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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92화 (9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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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도진아. 보고 있어.”

이리가 웃으며 도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왕의 음울한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도진은 무슨 생각인지 화살 다섯 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이리가 절 보고 있는 걸 확인한 뒤 다섯 개를 한번에 활에 얹은 후,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아까 이리가 잡아당겼을 때보다 훨씬 더 깊게 구부러졌다. 도진은 이리보다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있다가 시위를 놓았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 다섯 개는 파란색 점 다섯 개에 다다닥 박혔다.

“와아, 세상에!”

“노린 건가?”

“당연히 노린 게지! 저게 바로 장사의 힘이라네!”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도진의 입술 끝이 거의 귀 끝까지 걸렸다.

“무효죠? 또 쏘겠습니다.”

도진이 홍의동자가 든 활통에서 또 다섯 개를 집어 들었다.

“설마….”

객석이 숨을 죽였다.

긴장한 이들과는 달리 도진은 다섯 개의 화살을 한번에 앉히고 방금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시위를 놨다.

파바밧!

방금 쏜 화살들이 기존의 화살 다섯 개를 쪼개며 박혔다.

“아, 또 무효네. 또 해야겠네. 또 해야 돼죠, 임금님?”

“…….”

왕이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화살이 부족해 보이자 홍의동자가 당황하며 임금과 도진을 번갈아 봤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고, 홍의동자는 재빠르게 내려가 다른 홍의동자에게 화살을 받아서 돌아왔다.

도진은 또 다섯 개를 집어 들었다.

앞선 두 번과 똑같은 광경이 한 번 더 펼쳐졌다.

“이런. 또 무효야. 또 다시 해야겠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 또 해야 하죠, 임금님?”

“…….”

“네. 여쭤서 뭐 하겠습니까. 규칙이 규칙인데. 그럼 또 하겠습니다.”

하객들은 이제 감탄이 아니라 긴장했다.

설마… 저 녀석이 임금님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저 녀석… 김도진이 감히 진현계의 왕에게.

하객들의 머리에 ‘이리 선인의 제자’가 아니라 ‘김도진’이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 번을 더 하고 나자 마침내 임금이 손을 들었다.

“이제 그만하거라.”

왕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분노하거나 기분이 상한 듯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김도진. 말해 보아라. 이러한 신위를 보여 주었음에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탈락시키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야 쫌생이로-”

“도진아.”

이리가 가만히 도진을 말렸다.

도진이 입을 꾹 다물자 왕이 짧게 웃었다.

“내가 왕이 아니라면 모를까. 그렇게 보여서는 안 되는 신분이니 이제 그만하겠네.”

왕이 단상 가운데에 섰다. 그는 깊고 그윽한 눈으로 좌중을 향해 선포했다.

“선인의 길을 걷게 될 300년 만의 수행자를 모두가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오늘 이 시간부터 연회가 끝날 때까지 덕은 면제한다.”

와아아아! 덕 쌓기가 가장 힘이 드는 저승 세력이 제일 먼저 환호를 시작했다. 저승을 필두로 환호가 퍼져나갔다. 천지신명들도 일어나서 축하의 손뼉을 쳤다.

도진이 활을 홍의동자에게 건네고 이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홀한 듯 말했다.

“스승님. 여기 모인 이들이 모두 우리 사이를 축하해 주고 있어요. 드디어 우리 사이를 인정받았다는 게 너무 기뻐요.”

“…도진아, 사제지간이야. 스승과 제자. 너는 제자가 된 거야.”

“누가 뭐라 했어요? 저도 사제지간임이 인정받아서 기쁘다는 건데요.”

“…….”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홍의동자에게 과녁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하던 왕이 웃음을 지은 것이다. 깊은 수심이 깔렸던 얼굴에 미소가 걸리자 상당히 잘생긴 외모가 되었다.

“왕을 한 방 먹이더니 제 스승에게마저 한 방 먹이는군. 이리 선인께서 참으로 무서운 자를 제자로 맞이하십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야 할지….”

“스승님!”

“도진아, 임금님께 감사 인사드려.”

“감사합니다! 근데 스승님!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니요.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스승님은 가볍게 던진 돌에 제자는 가슴에 피멍이 든다니까요!”

이리가 오늘만 두 번째로 이마를 짚었다. 왕은 한 번 더 웃었다. 이번에는 무려 소리 내서 웃었기에 이리와 도진은 동시에 왕을 돌아봤다. 그러나 그때 이미 왕은 시치미를 뚝 떼고 수심에 잠긴 우울한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 * *

많은 이에게 여러 의미에서의 충격을 안기며 본식이 끝나고, 저녁 연회가 시작되었다.

이리는 선인도 취하는 술을 긴급히 공수해 와서 뿌렸다. 중간계에서의 주류세처럼, 진현계에서도 ‘취하는 술’에는 마실 때마다 세금처럼 덕이 자동으로 빠져나가는데 임금님께서 덕의 면제를 선언하셨으므로 거리낄 게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하가 보낸 샤먼의 단체 영상편지까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광판에 띄우자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리 선인, 내 잔도 받으시오!”

