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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객들이 수군거렸다.
“뭐가 나왔을까? 육체 능력이 나와야 유리하지?”
“그렇지. 이리 선인의 제자는 장사니까.”
기도식을 겪은 이들, 겪어본 적 없는 이들 모두 기도식의 하이라이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바로 임금님의 과제를 스승이 고른 뒤 제자가 수행하는 것. 여기서 성공해야만 선인의 제자가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이 시험에서 탈락한 자가 없다지.”
“맞네. 만약 여기서 김도진이 실패한다면 이리 선인의 명성에 큰 흠이 될 거야.”
“으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보시오. 초 치지 말고 입 다물고 보기나 하시오.”
수군거리는 이들의 앞에 있던 이해자가 타박했다. 제 앞줄에 앉은 이들이 이리의 신령들인 줄 몰랐던 하객이 아이고, 미안하오. 하며 사과했다.
이해자는 다리를 달달달 떨었고, 약사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학문가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끼웅이는 이미 예전에 이해자의 손 위에서 졸도한 참이었다.
임금이 홍의동자에게 족자봉을 건네자 홍의동자는 하객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앞에 펼쳤다.
“오오…!”
“아이고, 세상에…!”
하객들이 웅성거렸다.
[육체 능력]
도진에게 가장 유리한 종목이 나왔다. 이해자가 아싸,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나왔던 뿔을 집어넣으며 안정을 찾았고, 학문가는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하객들 대개가 이리를 존경하고 있기에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김도진이란 자가 시험에서 떨어져 이리에게 흠결 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설마 장사가 육체 능력에서 탈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리 선인의 제자가 될 이는 어서 올라오거라.”
왕의 명령에 도진이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이리가 미소 지으며 도진을 맞이했다.
“도진아.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걱정 마세요, 스승님. 제 사전에 긴장이란 단어는 없어요.”
도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육체 능력, 도술, 정신력. 이 세 가지 종목 모두에 자신이 있었다. 이리에게 아무거나 안심하고 고르라고 했던 건 진심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스승님이 육체 능력이라는, 자신이 있어도 너무 자신 있는 종목을 뽑으셨으니 이제 제자로서 답례를 해야 할 차례였다.
도진은 이리에게 근사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한번 지어 주고는, 왕의 맞은편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왕은 옥좌의 팔걸이에 팔을 걸친 채 도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 이리 선인이 마음을 바꿔 제자로 받아들인 이가 어떤 이인지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도진은 눈을 마주할까 아니면 고개를 숙일까 고민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건방져 보일까 봐 고개를 내렸다.
탐색은 결코 길지 않았다. 왕은 나직하게 말했다.
“김도진. 너는 장사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장사가 육체 능력을 뽑았으니 결과야 뻔하지 않겠느냐.”
“그렇죠.”
도진은 별생각 없이 덧붙였다.
“육체 능력이 아니라 다른 종목을 뽑아도 뻔했겠지만요.”
“다른 이의 제자였다면 자신감이 과하다 하겠으나, 이리 선인의 제자이니 할 말이 없구나. 그래, 네 말대로 자질이 무척 뛰어나니 시험에 변형을 주는 게 어떨까 싶다.”
“변형이라면…?”
“진현계 제일의 신궁과 시합을 하는 게 어떠하느냐.”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객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진현계 제일의 신궁? 누구지?’
‘염라대왕 아닌가요?’
‘염라대왕은 창술이고, 오방장군 중 하나이지 않나 싶은데.’
‘박씨부인도 대단한 명사수라고 알고 있소만.’
‘그렇다면 그 박씨부인의 스승인 마고 대모님을 말씀하신 건지도….’
도진은 누가 됐든 자신이 있기에 고민 없이 대답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현계에 막 발을 들인 이에게 승리한다고 해도 얻는 바가 없고, 패배하면 오히려 신궁이라는 칭호만 빼앗기게 될 텐데 누가 저와 겨루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군. 그럼 그 상대에게도 의사를 물어봐야지.”
왕은 이리를 응시했다.
“어떻습니까, 이리 선인. 제자의 상대가 되어 주겠습니까?”
도진이 입을 쩍 벌렸다.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다시 요란스러워졌다.
‘이리 선인? 이리 선인이 활도 쏠 줄 알았소?’
‘그야 물론 오래 살았으니 활질도 해 보셨겠지만, 신궁인 줄은 몰랐는데.’
당황스러운 건 이리의 신령들도 마찬가지라서 눈을 끔뻑끔뻑하면서 ‘야, 선인님이 활 쏘시는 거 넌 알고 있었냐?’, ‘아니. 몰랐지. 활 쏘시는 모습 한 번도 못 봤는데?’ 했다.
끼웅…?
때마침 정신을 차렸던 끼웅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상황 파악을 하고서는 다시 깨꼬닥 넘어갔다.
하객들과 마찬가지로 도진도 혼란스러웠다. 반대로 왕이 오늘 중 가장 짙은 웃음을 지었다.
“이리 선인이 활을 놓은 지가 오래되어 지금은 아는 이가 드물지만, 그는 진현계에서 으뜸가는 신궁이지…. 이리 선인. 제자와 대결을 하겠습니까?”
“아니, 잠시만, 잠깐만요. 임금님. 그냥….”
도진이 혼비백산하며 일어나서 이 시합을 취소하겠다고 말하려는데, 이리가 더 빨랐다.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왕이 기다렸다는 듯 홍의동자에게 활과 화살통을 가져오고, 지붕 위 잡상에 과녁을 매달라고 지시했다. 홍의동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동안 도진이 이리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스승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일부러 져 주시려고요?”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명중시킬 테니까 너는 너대로 최선을 다하도록 해.”
