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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이리가 그동안 관조자에 대한 언급을 피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태고의 선인이 얽혀 있기 때문에… 태고의 선인에 대해서도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에 피했던 것이다.
‘현시대에는 스승님 말고는 모두 영면에 들었다고 했지.’
태고의 선인에게 ‘영면’은 진짜 죽음을 뜻한다. 저승에 가는 것도, 극락에 가는 것도, 윤회를 하는 것도 아닌 진짜 소멸.
아주 오래전에 이리 선인 말고는 모두 소멸을 선택했으며, 이제는 전설로 취급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도진이 태고의 선인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이제 그것에 대해 알 때가 되었어’의 ‘그것’은 바로 태고의 선인에 대한 것이었다.
도진은 지금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그대로 질문으로 내뱉었다.
“구름과 산쥐, 풀벌레를 구해준 태고의 선인이 스승님이신가요?”
이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가 아니라 내 친구였어.”
“아….”
“친구는 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어. 딱히 뭔가 명령을 내리거나 일을 주지도 않고 그냥 산골짜기에서 셋이 함께 평화롭게 살도록 놔두었지. 구름은 처음에는 그를 무서워했으나 나중에는 마음을 열었어.”
“…….”
“친구는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피로가 쌓이면 산골짜기에 와서 소소하고 즐겁게 굴러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는 했어. 나도 그 작고 평화로운 산골짜기에 초대돼서 몇 번 갔었어. 얼마나 귀엽던지….”
이리가 얼마나 즐겁고 귀여웠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손가락으로 구름을 폭폭 찌르며 놀았던 기억, 풀벌레에게 노랫가락을 알려 주고 산쥐에게는 꼬리잡기 놀이를 알려 줬던 기억.
도진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리가 친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슬픔에 잠기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러면 위로를 잘 못하는 내가 어떻게 위로해야 하냐는 걱정과 더불어… 자신은 모르는 까마득한 시간 속을 더듬는 이리가 원망스러웠다.
원망이라니!
안타깝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이리를 원망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내가 이렇게 속이 좁았나?
스스로 어이없으면서도 샘솟는 질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구름과 산쥐, 풀벌레 모두 성장했어. 구름은 신령이 되고, 산쥐와 풀벌레는 신수가 되었는데 다들 산골짜기를 떠날 마음이 없었어. 밖으로 나가면 세상을 호령하는 존재가 될 텐데도 그곳에 머무르며 친구와 나의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었지.”
도진은 구름과 산쥐, 풀벌레가 좀 반려동물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 시간이 흐르고… 태고의 선인들이 하나둘 영면에 들기 시작했어.”
“잠깐만요, 스승님. 왜요? 늘 궁금했어요. 태고의 선인은 다들 한꺼번에 죽… 떠났다고 들었는데, 분명 그 이유가 있었을 거잖아요.”
“나는 그들에게 왜 죽으려고 하는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어. 다만 추측만 할 뿐. 너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거야.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가 죽으려고 하는 이유라면 뭐겠어?”
“…진현계 왕과 비슷한 이유겠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어.”
추억을 떠올리며 지었던 즐거운 미소는 사라지고 이제는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한 명이 먼저 긴 잠에 빠지면서 우리 사이에 죽음이 유행처럼 번져 갔어. 나중에는 나와 친구만 남았는데, 친구도 결국에는 내게 구름과 산쥐, 풀벌레를 맡기고 떠났단다.”
“…….”
“나는 그들을 친구의 권속에서 풀어 주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산쥐와 풀벌레는 산골짜기에 남았는데 구름은 나를 따라오더구나. 나는 구름에게 관조자라는 이름을 붙여 줬지.”
도진은 약간… 친구가 키우던 반려동물을 친구가 죽고 입양하는 느낌이었는데, 뭔가 경박하게 들릴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승님의 첫 신령이 탄생한 거군요. 그런데 수많은 이름 중 왜 관조자라는 이름을 붙이셨어요?”
“친구가 딱 그랬거든. 그저 하늘 위에 떠다니면서 세상 만물을 바라보는 구름 같은 녀석이었어. 그 녀석이 긴 시간 동안 살며 개입한 유일한 일은 산쥐와 풀벌레, 구름이 죽지 않도록 권속으로 만든 일뿐이야.”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녔으면서 미물 셋을 권속으로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니.
정말 ‘관조(觀照)’하는 자였구나, 싶으면서도 어떤 의미로는 시리도록 냉정하게 느껴졌다.
“스승님의 친구분이 영면에 든 시기는 언제쯤이에요?”
“1만 년 전이야.”
“스승님이 이물 상점을 연 시기랑 비슷하네요.”
“사실 이물 상점은 그전에도 있었어. 다만 지인들끼리만 아는 비공개 상점이었는데, 이제 친구들이 모두 떠났으니 이물을 모든 만물과 나누기로 하고 공개적으로 상점을 연 거야.”
