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93화 (9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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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답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도진은 임금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아직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는 섣부른 추측은 그만두고 자신의 해석대로 이야기했다.

“스승님은 책임감과 사명감이 강하신 분입니다. 동시에 세상 만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갖고 계시죠. 그분이라고 피로를 모르시겠습니까. 가끔 임금님처럼 답답함에 다 그만두고 싶은 날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으로….”

“애정과 사명감.”

왕은 도진이 꺼낸 단어를 따라서 말했다. 그 음성은 너무나 건조해서 ‘애정’과 ‘사명감’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발음하는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이리 선인의 이상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이상 상태라고요?”

도진은 이제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분이 이제 막 선인의 제자가 된 사람 앞에서 괜히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씀하세요. 내 스승님의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왕은 도진의 붉은 눈을 보다가 가만히 덧붙였다.

“이리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

“그 결여와 결핍이… 그와 나의 차이를 만들었지.”

도진이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스승님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오히려 정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분이다. 물론 저 고요한 수면처럼 감정의 폭이 좁아 감정 기복이 없다시피 하지만, 그렇다고 결여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웃기도 자주 웃고, 가끔은 화내시기도 하고, 애틋해하거나 뿌듯해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이리의 다양한 모습을 보아 온 도진은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결여와 결핍은 왕과 어울리는 단어였다. 지금조차 저 짙게 깔린 허무함과 음울한 분위기가 말해 주지 않은가.

“혹시 이것도 무슨 시험의 일종입니까?”

“…….”

“스승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할 때의 대처법, 뭐 이런 걸 보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런 시험은 저한텐 통하지 않습니다. 저는 스승님을 믿으니까요. 온 세상이 다 밤하늘이 까맣다고 말해도 스승님이 하얗다고 말하면 그건 하얀 것입니다. 그러니 저한테 얄팍한 수는 쓰지 마시죠!”

도진이 턱을 치켜들고 선포하듯이 말했다.

아무 말 없이 도진을 바라보고 있던 왕이 한참 만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수면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어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건 간에 그저 고요하기만 한 호수를.

“네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은 이것뿐이니……. 그저 잊지만은 말 거라. 언젠가 필요할 날이 올 것이다.”

왕이 뒤를 돌았다. 이제 그는 호수를 등지고, 그리고 도진을 등지고 홍의동자들과 함께 호숫가를 떠났다.

도진은 왕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팔짱 낀 채 어둠을 바라봤다.

조언이라고? 시험이 아니었단 말인가?

…감정의 결여?

스승님이?

도진이 머리를 헝클였다. 차마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신음은 속으로 삼켰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 따위 흘려보내고 싶은데, 왕은 선인이고 선인은 거짓말을 못 하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깊어 가는 밤, 모두가 기분 좋게 연회를 즐기는 가운데 연회의 당사자인 도진은 홀로 어둠 속에 잠겨 갔다.

16. 관조자와 태고의 선인

기도식이 끝나고 열흘이 흘렀다. 겉으로 보기에 이리 만물 대여점은 여느 때와 똑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로 파고들어 가면 묘한 삐걱거림이 있었다.

이리는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도진은 그러했다.

‘이리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 결여와 결핍이 그와 나의 차이를 만들었지.’

왕에게서 그 말을 들은 후 도진의 가슴 속에 자그마한 가시 하나가 박혔다.

그는 마음에 쌓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답답한 게 있으면 입 밖으로 꺼내야만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야만 성이 찬다. 그러나 왕을 한 번 더 만나서 ‘언젠가 필요할 날이 온다는 게 무슨 뜻이냐.’, ‘스승님이 왜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거냐.’ 묻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다시 진현계 입장료를 모으기도 까마득하거니와 들어간다고 해도 바쁜 왕이 만나줄지 의문이니까.

그렇다면 도진은 성격상 이리에게 대놓고 물어야만 했다.

‘스승님. 왕이 저만 혼자 조용히 부르더니 스승님은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뒷담을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스승님은 정말 감정이 결여되어 있어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감정을 만들어 드려야 하나요?’

궁금한 건 전부 직설적으로 묻는 게 바로 도진의 성격인데….

이상하게 이리의 맑고 예쁜 얼굴 앞에서는 작정하고 말을 꺼내려 하다가도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왕이 함구령이라도 걸었나 잠시 의심했지만 그게 아니란 걸 도진이 더 잘 알았다.