“그럼 제가 먼저 쏠게요.”
“왜?”
“스승님은 가운데에 명중시킬 텐데, 제가 뒤 차례에 화살을 쏘면 스승님의 화살을 쪼개 버리게 되잖아요. 그럼 불경한 짓은 할 수 없어요.”
물론 도진이 호시탐탐 이리를 노리고 있는… 스승을 어떻게든 잡아먹고 싶어 하는 제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승의 활을 쪼개야 한다니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는 일은 결코 불경한 일이지 않아.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야.”
“그래도… 이건 불공평해요. 저 혼자 테스트받으면 되는데 왜 스승님까지 건드는지 모르겠어요.”
“도진아, 왕한테도 다 들려.”
도진이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다물었다. 슬쩍 왕 쪽을 보자 왕은 홍의동자에게 과녁 위치를 조정하고 있었다. 다 들었겠지만 일단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과녁은 약 500m 거리에 있는 궁의 지붕 가장 꼭대기의 잡상에 매달았는데, 인간계에서 흔히 보는 과녁판과는 달랐다. 납작한 판이 아니라 동그랗고 입체적인 구 형태로, 지름은 10cm 정도 되어 보였다. 무게가 아주 가벼워서 바람결에 따라 계속 흔들리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마치 풍선 같았다.
붉은 염료로 중심을 표시했고, 중간중간 푸른색 점을 다섯 개 찍었는데 이 푸른 점에 화살이 맞으면 무효 취급이라고 했다.
“무효면, 다시 쏠 기회를 주는 건가요?”
“응.”
“만약 다시 쏴서 또 파란 점을 맞추면요?”
“또 기회를 줘.”
“그렇군요. 특이한 시스템이네요.”
과녁은 인간 것과 많이 달랐으나, 화살과 활은 국궁과 아주 비슷했다. 화살촉이 훨씬 더 가늘다는 것만 빼고는 길이도 생김새도 같았다.
먼저 화살을 쏘기로 한 이리 선인이 활을 집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활을 만져 보네.”
이리가 손에 익히려는 듯 손잡이부터 도고지까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오오….
와아아아….
고작 그뿐인데도 하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도진이 슬쩍 가장 첫 줄에 앉은 천지신명들을 살폈다.
옥황상제와 염라대왕, 마고할미는 서로 작게 속삭였고, 바로 옆의 박씨부인은 궁수로서 호기심과 호승심을 드러냈다. 주작, 백호, 청룡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는데, 현무는 품에 안은 소년에게 정과를 먹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도진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이리의 신령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해자, 약사, 학문가가 입 모양으로 뭐라 뭐라 말했다. 도진이 자세히 보니 ‘뒤돌아’였다. 도진이 고개를 돌리자 이리는 화살을 막 꽂고 있었다.
“스, 스승님! 바로 당기시게요?”
“응. 왜?”
“아니, 뭐, 장갑이나 보호대나….”
“필요 없어.”
하마터면 이리가 쏘는 모습을 못 볼 뻔했다. 도진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리는 화살을 꽂고 바람에 핑그르르 돌고 있는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더니 바로 손을 놓았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과녁의 가장 가운데, 붉은 점에 박혔다.
“와아아아아!”
“세상에, 신궁이라더니 정말이었어!”
“이리 선인!”
하객들이 이리 선인을 연호했다.
제자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기도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니 이리는 멋쩍음에 얼른 활을 내려놓았다.
“네 차례야.”
“스승님은 이렇게 활을 잘 쏘시면서 지금까지 왜 숨기셨어요?”
“딱히 숨기진 않았는데…….”
“대여점에 돌아가면 정원에 과녁 하나 마련해야겠어요.”
“그건 왜?”
“종종 스승님이랑 활 쏠래요. 스승님 활 쏘시는 모습 존나 멋있단 말이에요. 저 지금 심장 너무 뛰어요. 튀어나올 것 같아요. 스승님 너무 멋있어요.”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도진의 목소리가 크기도 했거니와, 설령 작게 말했다고 해도 이곳에 듣지 못할 이가 없었으므로….
‘나비 선인 말로는 김도진이 이리 선인에게 연정을 품었다던데 정말인가 봐.’
‘마음을 품는 것이야 자유라고 해도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다니 요즘 세대는 정말 다르구만.’
하객들의 수군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이리가 옆으로 물러났다.
도진은 이리와는 달리 장갑과 보호대를 착용했다. 임금이 이리에게 물었다.
“이리 선인. 몇 년 만에 활을 잡은 겁니까?”
“진현계 활은 몇백 년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군요. 기도식이 끝나면 그대에게 내기를 청하려고 했는데 취소해야겠습니다.”
“내기라고요?”
“예. 내가 왕이 되기 전에 종종 함께 활을 쏘고는 했잖습니까….”
“아…. 그랬죠.”
이리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현 임금과 마고, 보부상, 지금은 죽은 3대 백호. 이렇게 어울려서 종종 활 내기를 하곤 했었다. 까마득하게 오래전이었다.
“저는 요즘 들어 그 시절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리 선인은… 그때가 그립지 않으십니까?”
“그리워한들 어쩌겠습니까.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을. 그만큼 더 현실에 충실해야지요.”
면류관이 찰랑 흔들렸다. 이리를 바라보는 왕의 눈빛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왕이 상처받은 듯 보여서 이리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왕이 마른 입술을 열었다.
“이리 선인. 그대는 정말이지…….”
“저 쏩니다!”
도진이 버럭 소리쳤다.
“저 쏴요. 지금 쏠 거예요. 바로 지금. 이제 막 쏘려고 하고 있습니다!”