관조자에 대해 물었더니 태고의 선인부터 시작해 이리 만물상점의 역사까지 배우게 되었다.
“관조자는 처음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병이 깊어져 스스로 의원에 들어갔어. 입원한 지 천오백 년이 지났구나.”
입원한 지 천오백 년인데, 오늘로 오백 년 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다.
도진은 이리에게 왜 관조자에게 자주 병문안 가지 않았느냐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정답을 알기 때문이었다.
‘관조자는 스승님의 얼굴을 보는 걸 괴로워했던 거야.’
이리 선인을 보면 그의 친구인 태고의 선인이 떠오르니까.
이야기를 듣다 보니 도진은 알 수 있었다.
관조자에게 그 태고의 선인은 생명의 은인이자 스승이고 가족이었다.
마치 저에게 있어서 이리 선인처럼….
그런 존재가 영면에 들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니 원망할 대상도 없이 영원한 이별을 했다.
살아가는 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마음에 병이 생겨 버린 것이다.
‘나라면 따라 죽었겠지.’
도진은 이리가 만약 임금님이나 태고의 선인들처럼 불로불사의 존재들 특유의 권태로움에 잠겨 영면에 들기를 선택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리를 따라 잠에 들 것이다. 물론 설득이 먼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득해보겠지만…. 그래도 스승님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스승님을 따라갈 것이다.
이리가 없는 세상에서는 단 한 번의 호흡도 하고 싶지 않다.
관조자는 그리움이 깊어져 은인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억누르기 위해서 스스로 입원했는지도 모른다.
“다 왔네. 더 궁금한 건 없지?”
때마침 용마가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도진이 시간을 확인하니, 수만 년의 이야기를 하며 흐른 실제 시간은 단 5분에 불과했다. 도진은 기분이 복잡했다.
“이제 내리자.”
“스승님.”
“응.”
“스승님은… 영면에 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이런 질문을 예상한 듯 이리가 가만히 도진을 바라봤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순간 도진은 ‘감정의 결핍’이 떠올랐다.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가던 이들이 줄지어 떠날 때도 홀로 죽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것은 이리 선인의 정신력이 강해서인가?
그게 아니면 감정이 결핍되어서?
왕의 말대로 정말 이리 선인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어서…?
‘만약 나라면…….’
만약 내가 수만 년을 살았다면, 나는 영원한 잠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도진은 이리의 입장에 자신을 놓아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엔 재미있는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이리와 함께 말이다.
오래 살면 그만큼 세상 문명은 더욱 발전되어서 더 많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을 겪을 텐데, 대체 죽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나도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나?
그러나 도진은 누가 봐도 감정 과잉이지 절대로 감정 결여 상태는 아니었다.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도진을 잠시 바라보던 이리가 덧붙였다.
“사실 그들이 정말 영면에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나기는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몰라.”
“…그 후로 본 적은.”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
도진은 영면에 들 거라고 떠난 사람들이 수만 년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어 버린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리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친구들이 살아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이리에게 감정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 증거를 명확히 하고자 죽어 버린 이들에 대해 더 캐물을 마음은 없었다.
도진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스승님이 함께 떠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 덕분에 이렇게 어리고 몸 좋은 정인을 두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궁금한 건 더 없는 모양이구나. 이제 내리자.”
이리가 차에서 내렸다. 끼웅이가 아직 앉아 있는 도진과 차에서 내린 이리를 번갈아 보다가 이리를 따라갔다.
[(⊙_⊙)?]
용마가 왜 안 내리냐는 듯 경적을 울렸다. 도진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 차를 빠져나갔다.
* * *
위아들의 병원인 의원은 수원시 여기산에 있다.
여기산은 해발 104.8m의 자그마한 산인데, 아주 오래전 인류로 치면 선사시대쯤 여기산의 산신령이 친한 위아들의 고민 상담을 몇 번 해 줬다. 그런데 이 상담이 아주 현명하고 탁월해서, 소문을 듣고 다른 위아들도 고민 상담을 하기 위해 이 산을 찾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몇 날 며칠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다. 그리하여 산신령은 위아들이 편하게 기다리도록 전각을 짓고, 제자들을 키우며 상담 일을 분담했다. 의원의 탄생이었다.
포도청이나 출입국장, 복지관은 진현계 왕의 명으로 중간계에 지어졌으나 의원은 자연히 만들어진 기관인 것이다.
그 산신령은 안타깝게도 악신의 상담을 해주다가 사악한 마음을 먹은 악신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앞으로 원혼과 대요괴, 악신은 환자로 받지 말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제자들은 산신령의 설립 취지를 계승하는 의미로 규칙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 입원 환자 중에 악신도 있어요?”
“원혼이랑 대요괴는 있는데 악신은 없어. 상담은 여기서 하지만, 입원실은 포도청 쪽에 따로 둔 걸로 알아.”
“하긴 그래야죠. 야, 악신 없대. 겁내지 말고 고개 당당하게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