그냥 이리에게 묻기가 어려웠다.

답을 알고 싶은데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왜 스승님에게 직접 묻지 못하는 걸까. 대체 왜 이렇게 주저하는 걸까. 그냥 물어보고 대답을 들으면 이 복잡한 마음이 해결되는 것을 왜…?

아무리 궁리해봐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끼웅.

살면서 처음으로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다. 대체 이리 선인과 관련된 고민을 누구에게 상담하겠는가?

끼웅!

그냥 흘려듣고 머릿속에서 지우면 좋을 텐데 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건지.

끼우우웅!

고민이란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세상 사람들은 이 힘든 일을 누구나 짊어지고 살았단 말이야?

“도진아.”

“네!”

이리의 부름에 도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도진을 불러도 무시당했던 끼웅이가 충격받고 풀 위에 드러누웠다.

이리는 끼웅이를 손 위로 옮겨 쓰다듬어주며 도진에게 말했다.

“물 충분히 준 것 같아서. 더 줬다가는 오히려 싹이 안 필 거야.”

“아… 네.”

도진은 바리공주가 준 선물을 대여점의 정원에 심고 있었다.

바리공주는 기도식에 참석하지 못한 대신 선물을 보내왔는데 바로 금광초 씨앗이었다. 이리의 말로는 하늘꽃밭에서만 자라는 특산물로, 이파리를 차로 달여 마시면 마음을 안정케 해준다고 한다. 돈 주고 구하기도 어려운 것이라 이리가 매우 고마워했다.

“이제 들어가자.”

“네.”

도진이 분무기를 들고 이리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시선은 반듯하게 선 작은 등에 꽂혀 있었다.

‘스승님은 분명히 내가 뭔가 고민이 있음을 짐작하실 텐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티가 많이 나거니와 티를 내지 않았더라도 그 이리 선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만약 스승님이 무슨 고민 있냐고 물었으면 차마 대답할 수도 없고 난감했을 텐데… 다행히 스승님은 도진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스승님은 날 배려하고 계셔. 그런데 어째서 이런 분이 감정이 결여되어 있고, 결핍되어 있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도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는 작업대로 돌아가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내일 예약한 고객에게 줄 염색약을 만들고 있었다. 열심히 작업하다가 창밖으로 제자가 멍때리며 물을 쏟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도진은 스승이 짠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장갑을 끼고 작업을 거들었다.

이리가 이물을 이용해 능숙하게 색을 혼합하며 말했다.

“금광초는 한 달 후쯤 싹을 피울 거야. 가을 되기 전에 차 맛을 볼 수 있겠구나.”

“제가 맛있게 타 드릴게요. 고객들한테는 주지 말고 우리만 먹어요. 여기 금광초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고객 놈들이 몰려들 수도 있잖아요.”

“왜. 몰려들면 나눠 주면 되지. 맛있는 걸 다 같이 나누고 다 함께 음미하는 건 좋은 일이잖아.”

“스승님…. 스승님은 정말이지…….”

도진의 눈에 애틋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래. 이렇게 정이 많은 분이 결여라니. 왕이 이간질하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거야. 내 스승님은 정말 다정한 분이야!’

도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애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자 부담스러워진 이리가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의자를 끌고 이리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스승님, 있잖아요.”

“응.”

“우리 열흘 전에 기도식 했을 때요.”

“…응.”

“그때….”

띠리리리리-

타이밍 맞춰서 대여점 전화가 울렸다. 도진이 인상을 확 쓰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대여점입니다!”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의원에서 일하는 철 의관입니다.

상대의 정중한 인사에 도진은 짜증도 내지 못했다.

“의관이시군요.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화마가 또 사고를 냈어요.

“화마요?”

-네…. 우리 의원 장기 입원 환자 중에 하나인데, 일단 선인님께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아실 거예요.

도진이 눈만 돌려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저녁에 간다고 해.”

도진이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내일 저녁이요.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오늘 바로 와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하루만 어떻게 버텨 보겠습니다.

무조건 오늘 와 달라고 찡찡거리는 위아들도 많은데 철 의관은 추가 요구 없이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

도진이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물었다.

“화마는 어떤 위아인데요?”

“사물 갈래의 대요괴야. 강력한 불의 힘을 가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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