무서운 것을 자꾸만 보라고 하는가.

어차피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데 왜…….

“…….”

화마가 거울 속의 붉은 불덩어리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이 불덩어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마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몸의 일부는 연못 속에 있었고, 새카맣게 불에 탄 친구들은 모두 제 주위에서 죽어 있었다.

“화마, 네가 왜 연못가에서 눈을 떴을지 생각해 봤어?”

내가 연못가에서 눈을 뜬 이유.

그날 마신 술은 독주였다. 유통에 실수가 있었던 것인지 항상 불을 품고 살아서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되는 화마까지 취하게 만들었다. 화마는 이성을 잃고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놀란 친구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이렇게 모든 불길을 다 뿜어내고 나면 불덩어리는 소멸하고 만다. 무서운 불의 힘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이 친구가 모든 힘을 소진하고 죽고 말 것이다.

친구들은 화마의 불길로부터 충분히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화마를 구하기 위해서.

마침내 숲의 연못으로 화마를 유인해 몸의 일부를 연못 속에 담그는 데에 성공했다.

친구들은 화마의 불길이 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아아, 다행이구나.

이 순박한 친구가 죽지 않아서.

다들 수고했네. 다 같이 극락왕생하자고.

그래, 그러자고.

우린 먼저 올라가서 자네를 기다리겠네. 화마.

행복하게 삶을 누리다가 올라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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