“선인님이 주는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영광이겠군!”

“이리 선인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리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끊임없이 하객을 상대해야 했다. 도진 또한 모두에게 인사를 돌려야 했기 때문에 둘은 잠시 이별했다.

도진은 특히 장군신들에게서 인기가 많았다. 그들은 도진이 장군신이 아니라 선인이 될 거라는 데에 아쉬워하면서도, 그 어떤 장사도 이루지 못한 길을 걸으려 하는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특히 도진의 무위보다, 임금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게 인상적인 듯했다.

“으하하하! 내가 삼천 년을 살았지만 이렇게 간이 밖으로 나온 자는 처음이야. 자, 한 잔 받게나!”

“김도진. 자네의 이름은 널리 퍼질 걸세. 자네가 다음 왕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이리 선인의 제자라기에 시기했는데, 이것 참.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게지.”

도진은 귀가 입에 걸려서 주는 대로 넙죽넙죽 술을 받아마셨다. 특히 복지관의 소 장군도 참석했는데, 소 장군은 지난번 싸웠을 때의 일을 들먹이면서 도진과의 인연을 자랑했다.

“다들 그거 아는가? 나는 중간계에서 김도진과 짧게 대결을 나눈 적 있네. 저자는 맨손격투도 아주 뛰어나다네. 하하하!”

소 장군이 승부의 결과를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아서 다들 ‘김도진이 이겼구나’ 짐작했다.

넙죽넙죽 받아마시던 도진은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마침내 조금 알딸딸할 지경이 되었다. 그는 자체 휴식 타임을 갖고 들꽃궁 내에 몇 없는 담벼락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도력으로 술기운을 내보내고 있는데 그의 옷자락을 흔드는 손길이 있었다.

“음?”

그 손길의 주인은 붉은 옷을 입은 동자였다. 임금의 시중을 드는 홍의동자의 등장에 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길 잃었어요?”

“아닙니다. 저희 왕께서 그대를 찾으십니다.”

“깜짝이야. 말할 줄 알았습니까?”

“말은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청의동자들도 말을 하지 않나요?”

“어, 걔네는 하는데 너희는 안 하길래 못하나 했지.”

도진이 뺨을 긁적였다.

“임금님이 나를 찾으신다고?”

“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나한테만 혼자 조용히?”

“네.”

“스승님 없이?”

“네.”

거듭 확인한 도진이 남은 술기운을 모두 내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가자.”

들꽃궁은 후원이 다섯 군데 있는데 그중에서도 풀꽃 호수라고 이름 붙인 후원은 외진 곳에 있는지라 하객들에겐 안내하지 않았고, 나비 선인도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 동떨어진 후원으로 도진을 불렀다.

도진을 안내한 홍의동자가 꾸벅 인사하고는 총총총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진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호수 앞에서 똑같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는 왕에게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김도진.”

왕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취한 것 같지는 않구나.”

“그깟 취기쯤이야 도력으로 날려 버렸죠.”

“진현계 주민들은 취기를 느끼면 그것이 아까워서 쉬이 날려 보내지 못하는데 역시 너는 다르구나….”

도진은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그렇습니까” 하고 말았다.

왕은 음울한 사내였다. 아까 단상 위에서는 분명 소리 내서 웃기도 했는데, 지금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 웃음소리가 환청이었나 생각될 정도로 분위기가 어둡고 침울했다. 그렇게 촐랑촐랑 가벼운 보부상과 친구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김도진. 너는 내가 왜 오천 년 만에 왕위에서 내려오는지 아느냐?”

“정확한 이유를 들은 바는 없습니다. 다만 추측할 뿐이죠.”

왕이 각도를 틀었다. 어떻게 추측하는지 말해 보라는 시선에 도진은 늘 그렇듯, 솔직하게 말했다.

“질려서겠죠.”

“…….”

“5천 년 전에 즉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고작 20년을 살았으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시간을 진현계의 가장 윗전으로 지냈는데 어떻게 안 질리겠습니까. 권력도 그 정도면 저주입니다. 내려놓고 자유로워지고 싶으시겠죠. 저는 이해합니다.”

왕은 이제 도진을 향해 완전히 각도를 틀었다. 거리를 두고 마주 본 자세가 되었다. 여전히 면류관을 쓰고 있었는데, 수정처럼 생긴 장식들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대 말이 옳다. 나는 이 삶에 지쳤어.”

그 인정마저도 담담함이 지나쳐서 건조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았고… 아주 오래 일했지.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쉬고 싶다.”

“네, 당연합니다.”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하느냐?”

“네.”

“김도진. 네 스승은 나보다도 훨씬 오랜 옛날부터 일해 왔다.”

“…….”

“그가 중간계에서 이물을 책임진 지 일만 년이 넘었지. 헌데 이리는 어째서 나와 같은 당연한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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